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12.02 1부 예배 설교 (최 지훈목사)
“하늘 나라에 속한 사람”
마 11:1-15
오늘은 대강절의 첫 주일이자 새 교회력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이 기간 중 특히 자주
생각하게 되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오심이 단지 그 당시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듯이, 세례 요한의 모습 또한 오늘 우리에게 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큽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약 반 년 정도 일찍 유대의 한 경건한 제사장의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성장해서
광야에 나가 살면서 회개의 세례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자기 죄를 고백하고 물로
세례(洗禮)를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젊은 예수도 그에게 가서 세례를 받았는데 그 때 요한은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임을 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가리켜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 왕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것을 책망하다가 미움을 사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기록은 바로 그가 감옥에 있었을 때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서 물었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것은 참으로 극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앞서서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고 전파하던
사람, 그 일에 일생을 걸었고 이미 예수가 바로 그라고 선언했던 사람이 이렇게 물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그 때까지
예수께서 일하시는 모습이 무언가 요한의 기대와 달랐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르긴 해도 메시야라고 하면 요한은
분명 모세나 다윗처럼 민족을 압제에서 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할 지도자를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그러한 징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요한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메시야라는 분이 이 땅에 오셨는데 내가
한 시라도 이 악한 자의 감옥에 더 갇혀 있어야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선생 요한이 기대했던 것이 무엇이었던지 간에 지금은 너희가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걸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에게 천국의 기쁜 소식이 전해진다. 그리고 나에게 실망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전해 주어라.” 예수께서는 마치 그의 고민을 이해하시듯 그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복잡한 변증 대신 그의 제자들이 듣고 본 그대로의 놀라운 사실을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오늘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간 후에 예수께서는 요한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놀랍지 않습니까?
수 많은 사람들 중 불과 성경의 몇 절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 어떻게 이러한 놀라운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 묻게 됩니다.
그러나생각해 보면 수긍이 갈 만한 점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도 세례자 요한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그가 나기 전, 복 중에 있을 때부터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광야에서 살면서 원시인처럼 메뚜기와 들꿀을 양식으로 삼아 살았습니다. 분명 그는 광인(狂人)이 아니면 마치 광인의
모습으로 오히려 이 세상의 어리석음을 증거하는 강하고 순수한 인격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인간적인 어리석음이 있었고 모세도 8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위대한 왕
다윗도 영욕(榮辱)과 피가 섞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 배해 세례자 요한의 삶은 비록 그러한 드라마틱한 면은 없다고
한다 해도 평범 속의 비범이었으며 순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거리는 갈대냐?” “아니면,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그런 사람은 광야가 아니라 왕궁에 있다.” 화려한 옷을 입는다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시선과 관심을
모으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명사(celebrity)는 그 옷에서 차이가 납니다. 요즈음도 사람들이
이 소위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러 가는 때가 있는데 바로 소위 레드 카펫 이벤트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부와
명성을 지닌 배우들, 명사들이 단지 행사가 있는 장소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러 수 많은 사람들이 몰립니다. 거기에는
옷이 단연 관심거리입니다. 평범한 복장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0세기 최대의 유명인사 중 한 사람이었던 영국의
다이애너 왕세자비가 살아 있었을 때에는 그의 화려한 드레스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세례 요한을 들으러 광야에
나갔던 사람들은 전혀 그런 것을 보러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옷을 입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에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세례 요한의 말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온 이스라엘이 광야로 몰려나갔던 이유였습니다. 사람의 말은 그의 사람됨을 보여줍니다. 한 선지자로서 그것도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내가 아닌 황량한 광야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가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를 가늠하게 합니다. 요한의 말은 힘이 있었고 사람의 영혼을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큰 사람은 먼저 내면에
진리가 있는 사람이 큰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 모든 가치 있고 영예스러운 일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아가 말씀하십니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큰 사람이다. 이 사람을 두고 성경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단순한 예언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이 예언하고 모두가 기다리던 새 역사의 커튼을
올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 땅에 이루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예언을 담고 있는 여러 말씀 중 하나인 말라기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겠다. 그가
나의 갈 길을 닦을 것이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겠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이다. (말 3:1, 4:5-6)”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바로 이 엘리야 선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니라 엘리야와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할 바로 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그 전에 살았던 모든 사람보다 더 특별한 사명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예언자와 율법서는,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늘 나라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세례
요한은 예언자와 율법서라고 부르는 구약 성경의 가르침의 마지막에 선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율법과 성막의 제사를 전하는
사명을 가졌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예루살렘에서 나라를 세우고 성전을 짓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은
제사보다 중요한 정의와 자비를 외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을 말했습니다.
