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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8 (김영봉 목사) 감사 주일 예배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마음”
(Grateful Heart, A Sure Way to Salvation)
--누가복음 17:11-19




1.

Happy Thanksgiving! 감사절을 맞아, 성도님들 마음 마음마다에 그리고 가정 가정 마다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랜 만에 찾아 올 자식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어머니들의 손길 마다에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홀로 있기에는 너무도 외로운 이 기간 동안, 찾아 와 줄 사람도, 찾아 가 볼 사람도 없는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주님의 특별한 위로가 그분들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볼 수 있기를 빕니다.

오늘은, 3주일 동안 지속했던 <영화관에 가신 예수님> 시리즈를 잠시 쉬고, 감사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감사에 대해 더 알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없지 않겠지만, 감사가 메마른 이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한 번쯤 감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의 마음에 감사의 정이 넘치고, 그 감사의 정이 입술과 손을 통해 표현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 지방은 위험 천만한 곳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서로 적대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경계 지방에서는 자주 테러가 일어나곤 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따져 올라가면,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이삭의 자손이며, 야곱의 자손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거쳐 오면서 두 지역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살기를 원치 않는 그곳을 삶의 은신처로 알고 찾아 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센씨 병처럼 전염성이 있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들이 제사장으로부터 추방령을 받고 나서, 그곳으로 찾아왔습니다. 갈릴리에서도 찾아오고, 사마리아에서도 찾아왔습니다. 몸이 정상일 때는 서로 대립하고 싸우던 사람들이 딱한 처지가 되고 나서는 한 곳으로 모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같은 질병, 같은 아픔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혈통의 차이를 초월하여 한 곳에 모여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에게 믿기 어려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갈릴리 출신의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소문입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그분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놀라운 말씀을 전하며, 여러 가지 질병들을 말씀 한 마디로 치료하신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살릴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지금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그들이 살고 있는 경계 지역을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환자들의 반응은 제각기였습니다. “뭐, 헛소문이겠지,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라는 사람도 있었고, “보나 마나, 사기꾼이 또 하나 나타난 것이겠지. 우리가 뭐 한 두 번 속아 봤어?”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그 소문을 듣고 슬금슬금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서로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 받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살짝 일행을 빠져 나옵니다.

2.

그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 헤맵니다. 사람들을 만나 물어볼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랬다가는 당장 제사장에게 고발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웅성이는 소리를 찾아 이곳 저곳을 누비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서로를 부축해 주면서 예수님의 일행을 찾아 다닙니다.

하나님이 도우셨을까! 그들은 지나가는 예수님의 일행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멀찌기서 소리칩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는 악성 피부병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살면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희를 고쳐 주십시오. 제발, 저희의 청을 받아 주십시오.” 그들의 호소는 예수의 일행을 멈춰 서게 합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보고는, 제자들이 모두 긴장된 자세로 그들을 노려봅니다. 순간, 예수님이 앞으로 나오시면서, 긴장하고 있는 일행들을 뒤로 물러나게 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레위기 14장의 규정에 따라, 악성 피부병에서 치유된 사람은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제사장이 완치되었음을 증명해 주어야만 그 사람은 자기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는 말씀은 그 병이 이미 치료되었으니, 가서 확인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몸에는 아직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게 무슨 소립니까? 아직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니요? 그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들은 어떤 강한 무게를 느꼈습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의 말씀은 진심처럼 느껴졌습니다. 열 사람이 모두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제사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한 참 동안을 걷다가, 한 사람이 얼핏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그 흉하던 상처들이 사라지고 깨끗해진 것입니다. 그는 그 사람을 붙들고 서서 말합니다. “잠깐, 네 얼굴!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깨끗해졌어! 상처들이 감쪽같이 사라졌어! 예수님의 말씀이 진짜였어!” 그러자 그 사람도 놀라면서 대답합니다. “너도 마찬가지야! 말끔히 나았어!” 열 사람 모두, 가던 길을 멈추고, 서로를 살펴 보면서, 치료된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합니다.

