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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24 (김 영봉 목사)

요한복음 연속설교 ‘생명의 복음’(89)
“모닥불 냄새와 닭 울음 소리”(Smell of Charcoal Fire and Cork’s Crow)
--요한복음 18:12-27

1.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초대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천주교에서 베드로는 제 1대 교황으로 추앙되어 왔고, 그래서 그런지 천국에 대한 이야기에서 베드로는 항상 안내자로 등장합니다. 그만큼 베드로는 기독교에 있어서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네 개의 복음서들을 읽어 보면, 베드로는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갈릴리 어부 출신인데, 당시 사회에서 어부는 그리 변변한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도 야심이 있고 머리가 어느 정도 있다 싶으면, 대도시로 이주하여 성공을 위해 분투하는 젊은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태어난 고향에 그대로 머물러 살면서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베드로는 그냥 그렇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을 하루 하루 이어가고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불러 내십니다.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이었으니,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무엇을 베드로의 내면에서 보셨는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또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 나섰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부로 연명하던 그의 마음에도 로마 정권을 뒤엎고 위대한 이스라엘을 회복해 보고 싶은 열망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혹은 그에게도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어서,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해 보고 싶은 열망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유야 어쨋든, 예수께서 그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그분을 따라 나섭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입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베드로의 성적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를 읽으면서 제자로서 베드로의 점수를 평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낙제 점수를 주고 싶은 분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후한 분이라도 70점 이상을 주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음 속에 있는 뜻은 좋고 열심은 강했지만, 늘 뭔가 부족합니다. 잘 해 보려고 하지만, 늘 과녘을 빗나갑니다. 예수님에게 좋은 제자가 되어 보려고 몸부림 치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습니다. 제자로 부름받은 순간부터 대제사장의 집에 이르기까지, 베드로는 언제나 그렇게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합니다.

2.

베드로의 안타까운 모습은 오늘 읽은 이야기 속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기드론 골짜기에서 그는 예수를 체포하려는 로마 군사들과 성전 경비병들을 대항하여 칼을 뽑아 들고 대항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두려움에 질려 벌벌 떨고 있을 때, 베드로는 분연히 궐기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그는 수제자로 불릴 자격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나무라십니다. 잘 했다고 칭찬하지는 못할 망정, 꾸중을 하십니다. 베드로로서는 한 두 번 당하는 일이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반응이 적잖이 섭섭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 예수님의 태도는 단호했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뿔뿔이 어둠 속으로 흩어집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포박하여 어디론가 끌고 가자, 베드로는 다른 한 제자와 함께 몰래 그 뒤를 따릅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나마도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베드로와 함께 있었던 제자는 아마도 요한복음서를 쓴 제자 요한이었던 것 같습니다. 군인들은 체포한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당시의 현직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는데,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으로서, 대제사장으로 있다가 물러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현직 대제사장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사위 뒤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기 전에 먼저 그들끼리의 모임에서 신문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대제사장 관저까지 따라갑니다. 요한은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를 비호해 줄 어떤 사람도 대제사장 관저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을 홀로 두고 떠날 수 없었습니다. 자신마져도 잡혀서 곤욕을 당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도망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였습니다. 비록 그의 이해가 짧아서 자주 실수하고 오해하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늘 예수님을 가장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13:37)라고 말씀 드렸는데, 그 마음만은 진심이었습니다.

꼭 어떻게 하자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적들의 손에 넘어갔고, 로마 군인들에 비해 자신은 보잘 것 없는 한 촌부에 불과합니다. 자신으로서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재판받는 곳까지 따라갑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선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그곳까지 따라갑니다. 베드로는 머리보다 마음이 더 컸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머리로 계산했다면, 그는 그곳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정말 목숨이라도 바치고 싶은 사랑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3.

대제사장 관저 안으로 먼저 들어갔던 요한이 누군가를 만나고 다시 나와서 문지기 하녀에게 뭔가를 말합니다. 그리고는 문 밖에 서 있던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갑니다. 문지기 하녀는 뭔가 수상쩍다는 듯이 베드로를 살펴 봅니다. 베드로는 그 하녀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서둘러 그에게서 멀어지려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그 때, 문지기 하녀가 베드로의 등뒤에서 묻습니다.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맞지요?” 베드로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습니다. 그는 엉겁결에 전혀 뜻하지 않은 대답을 내뱉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깁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알아 보는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 경계하면서 멀찍이 서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합니다. 저 멀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안나스가 예수를 신문하여 추종자들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께, 뭐라고 가르쳤는지 자백하라고 명령합니다. 빌라도에게 고발할 결정적인 단서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당당하고도 거침없이 답하십니다. “나는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소. 나는 언제나 모든 유대 사람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으며, 아무것도 숨어서 말한 것이 없소. 그런데 어찌하여 나에게 묻소.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를,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시오.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소”(20-21절).

