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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2 (강 현식 목사)
진실로, 진실로
요한복음 3-3-5, 시편 139:1-7
1.
유사이래 오늘날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널리 신속하게 선포되었던 시대가 없었습니다. 교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인터넷이나 라디오, TV를 통해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가 실시간으로 방송됩니다. 마음만 먹으면 집에 앉아서 입맛에
맞는 설교를 골라서 들을 수도 있습니다. 차분한 설교, 지적인 설교, 뜨거운 설교, 날카로운 설교, 감동적인 설교,
어떤 설교든 선택이 가능합니다.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각종 모임과 세미나를 통해 성경에 대한 지식도 한층 깊어지고
전문화되어 갑니다.
쏟아져 나오는 기독교 전문 서적들로 인해서 조금만 관심 있으면 굳이 신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전문가 못지 않은 신학적인
식견을 가질 수도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해외 선교의 붐으로 세계 방방곡곡 오지란 오지마다 선교사가 파송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인종이 없을 정도입니다. 기독교 문화의 확장과 교회의 증가로 인해서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복음의 한 대목 정도는 익숙하게 들어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야말로 복음이 대 유행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참 반가운 일이고 고무적인 일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복음이 유행인 시대를 살아갈수록, 무언가 마음 한켠이 허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 저기서 복음은
더욱 세련되고 더욱 찬란하게 선포되고 있는데, 복음의 열매는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2.
예수께서는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는 말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개역성경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뿐 아니라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사람들에게 이런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표현을 쓰셨을까요? 그저 단순한 강조 용법일까요? 예전에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이 귀절을 그저
뒤에 나오는 말을 강조하기 위한 단순한 부사(adverb)로 생각 했습니다. ‘누구든지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대 유행이지만 복음의 열매는 빈약하게 느껴지는 이 시대를 살면서,
‘진실로’라고 하는 말은 단순 부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 특별한 부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누구든지 거듭나야 함’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복음 유행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누구든지
거듭나야 함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진실로 거듭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오늘 설교 주제는 ‘거듭남’이 아니라, ‘진실로 진실로’라는 독립 부사임을 환기시켜 드립니다. 거듭남이라는
주제뿐 아니라 신앙의 모든 주제가 여기에 적용됩니다. 복음의 능력은 복음의 내용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 복음을 내가 살아낼 때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진실로! 그러므로 복음을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가지라도
얼마나 진실하게 실천하며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힘써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떻게 이것을 살아 낼 것인가에
있다고 믿습니다.
3.
저는 우연한 기회에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이 새롭게 들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캐나다에 살 때, 토론토
대학에서 잠시 공부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라르쉬 공동체의 창시자인 Jean Vanier의 특강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쟝 바니에는 George Vanier라고 하는 전 캐나다 수상의 아들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토론토 대학 St. Michael College의 철학과 교수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우연히 프랑스의 한
아동 정신병원에 갔다가, 아무도 울지 않는 아이들의 참혹한 외로움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들의 투정과
울음을 들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울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바니에는 바로
그곳에서 인간 외로움의 극단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재산과 지위와 권리가 너무나 풍요롭고 사치스럽다고 느낀 바니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 집하나를 장만하여, 장애인 두명과 함께 살아갑니다. 이것이 라르쉬 공동체의
시작입니다. 버려진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바니에는 인간의 외로움이 모든 악의 뿌리라는 것을, 모든 인간존재의
왜곡이 외로움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확인하면서 외로움과의 전쟁에 자신의 모든 삶을 다 바치게 됩니다. 친절과
부드러움, 이해와 기다림, 용서와 사랑만이 외로움이라는 적군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는 바니에는, 세계 각곳을 다니며
강연을 하지만 늘 입고 다니는 허름한 잠바차림으로 등장하여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씨로 설교를 합니다. 그날도 토론토의
추운 겨울날씨에 아랑곳없이 강당을 가득메운 인파 한 가운데서 등장한 바니에는 40분 남짓 이어진 설교에서 우리 모두가
아는 내용을 말 했습니다. 용서에 대해서, 부드러움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그는 강조나 지나친 과장의 수사 없이
그저 덤덤하게 용서에 대해 말했습니다. 부드러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했습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희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조용한 말씨 속에는 얼마나 강력한 웅변이 담겨있었는지, 얼마나 놀라운 촉구의 힘이 담겨있었는지 모릅니다.
용서와 부드러움과 사랑에 대한 그렇게 강력한 촉구를 경험해 본적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 진실함과 참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을 사용하실 때, 바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두셨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능력은
오직 진실한 삶을 통해서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진실로 복음을 실천하며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듣고 배우고 알게 된 복음을 삶 속에서 구현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누가 있어 복음을 알기만 하고 실제로 실천하며
살고 싶지 않을까요? 무엇이 장애물이며, 무엇이 문제일까요? 맞습니다. 복음을 진실로 실천하며 사는데 가장 근본적인
어려움은 어떤 능력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지 않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것을 통칭해서 ‘거짓의 경향’이라고 이름하고 싶습니다.
4.
우리 안에는 우리를 자꾸만 거짓으로 인도하려는 은밀한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향이 끼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우리 삶에 만연해 있습니다. 누군가를 속이고 거짓말을 일삼고 사기를 치는 노골적인 거짓은 사실 별로 두려운 거짓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거짓이 무섭습니다. 자기 의식의 스크린에도 잘 잡히지 않는 은밀하게 만연된 거짓이
훨씬 더 무섭습니다. 우리 삶에 만연된 거짓들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우리가 주고 받는 언어 습관을 한번 살펴봅시다. 현대인들의 언어 표현 중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 중의 하나가
과장법이라고 합니다. 매사에 ‘너무 너무’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로, 진짜로’를 수시로 사용합니다.
