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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1 (이현호 목사)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
빌립보서 4:10-14; 마가복음 9:33-37

1.

인생을 살면서 누리는 가장 큰 즐거움도 사람에게서 오고, 인생을 살면서 받는 가장 쓰라린 상처도 사람에게서 오는 것 같습니다. 진수성찬이 주는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이 그 음식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에게서 옵니다. 반면에, 일에 실패할 때에 느끼는 좌절감보다 사람에게 배신당할 때에 느끼는 아픔이 더 큽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더없는 기쁨을 선사하기도 하고 큰 아픔을 주기도 하는 이런 일은 특별히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빈번합니다. 부부간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친구나 친척 간에, 이웃들이나 교우들 간에, 어떤 때는 서로에게 더없이 큰 기쁨을 안겨주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상처를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에게 있어서 제자들이 그런 존재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에 함께 했던 예수의 제자들은 때로는 예수께 더없는 기쁨이기도 했고, 또 때로는 더없이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가버나움이라는 동네로 향할 때에 있었던 일도, ‘가룟유다의 배신’ 만큼이나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수의 마음을 무척이나 답답하게 만들었던 일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께서 비장한 심정으로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두 번씩이나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그분의 심정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관심은 이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접수하시고 그곳을 전초기지로 ‘다윗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시면 그들에게 돌아올 몫이 얼마나 될 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끼리 자주 다투는 문제가 자기들 중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물음의 이면에는 자신이 가장 큰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 물음은 지극히 ‘권력 지향적인 물음’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께서 세 번째로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직후, 제자들 중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를 따로 찾아뵈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는 두 제자가 직접 예수께 물었다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다투던 문제, 즉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하는 문제와 맥을 같이하는 청탁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당신의 메시야 사역을 완성하시면 자기 형제들을 예수의 두 팔로, 좌의정 우의정으로, 써 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라면 그런 제자들을 대하는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3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동안 동고동락했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타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한심하기 짝이 없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심정이셨지만, 예수는 그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줄 교훈을 놓치지 않습니다. 진짜 큰 사람, 진짜 힘을 지닌 사람은 겸손히 자기를 낮추고 먼저 남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2.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하는 물음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던져지는 질문이요, 어느 시대에나 멈춰지지 않고 끊임없이 던져지는 물음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타인과 경쟁하며 살아갑니다. 자기의 존재가치를 다른 사람과의 비교우위 속에서 찾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앞서고, 더 많이 소유하고, 더 유명하고, 더 강하고, 더 멋있어보여야 사는 보람을 느낍니다. 그제서야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자화자찬을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와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남들보다 더 커보이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역사’라는 교실에서 치러지는 인간들의 시험은 언제나 ‘상대평가’입니다. 특히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현대인들에게 “누가 큰 사람인가?” 하는 물음은 생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지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오래 전, 조부모가 미국에 정착하면서 시작된 이 가정의 이민생활은 참으로 고된 것이었습니다. 이 목사님도 LA 근교의 흑인 동네에서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잘 해서 훗날 예일과 프린스턴에서 학위를 받고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요직도 맡았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저를 만날 때마다 했던 얘기가 “I got a power!”였습니다. 아마도 어렵게 어렵게 인생의 고빗길을 넘어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당한 설움과 상처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무시당하지 않고 누구에게든지 당당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쥐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몸에 배어 왔지 않았나 싶습니다. 파워는 이분의 생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좀 큰소리도 치고, 권력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 앉아 “I got a power!”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역시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있는 파워를 원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전히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를 따지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들려오는 말씀이 바로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3)는 말씀입니다. 아,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기다려 왔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갖고 싶어하는 파워를 가질 묘안이 여기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것을 주십니다. 예수가 어떤 분입니까?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막 9:23)고 외치셨던 분이 아닙니까! 바울 사도의 확신에 찬 말씀처럼, 그분만 믿으면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그 말은 사실입니까?

