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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10 (강 현식목사)
성령이 가득한 공동체
Amusing Church, Amazing Church
창세기 11:1-9, 사도행전 2:1-13
서론
제 신상의 비밀 한 가지를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오른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청력을 잃은 것은 아닌데, 고막
근처에 작은 물렁뼈가 자라면서 소리를 듣는데 지장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마치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은 것 같은 상태로
소리가 들립니다. 이러다보니, 아내로부터 자주 말귀를 못알아 듣는다고 핀잔을 듣곤합니다. 아내 입장에서는 기껏 말을 했는데
말 귀를 못알아 들으니 답답하고, 제 입장에서는 말을 들었는데 무슨 소린지 잘 안들리니 답답합니다. 피차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여간 불편하고 짜증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곤욕스러운 일인지는 미국 땅에 살면서 영어를 자신있게 하지 못하는 분들이라면
모두 충분히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사소통 장애는 단지 귀의 상태가 안좋을 때, 또는 언어 능력이 부족할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귀의 기능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또 서로 유창하게 말을 주고 받으며 대화를 하면서도 서로
말 귀를 못알아 듣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경험, 자신의 세계관에 치우친 언어로 대화에 나서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각, 다른 사람의 경험, 다른 사람의 세계관을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같은 말을 사용해도 사실은
각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대화는 주고 받지만 참된 의미의 의사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이와같은 의사소통 장애의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서 공동체와 사회 전반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자녀와
부모 사이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이 가정과 저 가정 사이에서,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서, 남과 북 사이에서, 이
민족과 저 민족 사이에서, 흑인과 백인 황인 사이에서, 이 나라와 저 나라 사이에서, ‘나와 너 사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모든 관계 속에서 의사소통은 그야말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본론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의사소통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아주 오래된 문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을 읽어보면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본문 1절에 따르면,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 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단히 벽돌을 굽고 강력한 역청을 사용해서 욕심껏 바벨탑을 쌓아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고자 했습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뿐이었던 말을
섞으셨고, 이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 습니다.
이 바벨탑 사건은 창세기의 구조 속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본문입니다. 창세기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원역사(1-11장), 다른 하나는 성조사(12-50장)입니다. 원역사의 포커스는 에덴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태초의
낙원과 그 낙원이 점차 어떻게 허물어져 가는지를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를 통해 낙원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가인의 죄를 통해 낙원은 더욱 손상됩니다.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했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을 통해 낙원은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버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낙원이 무너지는 실락원 스토리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벨탑을 세워
하늘까지 닿게 해보고자 했던 사람들에 의해 낙원은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이후로부터 아브람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구약성경에서
낙원 이야기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말하자면 바벨탑 사건은 무너지는 낙원의 마지막 사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낙원을 완전히 무너뜨린 바벨탑 사건의 결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 뿐이었던 언어가
섞여버린 것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의사소통 장애가 발생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벨탑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현상은 타락한 삶의 증거요,
낙원이 무너졌다고 하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도대체 해결책은 없을까요? 어떻게 다시 무너진 낙원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다시 섞여버린 말들을 하나의 언어로 회복하고, 서로 서로 말이 통하는 세상에서 살아
갈 수 있을까요?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오늘 두번째 본문에서 그 길을 한번 찾아보고자 합니다.
오순절이 되어서 예수의 제자들이 모두 한 곳에 모였습니다.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가 온
집안에 가득했습니다. 이윽고 사람들은 불길이 마치 혀처럼 갈라지는 모습과 그것들이 각 사람 위에 내려 앉은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곧 성령이 충만해 져서 성령이 시키는대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대에서 온
사람, 메데에서 온 사람,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리비아 각처에서
온 사람들, 심지어 유대 사람뿐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 크레타와 아라비아에서 온 사람들까지, 모두가 각각 자기네
나라 말로 알아듣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7절, 8절 말씀을 봅시다.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일입니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근원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졌습니다. 바벨탑 공동체에서는 하나의 언어가 갈래갈래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오순절
공동체에서는 갈래갈래 흩어졌던 언어들이 하나의 언어로 회복되었습니다.
저는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이 사건을 묵상하면서, 창세기의 바벨탑 공동체를 통해 잃어버렸던 낙원이 역사상 최초의
교회였던 오순절 공동체를 통해 다시 재건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낙원을 회복하는 새로운 길이 오순절 공동체를 통해
열리기 시작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오순절 공동체에서 일어난 사건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서로 말이 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는 말을 내가 알아듣고, 내가 하는 말을 네가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내가 이해받게 되었고, 너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말이 통한다고 하는 것, 의사가 소통된다고 하는 것, 이것은 단지 의사소통의 기호 시스템이나 언어체계를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서로에게 발돋움하며 하나 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진정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 다고 하는 것은 이토록 중요한 일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장면인지요.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오순절 공동체에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와같은 근원적인
의사소통의 사건을 가능하게 했을까? 낙원을 재건하고 회복하는 신비한 의사소통의 감동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어떻게 우리는 서로서로 진정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의 본문을 살펴보면서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나누고자 하는 말씀은 본문 그 자체의 의미라기보다, 의사소통이라고
하는 주제와의 연결점을 찾으려는 목적으로 해석된 말씀임을 밝혀드립니다.