“파란 하늘에 붉게 물든 단풍”이라고 말해도 될것을, “파아아란 하늘에 쌔애빨간 단풍”이라고 말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별것 아닌것 같지만 작은 거짓의 습관임에 틀림없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합니다. 과장된 언어는 과장된 존재를
드러낼 뿐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습관인것 같지만 진실한 삶을 사는데 큰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큰 거짓을
허용하고 마련하는 발판이 될 수 있기에, 한번쯤 고치도록 결단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 또 우리의 거짓 습관 가운데, 지나치게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거짓이 많습니다. 죄송하지만 속어를
좀 사용하겠습니다. 여러분, ‘쪽팔림과 부끄러움’의 차이를 아시는지요? 남들의 눈에 나의 부족함이 드러날때 느끼는
감정이 ‘쪽팔림’이고,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느끼는 감정이 부끄러움입니다. 오늘날 쪽팔림을 느끼는 사람은
많은데,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너무 적습니다. 현대인들은 마치 쪽팔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사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부끄러움의 관점이 밖에 있느냐 안에 있느냐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부끄러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진실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쪽팔림에 붙들려 사는 사람은 영영 거짓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3) 우리 삶에 만연해 있는 거대한 거짓이 있는데, 그것은 나를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짓입니다. 나는 과연 내
것일까요? 나는 어디서 왔을까요? 그리고 어디로 갈까요? 내 처음은 누가 결정했고, 끝은 또한 누가 결정할까요?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처음과 나중, 내 생명 이전과
이후가 내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청지기라고 고백합니다.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것이고, 내 삶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삶은 아주 다른 삶입니다. 그 결과도 아주 다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내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험을 할 때 완전히 당황합니다. 내 삶이 내 마음대로 내 계획대로 펼쳐지지 않을 때
완전히 좌절합니다. 왜냐면 거대한 거짓 위에 집을 지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나와 내 삶은 내 것이 아닙니다.
4) 또 아주 심각한 거짓이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부를 쌓고 성공하는 것이며, 행복은 부와 명예와 성공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믿는 인생관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거짓입니다. 경쟁 속에서 승리하여 다른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권리를 나 홀로 누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일리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인생관에 동의하지 않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동의하지 않는 인생관의 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것이 거짓이라고 확실하게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이 주신 내 존재의 가치를 가장 진실하고 아름답게 구현해 내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꽃을 비유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만일 한송이 꽃으로 태어났다면 우리 존재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느 귀인의
집에 값비싼 꽃병에 꽂히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겠습니까? 화려한 꽃다발 묶음이 되어서 어느 아름다운 여인의 품에 안기는
것이 우리 존재의 목적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 꽃의 목적입니다. 산비탈에 피었든,
깊은 산속에 피었든, 벼랑에 피었든, 어느 자리, 어떤 곳에 피었든 거짓없는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피어내는 것이 꽃의
목적입니다. 값비싼 꽃병을 꿈꾸는 꽃, 어느 아름다운 여인의 품을 꿈꾸는 꽃은 생명력을 잃고 곧 죽게 됩니다. 거짓에
사로잡힌 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자기 삶의 자리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진실하고 거짓없이
피어나는 꽃은 참으로 아름답고 오랜 생명력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목적은 성공이나 부가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삶의 자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가장 참되고 진실한 존재로 순간순간을 살아 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을 이루고 있는 것이고, 그럴 때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꽃과 같은 존재가 된다고 믿습니다.
5.
<아무도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제목만으로도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돌변합니다. Dr. 지킬에서 Mr. 하이드로,
헐크로 변하고, 신사에서 건달로 변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냉열한이 되고, 온화했던 사람이 바람둥이로 변합니다. 아무도
없을 때 온갖 죄의 충동이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아무도 없을 때 우리는 누구일까요? 무대 위의 연극배우 말고, 연극이
끝난 무대 뒤에서의 우리들, 그 때 우리들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을 때 갖는 생각, 하는 행동, 품는 마음이 우리자신의
현주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거대한 거짓의 힘을 제압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시편 139편은 그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거짓의 얼굴은 매우 다양하고 그 모습은 가지각색인데, 거짓을 물리치는 방법은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은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나를
훤히 아시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 것입니다. 앉아 있든 서 있든, 길을 가든 누워있든, 혀를 놀려 말하든 말하지
않고 마음에 품든, 우리의 모든 생각, 모든 행실을 이미 다 알고 계시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거짓과 싸워 이기는 유일하고도 참된 방법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깨달음이 너무 놀랍고 높아서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다고 고백합니다. 거짓의 현상은 복잡하고 현란하지만, 거짓을 깨는 방법은 놀랍도록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햇살이 온 대지를 구석구석 비추듯이, 아주 작고 하찮은 일상 속에도 임재해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잡하고 어두운 우리 내면일지라도 거기에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기쁨과 행복의 순간뿐 아니라 슬픔과 불행,
좌절의 순간에도 주님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내 허위의식과 탐욕, 온갖 거짓과 죄의 습관을 주님께 낱낱이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정직하고 진실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6.
담백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부끄러워할 뿐, 쪽팔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와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님을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값비싼 꽃병이나 화려한 여인의 품을 그리워 하는게 아니라, 내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말입니다. 이것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말로, 거짓과 허위의 거대한 그늘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건네고자 하셨던 예수님의 궁극적인 말씀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진실하고 거짓없는 꽃, 아름다운 하나님의 꽃으로 피어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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