이토록 자신에 넘쳐서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바울 사도는 이 말을 할 때에 로마의 한 감옥에 갇힌 수인(prisoner)의 신세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옥중에 있으면서 “크게 기뻐하였다”거나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는 말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 정도의 깊은 영성이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기쁨과 만족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영성이 깊다고 해도 로마 감옥의 한복판에서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도를 지나친 것 아닙니까? 그가 현실적으로 감옥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모든 것’은 커녕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처럼 큰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문이 열리면 몰라도(행 16:25 ff.), 철통같은 로마의 좁디 좁은 감옥 안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울의 이 말은 거짓입니까? 아니면 광신자의 무모한 확신입니까? 아니면 선교 전선에서 성공가도를 달려온 사람의 만용입니까?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이 말씀을,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만 믿으면 내가 원하는 일이 다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이 말씀은 거짓이거나, 무모한 확신이거나, 만용이 될 것입니다. 예수는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에서 대기하고 있는 ‘지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바울 사도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4.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외적인 조건에서 해결책을 찾습니다. 수입이 일정하거나 넉넉하면 가정이 안정되고 가족관계도 편안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파워를 행사할 만큼 높은 지위에 오르면 더 이상 무시, 설움, 상처로부터의 안전지대에 와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스케줄만 조금 느슨해지면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아이들이 대학에만 들어가면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운동으로 몸매를 가꾸고 성형을 하고나면 남들에게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말썽만 일으키는 아무개 집사만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교회가 더없이 평화로워질 것만 같습니다. 눈엣가시 같은 인간, 원수같은 인간이 당장 죽고 나면 세상에 더 이상 근심이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내 몸을 괴롭히는 이 질병만 극복하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옥에서 나가기만 하면 정말 착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책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면 국민들이 훨씬 더 행복해질 것 같습니다.

우리가 외적인 조건에서 찾는 해결책은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 우리에게 필요한 해결책이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소위, 말씀의 위력을 믿습니다. 하지만, 손 하나만 까딱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그런 신통한 능력 ?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이런 능력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를 믿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실제로 예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작은 도시락 하나로 수많은 이들을 먹이시고, 각종 질병을 치유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시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분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성전 꼭대기에서도 뛰어내리고, 십자가에서도 뛰어내려 세상을 한순간에 무력으로 평정하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습니다.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우리도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외치고 싶습니다.

5.

그러나 불행히도,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허락되는 능력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도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아니,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을 속수무책으로 그대로 남겨놓아야 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도, 가족관계도, 질병의 문제도, 직장의 문제도, 교회의 문제도, 사회적인 문제도, 지구촌의 문제도, 내게 능력 주시는 분께 아무리 매달리고 기도해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문제에 치이고 삶에 지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낙심하고 의심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을 주십니다. 그 능력은 ‘받아들임’(수용)의 능력입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감옥은 그가 원하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제 발로 걸어들어간 곳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나올 수 있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감옥은 기쁨으로 선택한 곳이 아니라 강제로 주어진 힘겹고도 슬픈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한참 주님을 위해 일해도 시원찮을 판에 왜 거기 그렇게 무력하게 갇혀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 조용히 그분을 생각하면서, 늘 자기보다 한발짝 더 먼저 가시는 그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바울은 감옥이라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니 기쁨도 만족도 그의 마음속에 찾아왔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이 기뻐할 수 있게 되니, 다른 이들에게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빌 4:5)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음에 평안을 누리니, 다른 이들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고 간구하라”(빌 4:6)고 자신있게 권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고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니, 어떤 것도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능력입니다. 능력을 주시는 분으로부터 받은 능력입니다.

6.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능력은 아닙니다. 그것은 파워에 기초한 능력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능력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도 능히 감당하는 능력입니다. 능히 감당함으로 능히 극복하는 능력입니다.

예수의 능력은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변화시키는 파워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묵묵히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 즉 ‘무력함의 능력’(powerless power)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역설입니다. 그러나 이 역설 속에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만큼 큰 역설이 또 어디 있습니까? 죽음으로써 사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역설이지만, ‘실현’되는 진리입니다. 낮아짐으로써 높아지고, 섬김으로써 섬김을 받듯이, 약해짐으로써 강해지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무력함의 능력입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스스로 걸어오셨습니다. 철저하게 능동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삶은 철저하게 수동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가룟사람 유다의 손에 의해 대제사장에게 “넘겨졌습니다”(마 26:14, 48). ‘넘겨지고’ ‘끌려가신’ 예수는 결국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삶, 자신이 원치 않는 삶을 산 것입니다. 수동적이고, 약하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생의 마지막을 사셨습니다. 예수의 돌무덤은 그분의 무력함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 돌무덤에서 인류의 새로운 역사, 인류를 변화시키는 역사, 부활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수동적이고, 연약하고, 무력하게 생을 마감하신 까닭은 그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에서 그분은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세 번에 걸쳐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마 26:39, 42, 44).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는 기도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설령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그것까지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원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러나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시니, 삶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실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보여주신 용서의 능력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실로,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심으로, 모든 것을 이루게 되었습니다(요 19:30, “다 이루었다!”).

