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4.20 (김 영봉 목사)
환경주일 설교
“믿음의 나비 효과”
(Butterfly Effect of Faith)
1.
오늘은, 말씀을 드리기 전에 먼저 영상을 하나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영상은 지난 2000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실패한 알 고어(Al Gore)가 제작하여 그로 하여금 2007년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한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의 예고편 영상입니다.
(영상)
200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알 고어는 현 대통령인 조지 부시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선거 결과를 두고 끝까지 싸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패배를 수용하는 용단을 내렸습니다. 지금 대통령 후보 지명을 얻기 위해
만신창이가 되도록 헐뜯으며 끝을 보려고 하는 두 사람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알 고어는 그 이후, 그 동안 쌓은
정치적인 역량을 사용하여 지구 환경의 문제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인류 역사 전체를 두고 볼 때, 그는 어쩌면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더 큰 공헌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수많은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밝혀낸 지구 환경의 진실은 참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불편하고 답답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의 환경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으며,
이대로 가다가는 몇 십 년도 되지 않아서 인류와 생명체 모두가 재앙의 날을 맞게 될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지구 환경이 마치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 암 환자와 같다고 비유합니다. 지금의 이 추세를 되돌릴 방도는
전혀 없고, 다만 가공스러운 종말을 조금 늦출 수 있을 뿐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어 놓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2.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 문제는 창조주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걸작품인 이 피조 세계를 잘 관리하도록 책임을 부여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잘 보존하여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 줄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불편하지만 이 진실을 대면하고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의 말씀에서 그 책임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온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인간을 지으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28절).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체를 인간의
손에 맡기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명령을 주신 하나님의 본뜻이 왜곡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지난 수 백 년 동안, 특히 산업 혁명이 시작된 이후 지난 약 3백 여 년 동안, 특별히 고도로 발달된 산업으로 인해
지구 환경을 급속하게 파괴했던 지난 약 50년 동안,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보존하고 관리하고 개발하는 데
성실하지 못했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들에게 큰 책임이 있습니다. 이 나라들은 대개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역사를 개척해 온 나라들입니다. 그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땅을 정복하여라” 혹은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라는
명령을, 마치 지구 환경을 마음껏 훼손하라는 면허증처럼 오해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믿을만한 구약학자 중 한 사람인 월터 부르그만(Walter Brueggemann)은,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은 마치 선한 목동이 양을 돌보는 것과 같은 행동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식물과 동물을 마음대로 착취하고 학대하고 오용하라는 면허증을 준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이 복된 상태로 살아가도록
돌보고 각 생물에게 주어진 가능성이 활짝 꽃피도록 도우라는 명령을 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이 청지기(steward)로서의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지만 지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잘 믿는다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타락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자연을 훼손하고 착취하고 오용했습니다. 그로 인해 오늘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연합감리교회에서 정한 ‘환경 주일’ 즉 Festival of God's Creation입니다. 이 특별한 주일을
맞아, 저는 오늘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선한 청지기로서의 우리의 책임을 다시 한 번 새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특별한 책임입니다. 생각해 보면 아주 영예로운 과제입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 주기를 기대하십니다. 또한, 이러한 관심과 노력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며, 우리의 자손들을 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자손들이 오염 물질로 가득한 공기를 마시고,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하는 시대에 살아갈 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3.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가적으로 할 일이 있고, 각 사회 단체가
단결된 힘으로 할 일이 있으며, 또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생활 현장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그 모든 노력이
합해질 때, 이 암울한 미래는 점점 멀어져 갈 것입니다. 저는 국가적으로 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는 오늘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차원의 일들은 알 고어 같은 사람들에게 맡겨 두고,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면 될 줄로 압니다. 오늘 저는 교회적으로
할 수 있는 일과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주보와 함께 두 개의 브로슈어를 받으셨습니다. 저는 우리의 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교회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의 한 예로서 이것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우리말로 ‘수목장’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어로 되어
있는 EcoEternity Forest라고 쓰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연합감리교회 버지니아 연회의 알링턴 지방과 알렉산드리아
지방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Camp Highroad에서 시작한 새로운 사업입니다. Camp Highroad는 우리
교회로부터 약 4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Middleburg 지역의 드넓은 삼림 안에 개발된 수양관입니다. 이 수양관에
딸린 삼림을 활용하여 수목장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수양관 Camp Highroad를 통하여 행하게 될 선교를 돕는
수익 사업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환경에 이로운 매장 문화를 미국에 보급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수목장’이라는 매장 문화는 독일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이것이 한국에 수입되어 아주 각광을
받는 매장 문화가 되었습니다. 시신을 화장하여 재로 만든 다음, 그것을 나무 밑에 매장을 하는 것입니다. 재를 담는 그릇은
녹말로 만드는데, 그 그릇은 흙 속에서 서서히 녹아서 분해되어 시신의 재는 나무의 양분으로 흡수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은
그 나무를 매만지며 마치 돌아가신 그분을 대하는 듯한 감회에 젖게 됩니다. 돌아가신 분은 결국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남겨진 재까지 다 주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이나 한국처럼 국토가 좁은 나라에서는 수목장이 아주 좋은 대안 매장 문화가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은 토지가 넓어서
그만큼 다급하지는 않지만,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관심을 가져 볼만한 일입니다. Camp Highroad에 있는 이
수목장 <EcoEternity Forest>가 미국 안에서는 최초의 수목장이라는 점에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브로슈어를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한 가족 혹은 한 공동체가 나무 하나를 99년간 임대(lease)하여, 그 나무 밑에
한 가족 혹은 한 공동체가 두고두고 함께 매장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경제적으로도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유익을 끼칠 수 있습니다.