때가 찼을 때, 세례 요한은 율법과 선지자의 최후의 기수로서, 그리고 동시에 이 하늘 나라의 준비자로서의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마치 릴레이 경주의 마지막 주자처럼, 예언자와 율법서의 가장 성숙한 모습을 대표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여자가 난 이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사람이 없다는 말씀은 그가 가졌던 이러한 특별한 소명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한편 그의 삶은 그의 소명을 잘 드러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고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을 꾸짖을 수 있는 권위와 용기가 있었습니다. 강하고 순수한 인격을 지녔고 형식에 매이지 않은 진실한 영성과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실 때에 그 일을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나 맡기셨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여러 면에서 참으로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예수님이 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여기서 하늘나라는 물론 저 하늘 저편에 있는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 천국의
지극히 작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를 가졌던 세례 요한보다도 더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마 좀
묻고 싶을 것입니다. “예수님, 천국에서는 모두 다 천사처럼 변하기라도 하는 것입니까? 설마 적어도 세례 요한보다
더 뛰어나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요한처럼 지혜롭고 강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이상으로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더 이상의 은혜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맞는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사람됨 이전에 하늘 나라의 은혜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이
가진 특권입니다.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없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그의 소명과 직분에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에 참여하는 사람이 더 크다고 하신 말씀은 거기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전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가장 두뇌가 좋고 암산 실력이 뛰어난 사람도 계산기를 가진 사람과는
경쟁할 수 없듯이,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도 요한보다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이토록 크고 귀중하게 만드는
그 천국의 은혜가 무엇일까요? 무엇이 평범하고 작은 사람을 위대하게 만들까요? 우리는 그것을 바로 메시야이신 예수님에게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세례 요한이 보기에 무언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울법과 선지자의 마지막 주자로서 요한은
분명 모세와 엘리야의 관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악을 미워했고 의를 사랑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께서 하나님의 심판을 이루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는 그를
구경하러 온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올 형벌을 피하라고 알려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마 2:7-8, 10, 12)
분명 예수님도 같은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일어나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악한 자들을 처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시기와 모함을 받고 핍박을 받았지만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세례를 준 요한이 여전히 헤롯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를 구하시기는 커녕, 놀랍게도
예수께도 죄인이 받게 되어 있는 수치와 형벌이 다가왔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이해할 수 없고 엘리야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불의가 의를 이길 수 있고 의인이 악인에게 희생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예수님 자신도 원하시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능력을 빌어서 마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듯 악한 자를 징벌하고 스스로를 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죄와 허물을 자신이 끌어 안아야 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매를 대신 맞아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듯,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해 수치와 고통 가운데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시기와 모함에 잡혀서 죽임을
당하시기까지 저항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까지의 여정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문둥병 환자가 깨끗하게 됩니다. 소경이 보게 됩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다. 비단 이런 기적적인 일들 뿐만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집니다.
어느날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음식을 드시고 계시는데 어느 한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은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죄인으로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의 등 뒤에 발 곁에 서서, 울면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바릅니다. 모든 사람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괘씸해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천국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아는 사람은 큰 사람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를 놀랄 만큼 상승시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을
때 그것은 그 때까지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았던 혁신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떠한 하나님의 큰 종보다도 훨씬 더 큰 소명을 가졌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이러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요 14:12-15) 사랑하는 사람을 예수님의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습니다. 종은 하루 종일 주인을 위해 일한 후에 시간이 되면 자기 집으로 갑니다. 그러나 친구는
함께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나누고 마음을 나눕니다. 만일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듯 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거룩한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지극히 작은 사람이라도 큰 사람입니다.