1. 한 곳에 모이기 (1절) - Gathering
그들은 한 곳에 모였습니다. 바벨탑 공동체 사람들이 세상 각곳으로 흩어진 것과 대조적으로 오순절 공동체의
사람들은 모두 한 곳에 모였습니다. 똑같은 생각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출신지도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도
다른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야 합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모이고, 젊은이와 노인들이
함께 모이고, 초신자와 기존 신자가 함께 모이고, 장로교 출신과 감리교 출신이 함께 모이고, 전통 예배를 좋아하는 분과
현대 예배를 좋아하는 분들이 함께 모여야 합니다. 똑같은 생각을 가져서가 아니라,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이는 것입니다.
다르다고 함께 모이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함께 모이는 일 자체가 의사소통의 첫 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한 곳에 모여야 합니다. 그러나 막연하게 그냥 모일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중심이 필요합니다. 그 중심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위해 오신 주님,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 그분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 중심이 우리로 하여금 다름에도 불구하고 말이 통하게 하는 원천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꾸준히 모입시다. 한 곳에 모입시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형제의 말이 들리는 기적을 경험해 봅시다.
2. 세찬 바람소리 듣기 (2절) - Listening
오순절 공동체 사람들이 한 곳에 함께 모였을때,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 소리가 났고, 그 바람 소리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들이 경험한 것은 무엇입니까?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신비한 소리, 평상시에는 듣지 못했던
소리, 그들의 온 집안을 가득채웠던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거룩한 의사소통의 사건이 일어나려면 참된 듣기가 필요합니다.
Listening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주의를 기울여 듣는 것이고, Hearing은 그냥 저절로 들리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거룩한 의사소통은 Hearing이 아니라 Listening을 통해 가능합니다. 의지를 갖고 들어야 합니다. Listen
Carefully!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상시에 듣지 못했던 소리, 신비한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 깊이 감춰진 소리, 내면의 신음소리, 외로움의 소리, 사랑을 갈구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형제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아무리 긴시간 대화할지라도 거룩한 의사소통은 전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들어야 합니다.
육체의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말뿐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와같은 Listening이 공동체 안에서 일어날 때, 거룩한 의사소통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3. 불의 혀 보기 (3절) - Seeing or Understanding
오순절 공동체 사람들은 불길이 마치 혀처럼 갈라지는 모습과 그것들이 각 사람 위에 내려 앉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신비한 소리를 듣고나서 이번에는 놀라운 광경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불길이 솟아 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을 봅니다. 아주 디테일한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 아주 섬세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I see! I understand!
무엇인가를 세심하게 보는 것은 언제나 깊은 이해의 차원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기계적인 말의 소통만으로는
진정한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보는 차원, 이해의 차원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관계 속에서 진정한
의사소통의 대단히 중요한 비결은 ‘긍휼함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단지 동정이나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한 존재의
가치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언제나 이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사”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여기 말이 안통하는 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를 바라봅니다. 그의 상처를 바라봅니다. 그의 아픔을 바라봅니다. 그의
한계를 보면서 내 한계도 바라봅니다. 그에게 공감을 합니다. 그가 다시 보입니다. 그가 이해됩니다. 의사소통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바라 볼때 정보를 가지고 바라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사랑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공감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의 눈을 훨씬 더 크게 뜨게 해주고, 이해의 차원을
더욱 깊게 해줍니다. 오순절 공동체에서는 이와같은 섬세한 바라봄의 사건, 깊은 이해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4. 성령이 시키는 대로 말하기 (4절) - Speaking
한 곳에 모여서, 세찬 바람 소리를 듣고,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불의 혀를 보고, 그리고 오순절 공동체 사람들은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생각이나 자기 철학이 시키는 대로가
아닙니다. 자기 견해, 자기 세계관, 자기 의도를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시키는대로 말합니다. 거룩한 의사소통은
성령이 시키는 대로 말할 때 가능해 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말이 성령이 시켜서 한 말인지, 내 생각으로 내가 지어서
한 말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가장 확실한 구별 방법이 본문에 소개됩니다. 각각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자기네
말로 알아듣는 현상이 일어나면 그것은 성령의 말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지어낸 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령의 말은 모두가 이해하고 모두가 알아듣고, 모두가 공감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모두가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말은 단지
100%의 찬성을 얻어낸다는 뜻이 아니라,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해의 사건, 소통의 사건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런 경우를
우리는 종종 경험하지 않습니까? 소통의 사건은 100% 동의가 아니더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만장일치보다 서로 다른
견해가 서로에게 소통되는 것이 성령의 움직임의 결과입니다. 성령이 시키는대로 말합시다. 성령이 시키는대로 하는 말은 언제나
그 바탕에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시키는 말은 언제나 사랑의 언어입니다. 거기에선 진정한 의사소통의 사건이
언제나 일어날 것입니다. 내 주장, 내 생각, 내 견해가 아무리 옳더라도 성령이 시키는대로 말하기 위해 삼가며 조심합시다.
언제 어디서나 성령이 시키는대로 말하며, 사랑의 언어를 구사하며 살기위해 노력하며 애써 봅시다. 그러면 우리 삶의 바운더리
안에서 거룩한 의사소통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질 것입니다.
맺는 말
저는 매나싸스 캠퍼스가 성령이 충만한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란 단지 예배 분위기가 뜨거운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멘 소리가 많이 나오는 교회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병자들이 벌떡벌떡 일어나고, 신비한 기적들이
일어나는 교회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곳에 모이고, 다름을 이해하기 위해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 깊이 공감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 보아 주고, 성령이 시키는대로 사랑의 언어로
말하는 공동체, 서로 말이 통하는 공동체, 거룩한 의사소통이 일어나는 공동체, 이런 공동체가 성령이 함께 하는 공동체요,
성령이 충만한 공동체일 것입니다. 매나싸스 캠퍼스가 성령이 충만한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