그 태도가 너무도 당당하여, 지켜 보는 몇몇 사람에게는 무례해 보일 정도였습니다. 경비병 중 한 사람은 참다 못해 손바닥으로 예수님을 치면서, “대제사장에게 그게 무슨 대답이냐?”라고 꾸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한 말에 잘못이 있으면, 잘못되었다는 증거를 대시오. 그러나 내가 한 말이 옳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시오?”(23절) 대제사장 관저의 뜰에서 예수님은 피고로서 서 있지만, 그의 말씀하시는 태도는 피고의 말투가 아니라 오히려 재판장의 말투처럼 들립니다. 그 어떤 두려움도 없고 주저됨도 없습니다. 기드론 골짜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의 태도는 전세를 역전시켜 놓았습니다. 겉으로는 안나스가 재판관이고 예수님이 피고인데, 실제로는 예수님이 재판관이고 안나스가 피고인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 때, 베드로와 함께 불을 쬐고 있던 어떤 사람이 아까부터 곁눈으로 베드로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람의 눈초리가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피하면 더 수상히 여길 것 같아 모른 척 하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그 사람이 베드로에게 말을 겁니다. “당신도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맞지요?” 베드로는 문지기 하녀에게 엉겁결에 대답을 하고 나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런 실수를 또 다시 하지 않으리라! 필요하다면 내 정체를 밝히고 나도 예수님처럼 당당하게 고난을 당하리라!’ 이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지고 있었는데, 곁눈질 하던 사람이 따져 묻자, 그 용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튀어나옵니다. “아니오! 나는 아니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사람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맞아, 당신이 동산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는데, 그래도 모른다고 하겠소?”라고 몰아세웁니다. 그 사람은 베드로의 칼에 오른쪽 귀를 잘렸던 말고라는 사람의 친척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다시 한 번 강하게 부인한 다음에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납니다. 그는 문밖으로 나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그 때, 멀리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몇 시간 전, 마지막 저녁 식사를 나눌 때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13:38). 그 말씀이 생각나자, 베드로는 그 자리에 무너져 통곡합니다.

4.

여기서 잠시 머물러 생각해 보십시다. 그 날, 대제사장의 관저에서 엉겁결에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새벽 닭 울음 소리에 무너져 통곡한 그 날 이후, 모닥불 앞에 설 때마다 혹은 닭 울음 소리를 들을 때마다 베드로의 마음 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사물 혹은 어떤 소리와 관계하여 특별한 경험을 하고 나면, 그 이후에 그 사물을 보거나 그 소리를 들을 때면, 특별한 경험을 했던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가 그 때의 경험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요즈음은 별로 그 노래를 들을 기회가 없지만, 80년대에 유행했던 가요 중에 ‘빙글빙글’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오, 어떻게 하나, 우리 만남은 빙글빙글 돌고……”라는 가사가 수 없이 반복되는 노래입니다. 한국에서 살 때,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탔다가 그 노래를 듣게 되면, 제 마음은 추운 겨울밤 휴전선 철책에서 보초를 서던 시점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휴전선에 가 보면,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대남 방송을 하고, 남쪽에서도 북쪽을 향해 대북 방송을 합니다. 일종의 심리전입니다. 저는 소대장 실습을 하기 위해 그곳에서 잠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대북 방송에서 ‘빙글빙글’이라는 노래를 매일 밤, 밤새도록 틀어 주었습니다. 당시에 그 노래가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방송을 듣고 북한 병사들이 빙글빙글 돌기를 바란 것인지,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여튼 휴전선 철조망 앞에서 추위를 참아가며 보초를 서는 동안 이 노래를 얼마나 많이 들었던지, 제대한 후에도 그 노래만 들으면 제 마음은 그 때, 그곳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사물, 혹은 그런 소리, 혹은 그런 장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과 관련된 특별한 경험 때문에, 그것을 보거나 듣는 순간, 마음이 그 때 그 사건으로 되돌아가는 경험, 말씀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대제사장의 관저에서의 그 참혹한 실패 이후, 모닥불과 닭 울음 소리가 베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아마도 그는, 어두운 밤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몸을 덥히려고 머물러 있노라면, 어느 새 대제사장의 뜰로 되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을 것입니다. 또한 새벽을 깨우는 닭 울음 소리가 귀에 들릴 때마다 대제사장 관저 바깥에서 무너져 울던 모습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누가 있어, 베드로를 나무랄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은 안나스 앞에서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증언하며 정의를 위해 행동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용감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우러르고 추앙하게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귀한 삶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은 열정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해 보고 싶은 열정이 우리에게도 없지 않습니다. 교회를 위해 혹은 이웃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고픈 순수하고 거룩한 열정이 우리에게도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기도하기도 하고, 호언장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처럼 연약한 그릇입니다. 부정하고 싶지만 엄연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피고의 자리에 서서 재판관같이 호령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라 베드로에 더 가깝습니다. 마음에는 거룩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소원이 가득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이룰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목숨을 내놓겠다고 장담하고는 연약한 여종의 질문 앞에서 절절 매는 베드로가 우리에게 그렇게 낯설지 않습니다.

