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12.02 2부 예배 설교 (이 현호 목사)
기대
누가복음 7:18-23
1.
12월은 한 해의 끝이면서 동시에 한 해의 시작이기도 한, 아주 절묘한 계절입니다. 12월이 일반 달력으로 보면
한 해의 마지막 달이지만, 교회력(church year/liturgical year)으로 보면 한 해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강절(Advent)로부터 한 해가 시작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12월은
‘끝’과 ‘시작’이 공존하는 달입니다. 12월의 한복판에 1월이 들어와 있습니다. 끝나고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끝이
곧 시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분의 삶은 12월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생의 마지막에서 다시금 참된 생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이 묻혔던 돌무덤은 그분의 생의 마지막 장소이면서 동시에 부활의 첫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죽음의 무덤이
곧 탄생의 모태였습니다. 무덤이 곧 모태가 되는 이것은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만, 예수님은
이 신비를 현실로 살아내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끝이 곧 시작이 되는 이 삶의 신비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전환하도록 촉구합니다.
인간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곳에서부터 예수님의 이름으로 새로운 일이 시작됩니다. 인간의 절망은 희망을 일구시는 예수님의
디딤돌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짙은 어둠, 아무리 힘겨운 절망 속에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희망의 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끝이 곧 시작이 되는 이 삶의 신비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보내는 일과 미래를 맞는 일을 동시에 살아내도록
촉구합니다. 미래는 과거를 보내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Letting go! 과거를 떠나 보내는 일은 건강하고
참된 삶을 위해 참으로 중요한 과제입니다. 제가 강릉에 있을 때에 만난 한 집사님은 스물 한 살의 꽃다운 나이에 죽은
하나 밖에 없는 딸을 끝내 마음으로부터 떠나 보내지 못하고 긴 세월을 눈물로 보내셨습니다. 딸이 쓰던 방도 그대로
두고, 그 방에 있는 물건들도 그대로 두고 여러 해를 살았습니다. 그분에게는 말할 수 없이 힘겨운 세월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도의 힘과 목사와의 상담을 통해 서서히 딸을 떠나 보낼 수 있었고, 오랜 방황의 세월을 마치고 삶의 활력과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 있는 고통과 상처, 증오와 원망의 마음을 흐르는 세월의 강물에 떠나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오래 된 망령처럼 고스란히 붙잡고 있으면 우리에게는 내일도, 내년도, 미래도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왕년’ ‘젊은 시절’을 놓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도 놓아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과거가 찬란하고
화려했어도 떠나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논리적으로는 과거를 보내야 미래가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라는 사실입니다. 마음
속의 무언가를 떠나 보냄으로써 새로운 마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마음을 품어야 옛 마음이 물러가게 됩니다.
이것은 어둠이 사라지고 난 후 빛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빛이 비춰질 때에 어둠이 사라지는 이치와 같습니다. 샘에서
새 물이 솟아나와 고여있는 물을 밀어냄으로써 맑은 연못이 유지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옛 사람’/‘거짓 자아’(false self)를
청산 한 후에 ‘새 사람’/참 자아(true self)를 입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참 자아의 원형(archetype)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음으로써 우리의 옛 마음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은총이 우선이요 인간의 노력은 나중입니다.
대강절은 인간의 모든 끝을 새로운 시작으로 만드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기다림은 맞이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대강절은 ‘나’라고 하는 옛 자아를 떠나 보내기 위해 새 자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계절입니다. 이
절기는 강단 장식을 바꾸는 사람들이나. 스톨의 색깔을 바꿔 입는 목사들만의 계절이 아닙니다. 대강절은 쓸쓸한 연말의
분위기를 크리스마스의 축제 분위기로 극복하는 계절이 아닙니다. 대강절은 ‘끝에서 하는 시작’입니다. 죄와 죽음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 자아의 끝에서 부활이요 생명으로서 새 삶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기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리는
까닭은 예수님께 기대와 희망을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 예수님 안에서 기대하는 것, 예수님께
궁극적인 희망을 거는 것 ?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 기다림의 계절, 기대와 희망의 계절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 것입니까?
