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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2일 (최지훈 목사)

“부활의 새벽을 기대하라”
(Look for the Dawn of Resurrection)
로마서 6:3-5

우리가 일 년 중 부활을 생각하면 당연히 부활주일을 생각하게 됩니다만 어떤 면에서 성령강림주일과 그 후의 시간 역시 진정한 부활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주일이 그 사건이 일어난 때라면 성령 강림주일은 교회가 예수의 부활을 전하기 시작한 때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오순절 (Day of Pentecost) 전에는 심지어 제자들도 이 부활의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갈팡질팡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을 때, 그들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이 비로소 그들에게 이해가 되었고 살아있는 진리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처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무엇보다 부활의 증인들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 앞에 몰려든 군중들 앞에서, 공회(the Sanhedrin) 앞에서, ‘나사렛 예수가 다시 사셨다’고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의 사역의 말기에 자신이 왜 복음 전도자가 되었는지를 간증하면서 ‘나는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소식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근대 서구 사회에서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부활절이 아니면 흔히 장례 예배때 생각하는 사뭇 낭만적인 개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죽음을 뛰어넘는 소망의 소식은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전 세계의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죽음의 현실과 매일 부딪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쓰촨성에서, 미얀마에서, 아프리카에서, 대도시의 빈민가에서 삶은 허무와 두려움에 접해 있습니다. 설령 뉴스에서나 보게 되는 극적인 상황속에 있지 않다고 해도 우리의 삶에는 또한 크고 작은 절망의 순간이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향한 복음은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한다는 것이며 우리도 부활에 누구나 참여할 소망과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볼 때 부활이라는 것은 그저 쉽게 용납하기에는 너무나 놀라운 소식입니다. 그 말 뜻은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간혹 거의 죽어가던 것이 극적으로 회생하는 것을 부활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회생(回生, resuscitation)과 부활(resurrection)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생명이 남아 있는 이상 이성적인 희망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음 뒤에 오히려 새 생명이 나타나는 것은 역설적인 진리이며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서 나타난 부활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심지어 그 시신을 거두어서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사흘 째 되던 날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단번에 믿기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본다면 죽음이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할 경우가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병균이 죽어야 몸이 삽니다. 좋지 않은 습관을 죽이면 몸과 마음이 새로와집니다. 사무엘기하21장에 보니까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에 크게 흉년이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하나님께 물으니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하여 살인죄를 지은 까닭이라는 말씀이 왔습니다. 섬뜩한 이야이기이지만 다윗이 사울의 자손 가운데서 몇 사람을 처형하며 매달았을 때 비로소 그 땅이 회복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설적인 신비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의 부활도 사실은 이러한 진리의 연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에 대한 죽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사랑이 아닌 교만과 자기 중심으로 형성된 자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불의한 행위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죄인의 모습으로 고난을 받고 죽으셔서 죄를 담당하셨고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써 죄를 이기셨습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죄를 이기셨을 때, 죽음은 무너지고 생명이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은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돌이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의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For if we have been united with him in a death like his, we will certainly be united with him in a resurrection like his)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흔히 죽은 뒤를 생각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오늘 그 일을 이루십니다. 로마서 8장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특별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 즉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긴 구절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를 사흘만에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도, 우리에게도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나 노력으로 달성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통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건대 누구에게나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은 곧 자신의 아픔이고 그의 기쁨은 곧 나의 기쁨입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법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살을 맞대고 피를 나눈 가족이기 때문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어느 누가 단순한 교훈적인 차원에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순종을 본받도록 노력하시오”하고 가르쳤다면 우리는 결코 그대로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께서 가신 그 길을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으로 세례를 받고 물이 내 몸을 적실 때, 또 나아가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때, 내 속에서 무언가가 변합니다. 예수를 경험함으로 이미 전과 다른 사람이 됩니다. 우리 속에 전에 없던 새로운 자아가 태어났습니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게 되고 기도가 하고 싶어지고 성경을 알고 싶어집니다. 역경에 부딛칠 때 왠지 모르는 희망을 선택하게 됩니다. 어느덧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치 우리도 역시 죄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 속에 살게 하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셨다면, 그는 우리도 새 생명으로 다시 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죽음 후의 부활은 역설적이지만 또한 순리입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순종을 배우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것이 고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참으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저의 부모님은 조지아에서 오래 목회생활을 하셨습니다. 