요한을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모두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베드로는 매우 훌륭합니다. 수제자로 불릴만 합니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멈춥니다. 그가 인간적인 용기와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대제사장의 집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만한 용기도, 그만한 의지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인간적인 용기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진리를 증언하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용기와 의지에만 의지하고 있던 베드로는 거기서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셨을 때, 그리고 주님의 성령이 그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담대하고 거침없이 진리를 증언하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베드로도 피고인의 자리에 서서 재판관처럼 당당하게 증언하곤 했습니다. 그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지는 것만이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능력으로써 모든 위험에 맞서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마침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합니다. 그 때, 베드로는 자신을 처형하는 사람들에게 청했다고 합니다. “나는 내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없습니다. 나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주십시오.”

5.

무엇이 베드로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그를 붙들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어떻게 매일같이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혀 살 수 있었습니까? 모닥불 냄새와 닭 울음 소리를 늘 기억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을 기억할 때마다, 베드로는 자신의 나약함을 겸허히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할 때마다, 주의 성령께서 잡아 주시지 않으면, 자신은 언제라도 또 다시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질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에게서 성령의 능력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도 베드로가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시각을 놓지지 않은 이유가 어디 있었을까요? 매일같이 모닥불에 몸을 덥히면서 영혼을 새롭게 하고, 매일 새벽 닭 울음 소리를 들으면서 영혼을 깨웠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숨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관되게 걸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최근에 한국에서는 교회가 또 다시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뉴스 후’라는 제목의, 한 방송국에서 만든 교회 고발 프로그램 때문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 교회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또한 가장 성공적으로 목회했다고 평가되는 세 목회자들의 사생활을 들추어내어 고발했습니다. 여러분, 방송의 속성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진실을 보도하려는 관심 보다는 보는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려는 관심이 더 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지 않습니까? 또한 전달하는 정보에도 정확성이 없고, 편향적으로 보도하기도 하고, 또 자주 교묘하게 조작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방송에서 보고 들은 것을 다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번 프로그램의 내용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같은 목회자로서 그분들을 감히 비난할 용기가 없습니다. 다만, 두려울 뿐입니다. 그 방송에서 거론된 분들이 어떤 분들입니까? (혹시 그분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용서하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분들을 비난할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함께 아픔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두 분은 한 시대를 풍미한 부흥사들이십니다. 한 때, 그분들의 손길만 스쳐도 죽을 병이 낫고, 귀신들이 쫓겨가고, 하늘의 문이 활짝 열렸더랬습니다. 저 자신이 그분들이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여하여 은혜를 받았던 사람이라서 잘 압니다. 또 한 분은 부흥사는 아니었지만 한국 교회 안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설교자로 인정받던 분입니다. 그분이 설교학 세미나를 열면 목회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그분들이 한 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되었던 분들이라는 믿음에 저는 별 의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지요? 이 질문이 저를 두렵게 합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신 분들은 “어쩜 그럴 수가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인간이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한 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아무리 놀랍게 사용되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원래 어떤 존재였는지를 망각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이 흐려지는 순간, 초라하고 구차하게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예를 찾자면 한이 없습니다. 아니, 다른 누구에게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 속에서 하루에도 여러 번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보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보도를 보는 저는 두려움에 떠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같은 걸음으로 걸어갈 수 없을까?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6.