2.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기원전 586년 조국을 잃고, 예루살렘 성전을 잃고, 한과
설움으로 가득한 방랑의 세월을 살아가면서부터 그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바로 메시아였습니다.
그들에게 다윗 시대의 영토와 영광을 회복시켜 줄 메시아를 오랜 세월 기다리며 살아왔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을 중심으로 복음 사역을 펼치기 시작하자,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로 세례 요한이 그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가 아닐까 추측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 자신은 다른 이를 메시아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나사렛 예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나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메시아로서 확신을 줄 만한
역사를 펼치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볼 때에 그분이 메시아/그리스도 같은데, 그분이 펼치는 사역을 보면 메시아로 확신하기에는
무언가 양에 차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제자 둘을 예수께 보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눅7:19)
하고 물어보게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물음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눅 7:22)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마술을 펼치는 것과 같이 기적적으로 병자들을 고치는 정도의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대단한 인물이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상황을 변화시켜 줄 능력의 소유자여야 했습니다. ‘로마의
압제’라는 상황을 극복하여 ‘자유’라고 하는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물, 약소국의 신세를 면치 못하는 상황을
극복하여 팔레스타인 너머 이집트를 호령하고 멀리 유프라테스 강변의 도시들까지 다스릴 수 있는 강력한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인물,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위용을 회복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강력한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단순히 치유자로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일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메시아의 모습은 이것보다 훨씬 강력하고 유능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옛날 예언자 이사야가 묘사한 메시아 /그리스도의
모습 즉 사람들에게 멸시와 버림을 받고 고통을 겪고 끝내 죽임 당하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사 53:1-12)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메시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개선 장군처럼 예루살렘에
들어가 세상을 평정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란하게 드러내는, 그런 인물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연덕스럽게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본 대로 가서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 자신을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는 부드러운 치유자의 모습으로 제시하신 것일까요?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의 치유가 전인적인 치유였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단순히 몸의 질병이나 장애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치유는 언제나 몸과 마음을 동시에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마가복음에
소개되는 소경 바디메오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바디메오의 시력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막 10:52). 장님의 눈을 고치시고는 그가 구원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눈을
뜨게 된 바디메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이것은 바디메오가 보게 된 것이 단순히 물리적인 대상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목적을 보게 된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치유는 곧 구원입니다. 한 사람을 치유하시는 것은 곧 그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치유하심으로 구원하시는
것이며, 구원하시려고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기대하던 메시아처럼 상황을 뒤바꿈으로써 구원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상황을 살아가는 ‘사람’을 치유하심으로 즉 변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삶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통치하심으로써가 아니라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치유하심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3.
참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일으키시는 치유 곧 구원의 핵심은 ‘변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힘입어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곧 변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 생활은 예수에 대해 지적으로 탐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힘겹고 어려운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도 둘째 문제입니다.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변화됩니다. 변화의 능력도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고, 변화의 모델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변화되고, 예수님처럼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처럼 변화되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삶이, 인격이, 생활방식이, 가치관이, 예수님처럼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남을 배려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의 아픔도 민감하게 보살피게 됩니다.
