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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4.13 (강 현식목사)

받아들임
(Accepting)
<욥 1:13-22, 42:1-6>

1. 불가해한 인생

참 좋은 계절입니다. 꽃들이 온 대지에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온갖 새들이 맑은 노래를 부르고, 부드러운 바람은 나무와 풀과 모든 식물들이 연초록 생명으로 돋아나도록 재촉하고 있습니다. 봄 바람에 사람의 마음도 설레입니다. 저희 아이들도 학교 다녀오는 길에 매일 떨어진 꽃을 주어오느라 요즘 바쁩니다. 모든 것이 참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이 봄의 한 가운데서 세상을 바라보면 아름다운 일들, 행복한 일들만 가득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디 인생이 그렇습니까? 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불가해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욥의 인생은 마치 봄과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활짝 피었습니다. 슬하에 장성한 칠남 삼녀의 자녀를 두었고, 수많은 가축과 종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동방의 으뜸가는 부자로서 그의 인생의 날씨는 화창했고, 주변에는 온갖 축복의 꽃이 만개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흠이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어느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집니다. 일시에 수 많은 가축들을 도적들에게 빼앗기고, 대부분의 종들이 살해 당합니다. 끝없이 비보가 전해지고, 급기야 가진 재산을 모두 날리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날라온 소식은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질 소식입니다. 맏형의 집에서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있던 자식들이 집이 무너지면서, 한꺼번에 집더미에 깔려 죽었다는 소식입니다. 슬픔을 가눌 힘조차 없는 욥에게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온 몸에 악성 종기가 납니다. 잿더미 위에 앉아 기왓장으로 몸을 벅벅 긁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가,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고 말합니다. 동방의 으뜸가는 부자,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던 욥에게 일어난 이 기막힌 일, 이 불가해한 일은 우리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 일까요?

경기도 안양 초등생인 이혜진, 우예슬 양의 사건을 지켜보면서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두 아이의 부모님들은 실종되기 전날까지도 그런 일이 자신들에게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예상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실종 된 이후에도 살아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면서 숱한 밤을 뜬 눈으로 새웠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부모님들은 위로받기를 거절했을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이들, 순진무구하고 깨끗한 아이들이 왜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요? 누구 죄 때문일까요? 이런 일이 세상에 일어나도 되는 걸까요? 두아이의 부모님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이 가혹하고 기막힌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캔자스에 사는 어떤 남자가 자기 집 주차장에서 차를 후진하다가 미처 뒤를 못보고 세살짜리 아들을 치었습니다. 아이는 현장에서 죽고 아빠는 거의 실성을 합니다. 아내와도 헤어지고 평생을 혼자 살아가면서 정신치료를 받습니다만, 아이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증후군에 시달리며 가련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도대체 누구의 죄이고, 누구에게 돌을 던져야 합니까?

쓰나미와 카트리나로 죽어간 수만명의 사람들과 그 가족들, 버지니아텍에서 목숨을 잃은 대학생들과 그 부모들, 이라크와 세계 곳곳의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과 비보를 듣고 쓰러져 통곡하는 어머니들, 그들은 그들에게 닥쳐온 이런 불행한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쓰나미와 카트리나로 죽어간 수만명의 사람들과 그 가족들, 버지니아텍에서 목숨을 잃은 대학생들과 그 부모들, 이라크와 세계 곳곳의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과 비보를 듣고 쓰러져 통곡하는 어머니들, 그들은 그들에게 닥쳐온 이런 불행한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런 커다란 사건, 사고 외에도 우리 삶의 언저리에는 크고 작은 슬픔과 좌절과 절망의 이야기들이 즐비합니다. 대학에 갈줄 알았는데 떨어졌다든지, 회사에 취직되리라 생각했는데 연락이 없다든지, 은행 대출을 기다렸는데 거절되었다든지, 사업이 날로 번창해 가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부도가 났다든지, 우리 아이가 불량서클에 가입하고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든지, 기대치 않은 실패, 예기치 않은 불행, 크고 작은 절망과 좌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인생의 길목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우 여러분, 봄은 화창하지만 인생은 늘 그렇게 화창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불가해한 인생 속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우리들에게 일어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2. 선택이냐 받아들임이냐?

여러분, 먼저 지나온 우리의 삶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선택의 순간에 더 많이 놓였습니까, 아니면 선택의 여지없이 어쩔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더 많이 직면했습니까? 인생은 자신의 뜻을 따라 끊임없이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가만히 돌아보면, 선택의 여지 없이 좋든 싫든 그냥 받아들일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경우가 훨씬더 많았음을 경험합니다.

사실 인간은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 생명을 마무리 하는 것도 자연의 순리에 따르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의지와 노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지만, 그러나 정직하게 돌아보면, 도대체 선택의 여지 없는 불가피한 상황을 통해서 내 인생의 행로가 결정되어 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이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좀 더 과감하게 말씀드리면, 한 사람의 인생은 무엇을 선택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주장은 자칫 체념주의나 자포자기의 삶을 권장하는 이념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쩔수 없는 체념적 수용이나, 자포자기적인 받아들임이 아니라, 아주 적극적인 수용, 래디컬한 근본적인 받아들임을 말씀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이 진행되면서 차차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삶은 받아들일 때 더 풍부해 집니다. 인생의 많은 문제들도 선택을 통해서가 아니라 받아들임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삶과 생명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사람은 불행해 집니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고난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삶의 자세입니다. 자꾸 실패하는데 살패하지 않은척 합니다. 자꾸 연약함이 드러나는데 연약함을 숨기려 합니다. 은폐하고 가장하고 숨기며 거짓 삶의 울타리를 만듭니다. 불안하고 초조하며 마음에 화가 누적되고 깊은 평안이 없습니다. 받아들여야 할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임의 놀라운 비결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도피