저에게도 모닥불과 닭 울음 소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했지만,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히지 않음으로 인해, 대제사장의 뜰에 있던 베드로처럼 초라하게 구겨졌던 과거의 경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내가 저질렀던 과거의 초라한 실수를 생각나게 해 주는 모닥불은 무엇이고, 닭 울음 소리는 무엇인가, 조용히 앉아 더듬어 봅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 거리는 일들이 영화 장면처럼 지나갑니다. 지금도 그런 부족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령의 능력에 더 깊이 의존하고 그분에게 사로잡혀 살아가기 위해 힘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로 인해 그런 일들이 발생하는 빈도가 줄었고, 수치스러움의 정도가 줄어들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과거처럼 혹은 그보다 더 초라하고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어둠 속에서 통곡할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저의 희망은 오직 성령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능력에 의존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밖에는 제가 크게 넘어지지 않을 방도가 없습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저도 매일 밤 모닥불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매일 아침 닭 울음 소리에 귀 기우려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저 자신이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그릇인지를 잊지 않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저는 더 더욱 성령께 의지할 것입니다. 성령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동안만큼은 그런 큰 넘어짐은 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 있는 한, 그분이 나를 통해 하신 일에 대해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때, 그 때가 위험할 때입니다. 나는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할 때, 그 때가 위험할 때입니다. 그 때, 저는 심하게 넘어질 것입니다.

저만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목사가 아니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시겠습니까? 물론, 평신도가 넘어지는 것이 목사가 넘어지는 것보다는 파급 효과가 적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있습니다. 그 점에서는 목사인 저나 평신도인 여러분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오직 성령의 손에 사로잡혀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항상 성령과의 깊은 사귐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크게 넘어짐을 피할 수 있을 것이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여러분에게도 모닥불과 닭 울음 소리가 필요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힘이 약하여 크게 넘어졌던 과거의 사건을 생각나게 하는 모닥불과 닭 울음 소리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 저녁 모닥불을 쬐면서 자신의 나약함을 기억하고, 매일 아침 닭 울음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죄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매일 성령께 우리 자신을 다시, 또 다시 내어 드릴 수 있고, 그렇게 성령의 다스림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7.

요즈음 우리는 사순절 새벽기도회로 모이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에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 읽어갑니다. 그렇게 하여 무엇을 이루자는 것입니까? 새벽 닭 울음 소리를 들으며,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죄성을 인정하고, 모닥불에 몸을 덥히며 또 하루 만큼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자는데 있습니다. 이제 반쯤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일에 참여하고 계신 분들은 지치지 않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은 40일 중 20일 만이라도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명종 소리를 닭 울음 소리로 여기시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예배당에 오셔서 강단에 켜져 있는 촛불을 모닥불로 여기시고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듣고 보면서 과거에 초라하고 구차하게 무너졌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삶의 습관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몸으로 새벽 기도회에 나오든 안 나오든, 아침마다 닭 울음 소리를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기억하고 성령께 의지하며, 저녁마다 모닥불 앞에 서서 하루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삶의 습관으로 만드십시다. 그렇게 한 번에 하루씩만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히 서서 살아가기를 힘쓰십시다. 하루를 그렇게 살아 일주일, 일주일을 그렇게 살아 한 달, 한 달을 그렇게 살아 한 해, 한 해를 그렇게 살아 일생, 일생을 그렇게 살아 영원에 이르도록 힘쓰십시다. 그럴 때, 부끄러운 넘어짐을 피할 수 있을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목도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아멘.

피고석을 재판석으로 바꾸셨던 주님,
저희에게도 그런 당당함을 주소서.
주님처럼 든든히 서서
거침없이 진리를 위해 살게 하소서.
저희 자신만으로 그럴 수 없음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매일 아침
저희에게 닭 울음 소리를 들려 주소서.
매일 저녁
저희에게 모닥불을 밝혀 주소서.
그리하여
매일 주님의 성령을 의지하게 하시고
매일 주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게 하소서.
호흡이 다하는 순간까지
이렇게 걸어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