근처에 큰 도시나 신학교가 없다보니 함께 동역할 교역자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매우 부지런히 교회를 돌보셨습니다. 어느날, 탄자니아의 선교사이셨던 김정림 목사님이라는 분이 안식년 차 미국을 방문하시던 중에 부모님을 찾아오셨습니다. 선교사님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한때는 겹치는 일로 심지어 잠을 포기하게 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듣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바로 그겁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가 잠을 포기하신 분이신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다행히 생활이 매우 규칙적이셔서 밤 늦게 잠자리에 드시는 법이 거의 없기는 하셨지만 말입니다. 잠을 포기하는 것은 어쩌면 내게 당연한 권리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이른 새벽마다 꾸준히 이어진 깊은 영적인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제가 올해들어서 한 가지 체험한 것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제 마음에 강하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침묵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얼마나 자주 낭비하는 말이 많은지, 그리고 참되지 않은 말을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기간을 가지고서 마음을 정했습니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어서 할 수 있는 말만 하기로 했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리 말을 하고 싶어도 입을 열지 않는 훈련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가 지난 후에 느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말하는 데 있어서 두려움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 없던 새로운 확신이 생겼습니다. 침묵의 훈련을 가졌더니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자아를 죽이는 작은 연습을 했더니 오히려 새로운 나로 태어나고 있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교우 여러분들도 일 주일동안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어서 할 수 있는 말 이외에는 침묵하기로 해 보실 수 있겠습니까?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으십니까?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기록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 대하여 말하고 또 심판할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며,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대로 세상에 말하는 것이다. 너희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나’라는 것과,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분은 나를 혼자 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것은, 내가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8:26, 28-29) 예수께서는 바로 이렇게 말하시고 행동하시고 사신 결과로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또 바로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영광의 부활로 다시 나오셨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 분과 같은 길을 갈 때, 또한 그 분의 새 생명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은 많은 경우 길게,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이 다가오고, 희망이 무너져 갈 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 말씀안에 있다면 그러한 어두움의 시간 속에서 부활의 새벽이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편은 죽거나 없어질지 몰라도 그 결과로, 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게, 그 전에 가지지 못했던 새 생명의 모습으로 가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고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까지 이십여 년을 기다렸습니다. 그가 처한 상황은 참으로 절망적이었습니다. 이성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희망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나이 백세가 되어서 이삭이 태어났고 이스라엘의 조상 뿐 아니라 오늘 모든 믿는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5절) 오늘 우리의 주변에는 회복이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이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다리를 절단하게 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다시 없어진 수족이 생기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말입니다). 그러한 상황만을 바라보고 있는다면 우리는 절망의 늪으로 차츰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면,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무언가 새로운 생명의 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기대합니다. 부활은 회생이 아닙니다. 죽음을 통과한 새 삶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 하나님의 새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새 생명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의족을 끼우고 달리면서 보통 사람들보다 더 용기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 부활을 기대하며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소식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천 년 전에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많은 증인들이 증언한대로 다시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주와 구세주이십니다.

오늘 저는 지난 5년 동안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예배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본 교회에서 보낸 시간은 어떻게 보면 제 야망을 접고 지낸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큰 어려움과 좌절의 시간을 뒤로하고 비교적 예기치 않게 와싱톤 한인교회의 교역자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생각하지 않던 큰 사역의 책임에 놀라서, 그 후 청소년 사역을 떠나 성인 목회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에는 문화적인 차이와 경험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되었습니다. 담임목회자가 바뀌는 과정을 거치면서 저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스스로 낮추어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이 때까지 사역의 한 부분을 감당하면서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때로는 어려웠던 시간들을 거쳐서 돌아보면 감사가 넘쳐나고 제 안에 하나님께서 새 일을 이루신 것을 발견합니다.

교우 여러분들, 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단순한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성령으로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도록 빚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성례전(sacraments)에 참여하며 예배와 개인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스스로를 계속하여 담그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 분의 말씀이 내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그와 연합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