| 2008.8.17 (김 미혜 목사)
하나님을 찾아가는 더듬이
(Antenna for Seeking God)
사도행전 17: 22-31
지금 북경에서는 제 29회 전 세계 올림픽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세계 매스컴들은 100년의 올림픽의 꿈을 이룬
중국이 역대 최고였다고 칭찬을 자자하게 받았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중국만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한 눈에 잘 보여주었고,
더 나아가 세계 최강으로의 미래를 향한 그들의 염원을 엿 볼 수 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매 4년마다 이념과 종교를
초월한 전 세계 최고의 운동선수들이 모여서 마치 세계 인류의 대 잔치를 벌이는 올림픽은 1896년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의 수도로 수호신이었던 아테네여신에서 그 이름을 따왔습니다. 파르테논 신전과 수많은
사원과 웅장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문학, 철학, 과학 및 수사학이 수천 년 동안 꽃을 피웠던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며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린 곳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제논 등의 철학자들을 배출하였고 비록 BC
146년에 로마에 의해 정복을 당하지만 로마인들조차도 그리스의 문화를 사랑하여 정치적, 문화적 자유를 누릴 수가 있었던
도시였습니다. 저는 직접 가 보지 못했지만 많은 교우들께서 이미 이 곳을 다녀오신 분들도 있겠는데요, 바로 세계 최초의
선교사이며 복음 전도자였던 바울 사도께서 이 유명한 도시 아테네를 방문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잠시 살펴보면 바울 사도가 안디옥 교회의 선교사로서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다시 2차
선교여행을 떠났는데 자기가 계획한 지금의 터키지역으로 가는 길이 막혀서 답답해하던 중에 어느 날 밤에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 우리를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환상이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고 자신의 전도
여행의 방향을 수정하여 유럽지역으로 가게 됩니다. 처음 도착한 빌립보에서는 자주색 옷감장수 루디아라는 여자를 만나
그 집에 머물게 되면서 유럽최초의 가정교회인 빌립보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에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 머문
후에 베뢰아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바울이 가는 곳마다 이단 사설을 전하는 자로 지목받아 쫓겨 다녔기 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잠시만 머물고 가더라도 주님을 믿는 자들이 생겨났고, 그 소수의 사람들이
가정에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됨으로써 가정교회들이 생겨났습니다. 따라서 유대교를 버리고 이단교인 예수를 전한다고 하여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부추겨 소동을 일으켰는데 베뢰아에서도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일행보다 먼저 아테네로 피신 가서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아테네를 돌아보았는데 가장 먼저 바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도시 전체가 각종 우상의 신전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면서 바울의 마음은 격분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아테네는 그리스 다른 모든 지방의 우상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우상이 있었을 정도로 신전이 많아서 아테네에서는 사람보다
신을 만나기가 더 쉽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든지 새롭고 신비한 신이 전파되면 그 신을 위해
사원이나 제단을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 한복판에서 수많은 우상들 속을 거닐던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거나 알지 못함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신전을 지어야 하는 아테네 사람들을 바라보며 거룩한 분노를 품게 되었고,
한편으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인 디모데와 실라가 도착하기도 전에 홀로
안식일에는 그 곳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평일에는 저자거리, 아테네 사람들의 생활과 활동의 중심지였던 시장에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테네는 쾌락을 인생의 목표라고 본 에피쿠로스학파와 이성에 일치하는 삶이야말로 선하고 도덕적인 삶이라고 가르친
스토아학파의 발생지였는데 스토아 철학은 이 당시 로마 황제나 고관들 중에서도 추종자가 많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밤낮으로 저자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이들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바울을 말쟁이라고 불렀는데 말쟁이는 ‘씨앗을 줍는 자’ 란 뜻으로 곡식을 따 먹는 새들이 거리에서
씨앗을 줍는 것처럼 지식의 단편들을 주워서 나열시킨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사상을 도용하여 그럴듯하게 둘러대는 자를
가리키는 당시의 속어였습니다. 마치 복음을 조롱하는 자들이 성도를 가리켜 예수쟁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말이었습니다.