질병이 완전히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사라집니다. 한 시라도 빨리 자기 동네에 있는 제사장에게로 찾아가 확인 받고 가족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거나 돌아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나 진배 없는 이 기쁨을, 한 시 바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만은 오던 길로 돌아갑니다. 길을 가면서 그는 미친 사람처럼 혼자서 큰 소리로 중얼거립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나님께 찬양드립니다. 그렇게, 그는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갑니다. 그는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님 앞으로 가서 그분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님 덕분에 제가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이라고 말합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고, 나머지 아홉 사람은 갈릴리에 사는 유대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마리아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훨씬 낫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하나 뿐이었습니다.

3.

여기서 잠시 멈추어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 같았으면 어떻게 행동했겠습니까? 우리가 애타게 열망했던 꿈 같은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가 만일 그 열 사람 중 하나였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아홉 명의 유대인들처럼, 이 기쁜 소식을 나누기 위해 먼저 가족들에게 찾아갔을까요? 아니면, 한 명의 사마리아인처럼, 죽음의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고쳐 주신 그분을 찾아가 감사를 드렸을까요?

혹시, “나는 그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했을 거야”라고 자신하는 분이 계십니까? 조금 성급한 판단은 아닌지, 스스로 자문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비율, 즉 9대 1의 비율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두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감사드리는 사람은 전체의 10%밖에 되지 않을 만큼 적다는 뜻입니다. 열에 여덟 혹은 아홉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두고 즐기는 데에 더 빠르다는 뜻입니다. 누가 이 통계에 대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오늘의 이야기가 잘 보여주듯, 감사는 우리에게 참 어렵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굳어져 있어서 웬만한 일로 감사를 느끼지 못합니다. 교만해진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누리는 것이 모두 우리의 능력 때문이라고 착각합니다. 헨리 와드 비쳐(Henry Ward Beecher)는 “교만한 사람은 늘 자신이 마땅히 가져야 할만큼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코 감사할 줄 모른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우리의 마음이 그런 상태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1863년 감사절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성공에 도취한 나머지, 그 모든 일을 일어나게 한 그분의 손길을 잊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4.

오래 전에 읽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주부가 아파트 2층에서 사는데, 어느 날 대청소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에게는 아직 걷지 못하는 어린 아이와 예쁜 강아지가 있었습니다. 이 부인은, 대청소를 하는 동안 아이를 바깥 잔디밭에 놀게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아이와 강아지를 함께 놀게 해도 아무런 위험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 부인은 청소하는 틈틈이 베란다로 가서 밖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따뜻한 햇볕이 내려 쪼이는 잔디밭에서 아이와 강아지는 잘 놀고 있었습니다.

한참 일을 하다가, 이 여인은 잠시 숨을 돌리느라고 베란다에 나와 차를 마시면서 아이와 강아지가 노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평화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 때, 이 부인에게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부인은, 가운데에 구멍이 나 있는 쿠키를 실에 매달아 천천히 밑으로 내려 보냅니다. 쿠키가 거의 아이의 손에 미칠 즈음, 강아지가 먼저 냄새를 맡고는, 그 쿠키를 덥썩 물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아이는 순식간에 사라진 강아지를 찾느라 두리번 거리며 앉아 있습니다.

이 부인은 급히 실을 끌어 올려, 쿠키를 또 하나 묶어서 내려 보냈습니다. 두리번 거리는 아이의 눈 앞에 쿠키가 달랑 달랑 매달려 있습니다. 아이는 조심스레 쿠키를 손으로 잡더니, 잠시 그 쿠키를 쳐다 봅니다. 아이는 쿠키에 묶여 있는 실을 발견하고는 그 실을 따라 고개를 올립니다. 실을 따라 올라가던 그 아이의 눈은 결국 베란다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어머니를 보게 되고, 밝은 얼굴로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듭니다. 그리고 나서 아이는 쿠키를 입에 넣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 줍니다. 강아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즐기는 데 빨랐습니다. 누가 준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강아지에게는 관심 밖의 일입니다. 하지만 그 어린 아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살펴 볼 여유가 있었고, 즐기기 전에 감사할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인간됨입니다. 우리의 인간성이 마모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 돌아볼 줄 알고, 돌아보는 중에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 되고, 그것을 주신 분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는 실이 묶여 있습니다. 잘 보이지 않지만, 또한 조금 힘 주어 잡아채면 금새 떨어지지만, 조심하여 잘 살펴 보면, 우리가 손에 쥔 모든 것에는 실이 묶여져 있습니다. 그 실을 따라 고개를 올려 보면, 우리를 향해 웃고 계시는 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쿠키를 즐기는 데에만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즐기는 데에만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잠시만이라도, 자신의 삶을 찬찬이 돌아보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다움입니다. 우리 세대는 이 인간다움을 너무나 많이 잃어가고 있습니다.