7.

받아들임의 영성, 약함의 영성, 무력함의 영성은 현실도피주의나 패배주의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비겁하게 현실을 비껴가려는 것도 아니고, 노예근성으로 그저 주어지는 대로 살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를 본받아 그분이 실현하신 역설의 진리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떠한 상황이 닥쳐와도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겹고, 아무리 이해 못할 상황이라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면 넉넉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받아들일수 있으니 인내할 수 있습니다. 인내할 수 있으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감당할 수 있으니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이해 못할 사람, 용서 못할 사람이라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면 넉넉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받아들일 수 있으니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으니 화해할 수 있습니다. 화해할 수 있으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능력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능력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입니다. 우리를 유명하게 만들고, 부유하게 만들고, 강하게 만드는 능력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를 참되게하고 행복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8.

돌이켜보니, 저의 살아온 지난날들이 강물과 인연이 깊었습니다. 첫 목회지인 철원에서는 한탄강의 우렁찬 물소리가 좋았고, 군목시절 포천에서는 일동천의 차가운 물에 발을 담구는 맛이 있었습니다. 강릉에서는 아침마다 피워내는 남대천의 물안개가 신비로웠고, 서울에서는 새벽기도 후 아내와 한강변을 따라 여의도까지 거니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새크라멘토에서도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아메리칸 리버가 있어서 기도하며 묵상하며 그 강변을 참 많이도 거닐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와보니 포토맥강이 있습니다. 마치 강물이 저의 인생을 휘감으며 굽이굽이 돌아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강가를 거닐면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항상 제 마음속에 깊은 감동이 전해집니다. 강물은 누가 뭐래도 그저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소리 없이 제 길을 흘러갑니다. 강물은 제 여정에 무엇이 동행하든지 그저 마다하지 않고 함께 갑니다. 어느 산골짜기 시냇물이 “같이 가자~”하면 같이 가고,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도 “동행하자~” 하면 동행합니다. 물고기가 몸을 맡기면 그놈을 싣고 갑니다. 쪽배가 제 위에 얹어지면 쪽배와 함께, 낙엽이 떨어지면 낙엽과 함께, 쓰레기가 던져지면 쓰레기와 함께 … 그렇게 제게 오는 모든 것을 품고 갑니다.

강물은 억지로 길을 뚫고 가지도 않습니다. 자기를 막는 것을 탓하는 법이 없이 막히면 막히는 대로 굽이굽이 돌아갑니다. 굽이굽이 돌아가지만, 아니 그렇게 돌아가기에 결코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멈추지 않고 가기에 강물은 역사(歷史)가 됩니다.

강물은 제 길을 잃는 법도 없습니다. 굽이굽이 돌고 돌지만 결코 제 길을 망각하지 않고 끝내 바다의 품에 이릅니다. 거기서, 모든 다른 강물들과 만나 한 몸이 됩니다. 어머니의 품안에서 모든 자녀들이 하나이듯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 인류가 하나이듯이….

강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의 상징입니다. 누구도 마다하지 않고 품으면서, 아무도 탓하지 않고 굽이굽이 돌아가면서, 약한 듯 강하게 제 갈 길을 멈추지 않으면서, 끝내 목적지에 다다릅니다. 누구도 마다하지 않고, 아무도 탓하지 않고, 한순간도 멈추지 않기에, 강물은 점점 더 넓어집니다. 넓어지는 만큼 더 힘차고 편안하고 풍성해집니다. 이것이 받아들임의 능력입니다.

9.

예수께서는 우리의 욕심을 채워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욕심을 비워주십니다. 욕심에 기초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욕심을 비워낸 자리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도록 해주심으로, 어떤 일이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감당하도록 해 주십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일을 당하든지 인내하고 감사할 수 있으며, 누구를 만나든지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의 평정도, 삶의 평화도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참다운 능력입니다. 이것이 오래 지속되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약함으로 강함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허락되는 은총입니다. 아멘-.

가난해지심으로 부유해지신 주님,
섬기심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주님,
낮아지심으로 높아지신 주님,
죽으심으로 죽임의 세력을 이기신 주님,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소서.
당신의 능력에 힘입어,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힘겨운 일은 힘겨운 일대로, 쉽지 않은 사람은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받아들임으로 극복하게 하소서.
극복함으로 행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