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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 Home | audio한국어 영어 고속 저속

2007.10.7(김영봉 목사)

요한복음 연속설교: 생명의 복음(87)
“이길 것을 믿기에”
(Because We Have Won the Battle…)
요한복음 16:8-11; 마가복음 3:20-27

1.

‘사탄’, 혹은 ‘악령’, 혹은 ‘마귀’, 혹은 ‘귀신’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마치, 잊혀진 전설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가지는 분이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니, 이 개명 천지에 아직도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라고 묻고 싶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영적 존재를 경험해 보지 못했으며, 그런 영적 존재를 전제를 하지 않아도 이 세상의 현상은 얼마든지 설명 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그런 영적 존재가 있다 해도, 그것들은 정신 병원에서나 활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점쟁이와 무당들 사이에나 활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성과 과학으로 무장된 현대인들은 그런 것을 인정하기도 어렵고 인정하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현대인들의 이러한 경향들을 생각하면, 마땅히 귀신의 세계에서 살아가며 활동하고 있는 점쟁이와 영매와 무당들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야 마땅해 보입니다. 그런데 실은 그 반대라는 점이 우리의 생각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박정희 개발 시대에 가장 치중했던 것이 미신 타파였습니다. 학교에서는 점쟁이나 무당들을 찾아가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열심히 가르쳤고, 정부에서는 그런 것들을 억압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점을 치고 굿을 하는 것에 대해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생각으로는, 그런 일들이 머지 않아 사라져 버릴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반 세기가 지난 지금, 한국에서는 점쟁이와 무당이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뉴스에 보니, 대기업들의 사옥을 지을 때, 거의 예외 없이, 점술가들을 찾아가 명당을 찾고, 풍수를 따라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을 시작하면서 돼지 머리 앞에서 고사를 지내고, 중요한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점쟁이에게 가서 그 사업의 미래를 점친다고 합니다. 주요 대기업의 총수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최고의 학문과 경험으로 무장된 학자가 아니라 용하다는 점술가라고 합니다. 정치인들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몇 년 전, 한국산 인공 위성을 발사하기 전, 거기에 참여했던 최첨단 과학자들이 돼지 머리를 앞에 두고 성공적인 발사를 위해 고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국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낼 수 있다고 하는 영매(Psychic Medium)들이 TV에서 활개치며 활동하고 있고, 그들이 인도하는 Talk Show는 가장 인기있는 방송 하나가 되었습니다. 제가 뉴저지에 살 때, TV show로 유명한 영매 존 에드워드(John Edward, 민주당 대통령 후보 John Edwards와 다른 사람입니다)가 자신의 신간 서적을 기념하여, 제가 살던 지역의 Borders라는 서점에서 사인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날, 서점이 문을 열기 수 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몰려 장사진을 치고, 서점 영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고, 저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2.

이 모든 현상들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상하게도, 현대인들은 아무런 영적 존재도 믿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도, 현대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사탄 이야기에 대해서는 신화나 전설처럼 취급하면서, 점쟁이나 무당들이 하는 말에 대해서는 귀를 종끗 세우는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도, 현대인들은 매우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것 같으면서도, 실은 과거 사람들보다 더 비이성적이고 더 비과학적인 행동을 종종 하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아무 것도 믿지 않는, 독립적이고 강한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마음 속에서는 무엇인가 의지할 초월적인 존재를 찾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른 누구의 이야기처럼 들리십니까? 혹시 당신이 그들 중 하나가 아닌지,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현대인들 다수가 믿고 있는 이 믿음을 ‘과학적 세계관’이라고 부릅시다. 실은, 진짜 과학자들이 볼 때 허점 투성이 과학이지만, 현대인들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믿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은 우연하게 시작하여 지금처럼 진화되었고, 진화 과정에서 이 세상은 나름대로의 법칙을 얻어 그 법칙에 따라 움직여지고 있으며, 인간은 그 안에서 나름대로 노력하여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독립적인 존재라고 믿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물질로 되어 있으며, 모든 현상은 물질과 물질 사이에서 일어나는 결과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세상은 언젠가 우연히 소멸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뭐, 그렇게 믿을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믿은들 무슨 대수인가?”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실은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이 우리의 삶의 태도와 방법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모든 것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계의 운행에도, 인간의 생명에도, 어떤 목적이나 방향이 없다고 믿습니다. 모든 것이 우연과 사고의 연속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운명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유일한 목적은 어떻게든 가장 행복하게 살다 가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물질만이 전부이고, 육신만이 전부이며, 이 세상만이 현실이며,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 보입니다. 어떻게든 물질의 힘만 키우면,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끔, 마음 깊은 곳에서는 “혹시 이 믿음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혹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면 어찌될까? 혹시 영적인, 초월적인 존재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나는 어떻게 하나?”라는 의문을 가져 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믿고 자신감에 차서 행동하다가 만사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이런 의혹은 더 커집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과학적인 세계관을 포기하고, 마음 속에서 의혹을 가지고 있던 그 세계관으로 갑자기 눈을 돌립니다. 병원을 전전하다가 되지 않으면 결국 무당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세상은 우연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적 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혹은 무엇인가에 의해 지배되고 있지 않는지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그 영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를 달랠 방도를 찾습니다. 그 세력과 교통하여 자신의 뜻을 전달할 방도를 찾습니다. 혹은 그 초월적 존재의 환심을 사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 볼 꿈을 꿉니다.