5.

우리는 감사를 느끼는 일에도 무능할뿐 아니라, 감사를 표현하는 일에도 아주 서툽니다. 생각해 보면, 뿔뿔이 흩어져 간 아홉 명의 유대인들에게도 예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가족들을 먼저 만나 보고 나서 나중에 해도 될 일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무엇을 말합니까? 감사는, 나중으로 미루고 나면 좀처럼 하기 어렵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경험적 진실입니다. 미루면 미룰수록 감사는 더 하기 어렵고, 표현하지 않으면 그럴수록 감사의 마음은 더 메말라 갑니다.

인간의 본성이 이러한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문화적인 장애까지 짊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낯간지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마음만 있으면 되지 굳이 표현해야 하느냐?”라고 생각합니다. 고마움을 느껴도 안 그런척 행동하는 것을 미덕처럼 여겨왔습니다. 이 문화는 좀 개선될 필요가 있다 싶은데, 또한 개선되었어야 마땅한데,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자녀들에게서조차 그 문화의 영향을 보게 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 전, 딸 아이의 고등학교 Year Book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책의 뒷면에 백지가 몇 장 있는데, 친한 친구들 몇 명이 거기에 글을 써 놓았습니다. 흥미로운 구석이 있을 것 같아서, 딸 아이의 허락을 받아 그 내용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 중, 얼마 전에 이곳을 떠난 친구가 쓴 글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동안 네가 잘 대해 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그런데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못했어. 그랬다가는 10년 전에 먹은 것까지 다 토할 것 같아서 못했어. 이제나마 글로 내 마음을 표현한다. 고마워!”

하나님께 대한 감사, 부모님께 대한 감사, 자녀들에게 대한 감사, 배우자에게 대한 감사, 이웃에게 대한 감사, 교회에 대한 감사, 자연에 대한 감사?이 모든 감사는 낯 간지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 아직도 다 망가진 것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열 번에 한 번 정도이지만, 아직도 우리 내면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감사의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열에 아홉은 그냥 무덤덤이 지내다 보니, 열에 한 번 정도 감사를 표현하려면, 그것이 어색하고 낯 간지럽고 때로는 헛구역질까지 나게 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가슴 찡한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쓴 사람이 누구인지 찾을 수가 없어서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만,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일이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떠난 지 2주년이 되는 날이다. 어제는 아이들과 함께 아버지의 납골 묘에 다녀왔다. 조그마한 아버지의 사진을 보면서 늙어가는 나의 모습을 발견 하면서 2년전 그날의 일들이 내 머리를 스쳐갔다.

아버지와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살아계시는 동안 한 번도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해드리지 못했다. 언제나 마음속으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남자라는 이유로, 내성적이라는 이유로, 쑥스럽다는 이유로 그렇게도 하고 싶은 말을 못해 드렸다. 2년전, 그 날 저녁,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면서 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잡고 꼭 말을 해야지 하면서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속에서도 난 입을 열지 못했다. 아버지의 차가운 손만 꼭 잡고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흐르던 그때의 내 모습을 떠 올리면, 왜 그렇게 해드리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다.

어제 아버지의 사진 앞에서 조용히 속삭였다."아버지, 고맙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사랑합니다!" 또 다시 내 두 눈에는 벌써 눈물이 고이며 허전하고 아픈 가슴을 달랠 길이 없었다. 아버지의 사진은 아무런 응답도 없이 지긋이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너무나 늦게 해드린 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후회만 가득 하다.