이처럼 이들은 바울을 무시하고 조롱하면서도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에 대해서는 생전 처음 듣는 새로운
교훈이라고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결국에는 바울을 붙들어다가 아레오바고 법정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아레오바고는 아테네의
주요 종교, 도덕상의 문제를 재판하고 바울과 같은 방문자들에 대한 재판이 열리던 곳으로 소크라테스도 국민 종교를 배반하고
다른 신을 전한다고 하여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던 곳입니다. 바울은 이제 이 도시에서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게 될지 아니면
쫓겨나게 될지 중대한 상황에 직면하여 법정에 서게 된 것입니다.
본문이 시작되기 직전인 사도행전 17장 19절을 보시면, "당신이 말하는 이 새로운 교훈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소? 당신은 우리 귀에 생소한 것을 소개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소."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이들이 진심으로 진리의 말씀을 듣기 원했다기 보다는 호기심과 탐구심이 강했던 아테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헬레니즘의
상징과도 같은 아레오바고 법정의 한 복판에서 22절부터 바울의 증언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아테네 주민들의
누구보다 열성적인 종교심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테네 주민들은 수많은 신전을 세우고 우상을 섬기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신전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알지 못하는 신’의 기원은 주전 6세기에 아레오바고
지역에 큰 질병이 유행하였을 때 구레네 사람 에피메니데스가 와서 이를 구원하고 많은 신들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렸는데
혹시 그 때 빠진 신을 두려워하여 ‘알지 못하는 신’에게란 제단을 쌓았다는 유래가 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의
종교적인 관심에서 부터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서 가르쳐 주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전하고 있는 하나님은,
첫째,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결코 사람이
지은 신전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바울 앞에 서 있는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세상 만물은 영원 전부터
존재해 왔던 원자들의 우연한 집합에 의해 생겨났다고 믿고 있었는데 바울은 모든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전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테네 시민들은 신도 거주할 집과 먹을 양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신전과 제물을 바치던 사람들인데 바울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무엇이 부족해서 사람의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지으셔서 생명과 호흡을 주시고 그 외의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생명과 호흡을 주셨기 때문에 모든 인류가 한 하나님에 의해 지어진 한 조상을 가진 한 혈통이라고
전합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아티카라는 본토의 흙에서 생겨나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자랑하던 아테네 사람들의 교만을
꺾는 말씀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의 연대와 거주의 한계를 정하시고 인간들과 가까이 하시고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이 신이 우주를 창조한 후에는 멀리 물러서서 인간의 일에 절대 관여치
않는다고 믿었던 것과 반대되는 새로운 교훈이었습니다. 어느 민족이 일어나고 망하는 연대를 작정하시고, 모든 나라의
국경도 정해 주신다는 것은 온 인류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한 혈통으로 지으시고 살 시기와 거주의 경계를 정해 주시는 것은 그들로 하나님을 찾아 발견케
하시려는 것이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테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며,
본래 사람을 지으실 때부터 주신 하나님을 갈망하는 유전자를 (gene)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려는 속성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힘써서 하나님을 찾으면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마치 태아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으나 때로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예배시간 뿐만 아니라 날마다 호흡하며 살고, 움직이는 우리의 일상의 삶이,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고 있다는 바울 사도의 증언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느냐 아니냐 입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이 늘 하나님 안에서 살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에는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생각하고,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속에 머무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아테네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그리스 시인의 글을 인용하면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 라는 구절이나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다’는 구절이 바로 그들이 자주 시로 읊는 구절이지만
막상 그 시대로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임마누엘(God is with us)의 하나님이심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교리에서 중요한 두 기둥이 바로 하나님의 초월하심과 내재하심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 두 가지 속성은 성경이 동일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 한국 기독교에서는 초월자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이 강조되어 왔지만 상대적으로 우리 안에 내재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강조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성경말씀은 곳곳에 많이 있지만 우리가 가장 잘 인용하는 몇 구절을 살펴본다면,
갈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그는 쓸모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버린다".