이 믿음은 과연 옳습니까? 과연 점쟁이들과 무당들이 선전하는 세계관이 옳습니까? 이 세상은 악한 귀신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인간은 귀신의 지배 하에 있어 어쩔 수 없이 팔자 소관에 따라 숙명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복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귀신의 호의를 사야 한다는 믿음이 과연 옳습니까? 다급한 김에 점쟁이를 찾고 무당을 찾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심지어는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다급해지면 점쟁이를 찾고, 혹시나 싶어 아침 신문에 나와 있는 ‘오늘의 운세’를 읽습니다. 자기 것만 아니라 남편 것과 아이들 것까지 다 읽고는, 뭔가 심상치 않다 싶으면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오늘, 퇴근할 때 차 놔 두고 전철 타고 와, 알았지?”

3.

저는 오늘까지 지난 3 주일 동안 요한복음 16장 8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연속해서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할 때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진리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세 가지 진리가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라는 진리요, 둘째는 ‘십자가의 의가 아니고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로와질 수 없다’는 진리이며, 셋째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진리입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진리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11절의 말씀입니다. “심판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심판을 받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현재 완료 시제(present perfect tense)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 완료 시제는 과거에 어떤 일이 한 번 일어난 다음 현재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경우에 사용하는 시제입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가 이미 결박 당했고, 그 영향이 앞으로 오는 세대에 미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 세상의 통치자’는 누구를 말합니까? 로마 황제를 말합니까? 팔레스틴 땅에서 전권을 행사하던 로마 총독을 말합니까? 아니면, 로마 황실의 후원 아래 유대인들을 다스리고 있던 헤롯 가문의 왕들을 말합니까? 만일 ‘이 세상의 통치자’가 이들을 가리킨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권좌에 앉아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가리킵니까? 영적인 통치자, 흔히 사탄이라고 부르는 그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악한 영들을 조종하는 사탄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가 지금까지 이 세상을 장악하고 폭행을 부려 왔는데, 지금은 그 통치자가 심판을 받아 결박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님도 우리의 세계가 물질만으로 되어 있다고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현실이 우리의 세계 안에 있다고 믿으십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세계가 영적인 세계 안에 있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이라는 존재가 있으며, 그가 악한 영들을 조종하고 있으며, 이 세상의 통치자처럼 행세하고 있음을 전제하십니다. 예수께서 보실 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마치 반역자에게 탈취당한 나라와 같은 형편에 있습니다. 그 반역자는 선정을 베풀고 있던 왕으로부터 나라를 잠시 동안 탈취하여 백성들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 억압하고 착취하며, 자신에게 복종하고 협조하는 사람들에게만 호의를 베풉니다. 그 반역자의 호의를 입으려면, 그를 보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뇌물을 바치고 아첨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악한 영적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악한 영적 존재가 이미 심판을 당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 세상을 약탈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악한 영들의 노예로 만들었던 사탄이 이미 심판을 받아 결박 당했으며, 지금도 그 상태가 변하지 않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다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의 이야기를 기억나게 합니다. 마가복음 3장 20-27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이 병든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을 치료하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헐뜯습니다. 사탄과 협잡하여 귀신을 내어쫓고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사탄이 이 세상의 주인으로 행세하고 있는 한, 사탄의 하수인인 귀신 즉 악한 영을 추방할 수 있는 것은 그 우두머리인 사탄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털어가려면, 먼저 그 집 주인을 결박시켜야 가능하지 않느냐? 이것처럼, 내가 악한 영들을 쫓아 내는 것은 그 주인인 사탄을 결박시켰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여기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악한 통치자가 이미 심판을 받아 결박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말씀 한 마디로 그 하수인들인 악한 영들을 추방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미 적군의 대장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적군의 작전 본부가 이미 파괴되었습니다. 적군의 병사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여전히 도발을 감행해 옵니다. 하지만 작전 본부로부터 고립된 병사들은 더 이상 적이 되지 못합니다. 악한 영들의 상태가 마치 이와 같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탄의 왕국이 파괴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자리잡지 못한 곳에서는 여전히 악한 영들이 발호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16장 11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같은 영적 현실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는 이 영적 현실을 보게 될 것이며 확인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4.