놀랍게도 그 사랑과 은혜와 함께 하나님의 능력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감리교 목사요 부흥사였고 강력한 치유와 기적의 은사로 알려졌던 박재봉
목사님이 쓴 “사랑의 기적을 주소서”라는 기도문이 “사귐의 기도를 위한 기도선집”에 있습니다. 그 기도문의 일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나의 사랑의 주시여,
나에게 주의 그 자비를 주소서.
그리하여 세상에 머물러 있을 때
이 자비심이 스스로 움직여 기적이 되게 하셔서
각색 육체의 병자들까지라도 고쳐서
저들로 하여금 주의 은혜를 보답하며
널리 사람들에게 봉사하기에 구속이 없이 자유롭게 활동하게 해 주소서
나의 사랑의 주시여,
나로 하여금 기적 애호가나
기적 상습범이 되지 않도록 해주소서…
나의 사랑의 주시여,
‘사랑’이라는 그것의 전능만을 믿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는 이 사랑의 전능 이외의
별다른 기적이나 증거나 방편을 빌려서
전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하소서…
비록 예수님은 헤롯의 왕궁을 무너뜨리시거나 로마의 군대와 싸워 이기시지 않으셨지만 그가 가는 곳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표적이 나타났고 치유와 회복과 생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박재봉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아버지의 사랑의 화신(化身)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 알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알았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앞에는 세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의 길입니다. 누구든지 왜 사람들의
관심과 부러움과 존경을 싫어 하겠습니까? 왜 인정받고 싶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성공을 통해서, 명예를 통해서,
또 다른 길을 통해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가지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혹 유명세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찾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그러한 영광을 추구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내면적인
생명이 없다면 그것 자체로는 공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에서 행복하지 않은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길이 있습니다.이 길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경외하는 길입니다.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길입니다. 무언가 속에 든 사람, 지혜롭고 정직하며 정의와 자비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깨끗하고 곧은 인격과 영성을 추구하고 많은 사람을 가르칩니다. 이 길에는 참된 것이 있습니다. 시편 1편은 이 길을
이렇게 잘 표현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르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잠언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는
그것을 얻는 사람에게 생명의 나무이니, 그것을 붙드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왼손에는 부귀
영화가 있다.” (3:18, 16) 오늘날 사회에서 존경받고 영광을 얻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뛰어난 민족,
실력있는 나라일수록 강한 정신적인 문화의 기반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도덕적, 정신적 기초가 없이 소위 주류 사회에
뛰어들다가는 스스로 창피를 당하기 꼭 알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꾸준히 가는 사람 역시 무언가 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위대한 사람, 훌륭한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 고통의 문제, 악의 문제가 있습니다. 전도서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니 헛되고 헛되다.”
마지막으로는 하늘 나라의 길이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과 선지자과 상관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완성입니다. 이 길은
어떻게 보면 좁은 길입니다. 화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낮아지는 길이고 섬기는 자의 길입니다. 단지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진정한 위대함이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의 편지의 말씀을 인용해 봅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많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깨닫는 것이,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있습니까? 매일의 삶에서 무엇이 나의 행동 방향을 결정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높아지고 배부른 사람은 체험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 이런 사람들은 하늘 나라에 가까와 있습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산을 옮긴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것은 우리가 사랑이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겨자씨
만하더라도 참된 사랑을 안다면, 그 사랑을 추구할 때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는 우리 모두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하늘 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강림절 첫 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새롭게 생각하고 우리 스스로가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계절입니다.
우리가 무슨 마음을 가지고 성탄절을 기다리겠습니까?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그 세상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능력이 필요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새로워지기를 소망하고 기대하여야 하겠습니다. 구유의 낮은 곳으로 오신 그 분을 생각하는
이 시절에, 나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능력을 새롭게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분명 기뻐하실
기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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