4.
기독교인들은 소위 ‘부활 신앙’ 때문에 화장하는 것에 대해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내 시신의 잔해들이 한 곳에 모여져 있어야만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굳이 기독교인들만의 묘지를
고집하고, 또한 굳이 시신을 그대로 매장하는 것을 고집합니다. 이런 고집을 생각하면,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있다”(마 22:29). 실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제대로 알고, 기본적인 과학
상식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고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적어도 네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제가 아는 기초적인 과학적인 지식에 의하면, 우리의
몸이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똑 같은 요소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은 끊임없이 재활용(recycle)을
하기 때문에 몇 년 지나고 나면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던 요소들을 모두 밖으로 빠져 나가고, 새로운 요소들이 내 몸을
구성하게 됩니다. 죽을 당시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그 요소들이 내 몸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시신을 있는 그대로 매장을 했다 해도, 그 시신이 영구히 보존되지는 않습니다. 옛날 이집트인들이 사용했던 고도의
미이라 기술을 사용하지 않는 한, 그럴 수 없습니다. 제대로 매장된 시신이라면, 불과 100년, 아무리 많이 잡아도 200년이면
먼지 하나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립니다. 만일 시신이 보존되어 있어야만 부활이 가능하다면, 2 천 년 전에 죽은 베드로와
바울은 어찌되겠습니까?
셋째, 부활이라는 것은 죽었던 그 몸으로 그대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부활로 인해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습니다.
그 사실을 두고, 시신이 없으면 부활이 되지 않는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됩니다.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예수님의 부활한 몸은 십자가에 달렸던 그 몸과 질적으로 다른 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신령한 몸’(고전 15:44)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물질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물질만은 아닙니다.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상태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 변화한 ‘신령한 몸’에 있어서 물질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본질이 아닙니다.
넷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온 우주를 창조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온 우주를 지으신
분이 나를 부활시킬 때 내 몸을 구성하고 있던 요소들이 없어져서 낭패를 당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 아닙니까?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필요하다면 내 몸을 구성하고 있던 요소들을 나무와 동물과 풀과 꽃으로부터 뽑아서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모든 것이 순환되면서 마지막까지 유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5.
이렇게 말씀 드리면, “어, 그거 윤회 사상이 아닙니까?”라고 질문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와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사상은 ‘나’라는 존재가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영원히 순환한다는 사상입니다. 그 순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부릅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나며, 새롭고
더 높은 차원의 존재로 변화하기는 하지만, 더 낮은 모습으로 회귀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 드린 것은
‘나’의 본질이 아니라, 나를 담고 있던 내 육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세포 덩어리인 우리의 육신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여러 번 재활용을 통해 다른 생명체와 교환되며, 우리가 죽고 나면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던 요소들은 나무로,
풀로, 동물로 혹은 꽃으로 흡수됩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교리가 아니라 과학적인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신을 화장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진실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진실로
부활 신앙을 가진 분이라면, 마음 놓고 자신의 시신을 재로 만들어 나무의 양분으로 줄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풍습으로는
시신의 재를 강물에 뿌리거나 산 위에 올라가 부는 바람에 날려 보냅니다. 그런데 시신의 재가 강물을 오염시키고 공기를
오염시킨다고 합니다. 반면, 그 재가 흙에 섞여 나무의 양분으로 사용되면 아주 좋은 비료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르던 개가 죽어서 가축병원에서 화장을 해다가 뜰에 있는 장미
나무에 옆에 묻었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두 세 해 동안 장미꽃이 얼마나 만발을 했는지 모른답니다. 그것을 보고 시신의
재가 얼마나 좋은 비료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몇 해 전에 성도들의 마지막을 위해 좋은 묘지를 마련하였습니다. 그것도 좋은 일입니다. 아직도 30여
개의 묘지가 남아 있습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재단이사장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이것과 더불어, 저는 우리 교회에서 이
Camp Highroad에 있는 이 수목장에 ‘와싱톤한인교회 동산’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별로
혹은 가까운 친구들끼리 혹은 속회원들이 함께 나무를 분양 받아, 그곳에 작은 기도처를 만들어 놓고 공동으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이 동산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대한 선하고 신실한 청지기가 되겠다는 교회
전체의 결단이요 다짐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브로슈어를 잘 읽어 보시고, 생각해 두시기 바랍니다. 얼마 후, 여러분의
의견을 여쭐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와싱톤한인교회가 앞으로 더욱 더 환경 문제에 대해 특별한 민감성을 가지고 일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을 맡아 관리하는 거룩하고 영예로운 책임을 다하기 위해 더욱 고민하고 노력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이 일에 무관심하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 누가 그 책임을 대신하겠습니까?