오늘,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제시하시는 세계관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받아들여 믿고 있는 과학적 세계관과 점쟁이나 무당들이 믿고 있는 미신적 세계관에 비해, 예수님이 제시하는 세계관이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성령과의 깊은 사귐에 들어가, 믿지 않을 때는 거짓말 같고 신화 같지만 믿고 나면 엄연한 영적 현실인 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떠 보시지 않겠습니까?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즉 성령의 감화와 감동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성령에 의해 새로와진 사람에게는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실로, 그렇습니다. 성령과의 깊은 사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물질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세상으로 보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하나님의 성령이 전존재를 압도하는 체험을 한 사람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그들은 하나같이 첫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치를 떨며 회개하고,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였으며, 셋째, 이런 경험을 하고 나서 눈을 떴을 때, 산천 초목이 살아 움직이며 춤을 추는 것 같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현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면, 과거에 믿고 살았던 세계관이 얼마나 축소된 것인지를 알게 되고, 그 축소된 세계관 속에서 살다 죽었다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과의 깊은 사귐 속에 살면서 때때로 ‘거룩한 순간’의 경험을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불현듯,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나의 삶을 붙들고 있다는 자각 속에서 소름 끼치도록 경외심에 사로잡히는 경험을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성령과의 사귐에 힘쓰면서, 주의 깊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 보면, 문득 문득,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손가락’이 눈에 보이곤 합니다.

얼마 전의 일입니다. 제 사무실에서 이런 저런 일들을 처리하고 있는 중에, 원로 장로님 한 분이 우연히 교회에 들렀다가 제 방문을 두드리셨습니다. 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들어 오시라고 청했습니다. 마주 앉아 잠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장로님께서는 당신의 생활비에서 얼마간 절약하여 매년 장학금 기금을 만들테니, 목사님 생각에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 싶으면 알아서 도와 주라고 부탁을 하시는 겁니다. 저는, 장로님의 뜻을 잘 받들겠다고 말씀드리고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제 책상으로 돌아와 하던 일을 다시 계속하려 했습니다. 그 때 제 책상에는 아직 뜯지 않은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습니다. 열어 보니, 펜실베니아의 한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청년이 쓴 사연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갑자기 가정 형편이 기울어 1년간 휴학을 하고는 와싱톤 DC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돈을 모아 복학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지난 학기에 다 내지 못한 등록금 때문에 새 학기 등록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답니다. 지금 수중에 있는 돈은 새 학기 등록금 밖에 없는데,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갑자기 3천 달러가 넘는 돈을 또 구해야 했습니다. 그 청년은 이 문제를 두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방도를 찾는데, 문득 와싱톤 DC에서 일하는 동안 설교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저와 와싱톤한인교회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청년은 왠지 그 교회라면 도와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편지를 읽는 순간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려운 사람들로부터 혹은 선교사들로부터 도움을 청하는 편지가 얼마나 많이 오는지요! 참으로 미안하고 마음 아프지만, 대부분 외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들의 사정을 다 알 수도 없고, 도와 달라는 대로 다 도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방금 장로님과 나눈 대화를 생각해 보니,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지금 성령께서 저와 그 장로님과 그 청년을 신비로운 방법으로 만나게 하고 계심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털끝 만큼의 의심도 없이 그 장로님이 기부하신 기금으로부터 그 청년이 필요한 만큼의 장학금을 학교로 직접 보냈고, 그 청년은 학교로부터 날아온 기쁜 소식을 듣고, 며칠 후 감사의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제가 단순한 우연의 사건을 비약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식의 이야기를 말하라면, 제게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 모든 사건들을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저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세상으로 보게 됩니다. 이런 신비로운 세상 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재미 있는지요! 제 영성이 부족하여 항상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뿐입니다. 제 영성이 더 깊어진다면, 저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더 깊은 신비를 맛보며 살게 될 것입니다.

5.

여러분 중에는 이미 그렇게 믿고 살아 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육신의 눈만으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고 계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의 형편이 그렇게 믿는사람다운지, 여러분 자신을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세상을 사는 사람처럼, 그리고 사탄과 악한 영들이 이미 심판받고 결박 당했음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그리고 십자가 처형을 목전에 두고서도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제자처럼, 그렇게 살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나,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의 패잔병들 앞에서 두려워 떨며 무력하게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분들은 없습니까? 여러분으로 하여금 “나는 이제 졌다. 내가 이길 길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입니까? 마음의 병입니까? 육신의 질병입니까? 관계의 문제입니까? 도대체 나아지지 않는 경제적 상황입니까?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자녀입니까? 포기하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어 보이는 남편입니까? 철 없는 아내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스스로 지쳐서 항복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 앞에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과 깨달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마치 항생제를 손에 든 감기 환자처럼, “이제는 이긴 싸움이다!”라는 든든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겪어야 할 어려움과 아픔이 있습니다. 때로, 지칠 정도로 어려움이 오래 지속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 내 삶이 악한 영에게 포로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힘겨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한, 싸움은 이미 이긴 겁니다. 더 이상 우연은 없습니다. 더 이상 요행도 없습니다. 더 이상 숙명도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사는 한, 실패가 끝이 아니며, 죽음도 파국이 아니며, 우연처럼 보이는 일에도 필경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어떠한 역경에서도 성령과의 깊은 교제가 있는 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내가 이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과의 깊은 사귐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육신의 죽음이 어찌할 수 없는 참된 생명 안에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의 눈을 떠서
영적 현실을 보게 하소서.
손에 만져지는 것만 셈하지 않게 하소서.
눈 질끈 감고 도피하지 않게 하소서.
성령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 세계 안에서
담대하게 살아가도록 도우소서.
이미 이긴 싸움임을 믿고
인생의 모든 도전들을 마주하게 하소서.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써
저희도 세상을 이기도록 도우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