아버지에게 못해드린 말을, 난 매일 내 아이들에게 해 준다. "오늘도 건강해서 고맙다, 너희들을 정말로 사랑한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고, 아버님을 위한 말이기도 하며,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언젠가 나도 아버지 곁으로 가는 날이 된다면 제일 먼저 꼭 할 것이 있다.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얼굴로 정말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6.

이 글을 읽고, 이번 기회에 저도 아버님께 “아버지, 사랑합니다”라는 말씀을 한 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그래도 많이 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한 번 해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막상 전화를 드려 그 말을 할 생각을 하니, 닭살이 돋고 마음이 울렁거리니, 어쩌면 좋습니까? 아버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제게 충분한데,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는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해 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하냐? 그런 줄 알고만 있으면 됐지!”라고 말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여기고 살아왔습니다만, 꼭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을 점차 깨달아 갑니다. ‘마음 없는 말’보다는 ‘말 없는 마음’이 더 중요하지만, 마음이 담긴 말 한 마디는 엄청난 힘을 가집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예민하게 감사를 느끼며, 그 감사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지옥같은 현실을 천국으로 바꾸어 주는 힘입니다.

이번 감사절에, 닭살 돋는 것을 참아 가면서, 구역질을 견뎌 가면서, 그 동안 감사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현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자녀와 부모 사이에, 배우자 사이에, 친구 사이에 혹은 교우 사이에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처음 말하거나 들을 때는 생뚱맞게 느껴지기는 하겠지만, 해 보십시다. 마음이 담긴 감사의 말 한 마디가 말하는 자신에게나 듣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한 번 경험해 보십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찾아와 감사를 드리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분이 말씀을 뒤집으면, 나머지 아홉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찾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은 구원을 받고, 뿔뿔이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간 아홉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을 병에서 치료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질병의 치유를 통해 하나님을 찾았고, 나머지 아홉은 질병의 치료는 받았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해도, 그 가진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방해한다면, 마침내 통곡할 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어려움을 만났다 해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참되게 만났다면, 기뻐할 일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고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분명한 ‘사귐의 증거’는 ‘감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과 사귀며 살아가게 되면, 우리의 마음에 있던 각질이 제거되고 여려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아주 작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게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감사는 더 큰 감사를 불러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의 습관에 잘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 습관을 통해 하나님을 뵐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감사가, 우리가 가진 것에 묶여 있는 실을 발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한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반면, 불평의 습관에 물든 사람은 아무리 영적 생활을 열심히 해도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 안에서 살아갈 가능성이 낮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불평 불만이 많다면, 그 사귐은 껍데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깊고 풍요로운 영성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불평 불만의 버릇부터 버려야 할 것입니다.

7.

감사, 그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별로 손해가 없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입니다. 감사는 진실로 복된 삶에 이르는 길입니다. 누군가, “감사는 백신이며, 제독제이며, 방부제다(Gratitude is a vaccine, an antitoxin, and an antiseptic)”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감사로 충만할 때, 불평 불만의 바이러스가 침범하지 못할 것이고,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생겨난 독소들을 제거해 줄 것이며, 또한 우리의 마음이 부패하지 않도록 도와 준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감사는 우리 삶의 기본 조건입니다.

감사 중에 가장 근본적인 감사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요, 그 다음이 부모님께 대한 감사요, 가족과 이웃에 대한 감사이며, 또한 교회에 대한 감사입니다. 일년에 한 번 감사절을 지키는 이유는, 링컨의 담화문에서 보는 것처럼, 바로 이 진리를 상기하자는 데 있습니다.

이번 감사절이, 우리 마음 속에 감사로 충만해지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감사절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감사의 마음을 한껏 표현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마음에 건강한 생명력이 충만해지기를, 그리하여 우리가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머물러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불평의 땅에 포로로 잡혀 살고 있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감사를 느끼기에 너무도 굳어버린 저희 마음을 녹여 주소서.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께 가까이 가게 하시고
감사의 마음으로 이웃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히게 하소서.
이번 감사절을 지나면서
저희 마음에 감사를 부흥시키소서.
감사로써
구원을 누리고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