6
이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대해 선하고
신실한 청지기로 살아가는 것은 불편할 뿐 아니라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때로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개인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이런 고민에 직면할 때가 많은 줄 압니다. 환경에 해로운 물질을 버려야 할 때, 해로운 요소를 제거하는
처리를 하려면 많은 비용이 듭니다. 그 때, 환경을 해치더라도 그냥 버릴 것인가, 아니면 비용이 들더라도 환경에 이로운
선택을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압니다. 요즈음 같은 불경기에 먹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다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기대가 생각날 리 없고 먼 후손들의 복지가 생각날 리 없습니다.
집안에 쌓여 있는 고지서(bills)를 갚아야 하는 문제가 더 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그래서 목사로서
저도 함부로 말하기가 주저됩니다. 하지만 이 거룩한 고민을 떠안고 씨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기대하신다는
사실만큼은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주, 우리 교우 중 한 분이 세차장을 개업하신다고 하여 속회 식구들과 함께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곳 시설을
돌아보고 나서 저는 마음에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그분은 일반 세차장 설비보다도 훨씬 더 많은 비용을 들여, 세차에 사용한
물의 80%를 정화하여 다시 사용하도록 했고, 세차에 사용되는 모든 화학 약품을 환경에 해롭지 않은 것으로 구입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대한 선하고 신실한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 애쓴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그 결과, 자기 집에서
비누를 가지고 손수 세차를 하는 것보다 물도 적게 사용하고 환경오염도 덜 시키는 세차장을 마련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식, 이러한 고민, 이러한 노력이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서 보고 싶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잘 관리하고 가꾸고 지키도록 책임을 부여 받은 청지기들입니다. 이 책임은 실로 중요합니다. 특별히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이 책임은 어느 때보다 더 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일마다 예배 드리기를 원하시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환경 보존에 대해 거룩한 책임감을 느끼고 행동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집에서 쓰레기를 버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 고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환경을
이롭게 하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를 끊임없이 물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고, 이렇게 고민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종이 한 장을 보고 나무와 숲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물 한 병을 보고 산천초목을 적셔주는 가뭄에
단비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고, 쓰레기를 묶어 내버릴 때 우리의 자녀들이 뛰놀게 될 아름다운 동산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불편을 감수해 가면서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대한 선한 청지기의 역할을 감당할 때, 우리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신선한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7
이렇게,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작은 노력들을 해 나갈 때, 종종 무력감 같은 것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온 세상이 지구를 파괴시키는 방향으로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여 흘러가고 있는데, 과연 내가 하는 이 작은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에 빠지기 쉽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믿음이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아주 작은 몸짓에
불과하지만, 그것에 희망을 두고 신실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믿음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4월 17일, 에드워드 로렌츠(Edward Lorenz)라는 기상학자가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좀 더
전문적으로는, ‘카오스 이론’(Chaos Theory)에 대해 아시는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에드워드 로렌츠는 바로
이 나비 효과를 처음으로 발견하여 카오스 이론에 토대를 제공한 사람입니다.
나비 효과라는 것은, 브라질에서 나비 한 마리가 일으킨 날개 짓이 대기의 흐름을 변화 시켜 텍사스 주에서 토네이도를
발생시키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기상학자로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에드워드 로렌츠가 증명해
낸 것입니다. 저는 카오스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나비 효과라는 이론이 믿음의 세계에 대해 아주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세계야말로 나비 효과가 날마다 일어나고 있는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고안을 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영적
세계에는 큰 일과 작은 일이 따로 없습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그 일을 정성으로 섬길 때, 그것이 큰 일로 열매 맺혀질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내 눈에는 그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세계 안에 ‘믿음의 나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믿고, 작은 몸짓에 불과해 보이더라도 그 일에 일관되게 그리고 신실하게 임하는 것이 믿음 좋은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적은 일에 신실한 태도를 칭찬하셨습니다(마 25:21, 23).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저는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주신 권고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그분은6장
9절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손을 써 볼 수 없도록 망가진 우리의 세상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걸작품을 관리하도록 맡기신 영예로운 책임을 생각하고, 아주 작은 일이지만, 마음을 다하여, 지치지 말고, 행해 나가십시다.
이렇게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각각의 생활 현장에서 만들어내는 작은 날개 짓이 합하여 어마어마한 파동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믿으십시다. 그러한 미래를 믿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몸짓으로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지키기 위해 힘써 나가십시다.
주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주님의 걸작품을 관리하는 거룩하고 영예로운 소임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손을 써 볼 수도 없을 정도로 훼손된 이 땅을 또한 생각합니다.
오, 주님, 저희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그 책임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오염되고 타락한 마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
저희 마음을 주님의 성령으로 다시 지어 주셔서
선한 청지기로서의 소임을 다하게 도와 주소서.
이 책임을 망각하지 않게 하시며
이 고민을 멈추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작은 몸짓이 큰 파동으로 이어져
믿을 수 없는 미래로 이어질 것을 믿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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