고전 6:19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는 30-31절에서 이제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고 무지했던 죄에서 회개하라고 촉구하면서
무지했던 시대에는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셨다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사람을 통해서 세계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이란 한 사람을 가리키며 아랍어로는 사람의
아들, 인자를 뜻합니다. 인자란 때로 특별한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칭호로 사용하실 때도
인자란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되며 또한 심판의 근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용서를 받을 것을 촉구함으로써 아레오바고 법정에서의 증언을 마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바울 사도는 신을 만나기를 원하지만 아직까지 인간적인 생각으로 신전과 제물을 끊임없이 바침으로 언젠가는
신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만을 가지고 사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신은 그렇게 힘들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러분
안에 살고 있는 분이시므로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면 만날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마치 꿀벌이 사방으로 다니며 꿀을
채취한 후에 더듬이로 자기의 집을 자연스럽게 찾아가는 것처럼 우리 인간 안에는 하나님을 찾아가려는 더듬이가 있기에
하나님께 자연스럽게 찾아가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요즘 미국과 유럽의 곳곳에서 꿀벌들이 실종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미국에서만 올해 26개주의 양봉농가에서는
60%의 꿀벌이 실종되었다는 보고와 영국, 독일, 스위스, 스페인 등지에서도 같은 보고가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영국의 인디펜던트지는 요켄 쿤 박사가 이끄는 독일 란다우대학 연구팀의 결과를 발표했는데 꿀벌의 실종 현상은 휴대전화의
전자파로 인해 꿀벌들의 신경계통에 이상을 일으키게 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과학자들은 꿀을 채집하기
위해 나선 벌떼가 모두 사라지는 현상을 ‘벌떼 페사장애’라고 부르는데 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한 결과
기후변화, 서식지 환경변화, 혹은 세균감염 등의 원인을 내어놓고 있지만 아직까지 과학자들끼리 일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꿀벌들의 감소현상으로 인해 많은 과일 재배농가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꿀벌들의 더듬이가 제대로 작동치 못하도록 방해하는 전자파들처럼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더듬이가 때로는 많은 방해들로 인해서 잘 작동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면 이 더듬이는 방향을 잃게 됩니다. 때로는 우리의 무관심, 나태함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이 더듬이의 특징 한 가지는 오직 사랑으로만 작동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본질 그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하나님을 찾기가 힘듭니다. 아테네
시민들처럼 지극히 이성적인 철학으로도, 열심이 특심인 종교심으로도, 날마다 신전을 찾아가 제물을 드리는 종교적인 행위로도
불가능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인내하며 기다리면 하나님은 조용히 찾아와 만나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에 빠진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여러분과 제가 사랑에 빠졌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지금 막 헤어져 왔는데도 다시 만나고 싶은, 잠시도 떨어져있는 것이 힘든 깊은
사랑에 빠진 적이 있으십니까?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도 이런 깊은 사랑의 관계를 우리와 맺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하나님을 아버지, 아빠라고 부르신 것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도 획기적인 호칭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은 너무나 전능하시고 완전한 분이시라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부르면 죄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부르지 못했고, 수많은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고 믿었기에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상상도하지 못했는데, 이런 고정 관념을 완전히 깨뜨려 버리시는
충격적인 호칭, 아빠! 는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는 부모 자녀와의 사랑의 관계처럼 친밀한 것임을 가르치시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스바냐 3:17에 보시면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 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는 말씀에서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새롭게 하고 우리를 보면서 노래하며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호세아 6: 6의 말씀에는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고 우리의 드리는 어떤 예배의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변함없는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일로 바빠서 하나님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주님을 위해 참고, 고난을
견디어 낸 것을 칭찬하시지만, 네게 나무랄 것이 있는데 네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다시 회복하라고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 식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는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데 미지근한 사랑은 우리 사람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도 원하시지 않으시며 이왕이면 불붙는 뜨거운 사랑을 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저와 여러분이 부지런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더듬이를 작동하여서 하나님께로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향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고요한 가운데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처음부터
너를 사랑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너를 사랑한단다. 이 사랑 때문에 십자가로 향해서 걸어갔고, 이 사랑 때문에 골고다
언덕에서 죽을 수 있었으며, 이 사랑 때문에 죽음을 이기고 일어난 것이란다. 나의 사랑은 조건부 사랑이 아니기에 네가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 사랑으로 나는 오늘도 기다리고 있다. 네가 사랑의 더듬이로 나를
찾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나는 너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다 같이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오늘 여기 이 자리에서 아버지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주신 사랑의 더듬이가 있음에도
길을 잃어버린 꿀벌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했습니다.
이제 말씀 속에서 우리 안에 계신 아버지를 언제든지 더듬어 찾으면
만나주신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를 드립니다.
제 마음의 사랑의 불을 켜고
아버지께만 이 마음을 드리겠습니다.
부족하지만 사랑해주신다는 말씀에 응답하여
우리의 사랑을 드립니다.
아빠,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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