말끝마다 다른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던 사람이 칭찬과 격려와 위로의 말을 건네게 됩니다. 도도하고 교만하게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남을 위축시키던 사람이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한겨울 삭풍처럼 싸늘한
표정으로 지나치던 사람이 봄날 훈풍처럼 따뜻한 미소로 먼저 인사를 건넵니다. 남을 위해서는 동전 한 푼도 내놓지 못하던
사람이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을 위해 형편대로 자선을 베풉니다. 열거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고민해야 할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변화’가 신앙의 주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혜택을 받는 것은 좋아합니다만, 예수의 이름으로 변화를 받는 것은 별로 원치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질병이
치료되고, 사업이나 학업이 성공하고, 마음이 차분해지고, 가정이 편안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생활과 인격이 변화되는 것은 별로 원치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는 것은 간절히 원하지만, 예수님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별로 원치 않습니다. 칭의(justification)은 원하지만 성화(sanctification)는
원치 않습니다. 칭의는 한 순간의 짜릿한 경험이지만, 성화는 인내를 수반하는 기나긴 자기와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칭의의 혜택을 받는 것은 나 자신이지만, 성화의 혜택은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어떤 분의 농담 섞인 말대로, “아내(남편/부모)가 몰라볼까봐!”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변화는 불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불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익숙하지 않은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변화되는
것입니다. ‘진화’하는 것이 아니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진화하는 것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조금씩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하는 것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되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변화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런 한계가 뚜렷한 자아를 예수의 손길에 맡기는 순간부터
일어납니다. 바울 사도 같은 신앙의 거인도 자신을 “비참한 사람”(롬 7:24)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롬 7:15-23).
내 마음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변화는 예수님의 능력에 힘입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치유하심으로써 구원하십니다. 치유와 구원은 변화를 수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는 변화시키심으로 우리를 새로운 인생으로 이끄십니다.
4.
대강절은 바로 그런 예수님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특별히 마땅히 기다려야 할 사람을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기다려야 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기다리는 까닭은 그분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예수님께 무얼 기대하고 있을까요? 여러분은 예수님께 무얼 기대하십니까?
저는 변화를 기대합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의 능력으로, 내 자신이 변화되기를 기대합니다. 참된 인간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의 변화도 기대합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그리고 그 교회에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예수님처럼 섬기고,
예수님처럼 헌신하고, 예수님처럼 욕심 없이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더 나아가, 변화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기를 기대하고 희망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더 이상 전쟁, 갈등, 분열, 속임수, 불법, 경쟁이
없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공의가 물처럼 흐르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는”(암 5:24) 세상을 교회가 일궈내기를
희망합니다.
기대하는 것은 꿈을 꾸는 것입니다. 희망하는 것은 꿈을 꾸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꿈을 꾸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꿈이 그들의 꿈이 됩니다. 예수님의 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꿈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태초에 에덴 동산에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꿈이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그곳에서 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꿈이 아닙니까? 예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확인시켜
주셨던 꿈이 아닙니까? 성령을 경험한 초대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꿈이 아닙니까? 이 땅의 교회들로 하여금 이루도록
원하시는 꿈이 아닙니까? 사람들을 통해 끝내 이루지 못하시면 마지막 때에 당신의 권능으로 이루실 꿈이 아닙니까?
그 꿈이 무엇입니까? 그 꿈은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면서 보시기에 참 좋았다”(창 1:31)고 감탄하셨던
그 세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 꿈은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니고,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모사의
굴에 손을 넣는”(사 11:6-8)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꿈은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며,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다 사라지는” “새 하늘과 새 땅”(계 21:1-4)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꿈을 꾸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러한 온전한 샬롬(Shalom)의
세상이 이뤄지기를 꿈꿉니다. 꿈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현실적이지 않아 무시당하고 외면당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이지
않기에 ‘꿈’인 것입니다. 이 꿈은 아직 오지 않은 현실이지만, 그러나 현실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일을 꿈꾸기에 오늘을 올바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2007년 대강절을 맞으면서 이 꿈에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함께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다리면서 그분에게 기대를 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기대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변화되어
궁극적으로 이루어야 할 비전을 함께 꿈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꿈이 우리의 꿈으로 성육신하고, 우리의 꿈을
통해 하나님의 꿈이 이뤄지는 날을 위하여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계 22:20)이라고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여,
어둠 속에서 빛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립니다.
긴긴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기를 열망하며
주님을 기다립니다.
직분만 있고 주님이 없는 어두운 마음 속에,
예배당만 있고 주님이 없는 타락한 교회 속에,
정치와 경제만 있고 복음은 없는 척박한 세상 속에,
오시옵소서, 성큼성큼 오시옵소서.
오시어, 주님의 꿈을 이뤄주옵소서.
우리를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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