그런데 받아들이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받아들임에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삶’을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고통은 절대 피해야할 어떤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메커니즘이라고 합니다. 고통은 몸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생명 시스템의 일부이고, 건강의 불균형을 경고해 주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건강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힘차게 작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병의 원인균을 ‘한센 바이러스’라고 하는데, 한센 바이러스는 처음에 사람의 신경 세포와 친화력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점차 신경세포들을 파괴하고, 마침내 고통을 느끼는 신경까지 파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자신의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코가 뭉개져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고통을 느끼지 못하거나 혹은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정신적인 나병환자’가 우리 시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고통은 생명이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이고, 삶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싸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은 우리 생명을 위한 축복의 조건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더 건강하고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피하려고 애쓰지 맙시다. 고통을 겪어냅시다. 고통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과감하게 받아들입시다.

4. ‘받아들임’으로 가는 길

그렇다면 어떻게 고통을 피하지 않고 참으로 ‘받아들이는 삶’, ‘받아들임의 영성’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받아 들일때 비로소 ‘받아들임’의 도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욥은 처음에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는 참담한 일을 겪고서도 그 모든 일을 잘 받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갈 사람들,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라고 멋지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욥기를 더 읽어나가다 보면, 그가 결코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고난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은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차라리 내가 태어나던 날이 사라져 버렸더라면, 차라리 그 밤이 아무도 잉태하지 못하는 밤이었던라면, 차라리 어머니의 태가 열리지 않았더라면…” 한탄하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모든 재물과 사랑하는 자식을 다 잃은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인 욥기의 마지막 장을 보면 마침내 욥이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감동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님의 뜻을 흐려놓은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 못하면서 함부로 말한자가 바로 저입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서야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 들이겠습니다.”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 회개하며 욥은 비로소 하나님을 받아들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자 자신이 겪은 그 모든 참담한 일들을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동안 하나님을 몰랐습니까? 그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지않았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한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5. 손 놓기, 손 맡기기

헨리 나우웬은 생애의 말년에 서커스 구경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특별히 공중 그네뛰기를 아주 좋아했는데, 이 묘기를 너무 좋아해서 서커스 단원들과 직접 사귀기도 하고, 실제로 그들에게서 공중 그네뛰기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공중 그네뛰기는 두 사람이 그네를 타다가 한 사람이 그네에서 손을 놓고 회전할 때, 매달려 있던 다른 사람이 손을 놓은 파트너의 손을 잡는 묘기입니다. 이 공중 그네 뛰기에서는 그네에 매달려 있는 사람보다 그네에서 손을 놓는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두 가지 원칙이 있는데, 하나는 자신의 생명을 붙들어 주고 있다고 믿고 있던 그네에서 과감하게 손을 놓는 것입니다. 만일 잠시라도 손을 놓는 타이밍을 놓치게 되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게 되는 것입니다. 또다른 하나는 그네에서 손을 놓은 후에, 절대로 파트너의 손을 자신이 잡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파트너가 자신의 손을 잡도록 완전히 믿고 맡겨야만 이 묘기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우웬은 공중그네뛰기의 원리를 들으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기가막힌 원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저는 이 원리를 우리의 주제에 적용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가 그동안 인생을 살아오면서 붙들고 있었던 것들에서 손을 놓는 것입니다. 안전하다고 믿어왔던 것들,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었던 것들,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들, 그것들에서 손을 놓는 것입니다. 주의할 것은 타이밍을 놓치지 말고 늦기 전에 손을 놓아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빈손을 잡으시도록 그분께 완전히 내어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 분을 향해 손을 높이 들고 항복을 선언하며 빈손을 내어 맡길 때, 능숙하고 세련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 강하고 힘센 팔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굳게 붙잡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길입니다.

교우 여러분, 혹시 받아들이지 못해 속앓이 하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자꾸 숨기고 은폐하고 감추고 계신 것은 없습니까? 고통 때문에 혹은 두려움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입시다. 붙잡고 있던 것에서 손을 놓고, 하나님께 빈손을 맡겨봅시다.
나라고 하는 자아의 그네, 내가 믿고 의지하고 매달려 왔던 그네, 내가 만들어 온 인생, 내 철학과 고집, 나를 붙들어주던 신념의 그네에서 과감하게 손을 놓아 봅시다. 두 손을 번쩍 들고 하나님께 항복해 봅시다.

그렇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시는 분들 마다, 불가해한 인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고난과 불행을 받아들이게 될뿐 아니라, 또 고난과 불행 앞에서 비로소 우리가 정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받아들임의 비밀입니다. 이것이 받아들임의 축복입니다. 교우 여러분, 받아들입시다! 받아들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주님,
까다롭고, 변덕스럽고, 잘 돌아서고, 잘 벗어나는 저희들을
끝없이 받아들여 주신 주님,
죄 많고 허물 많고 악한 마음으로 가득한 저희들을
끝없이 용서하시고 받아들여 주시는 주님,
저희가 무엇이라고 이토록 저희를 받아주시는 지요.
저희가 무엇이라고 인생을 살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들이 이다지도 많은지요.

오 주님,
주님께 돌아갑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내 손을 놓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다 받아들이겠사오니
우리의 삶, 우리의 생명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