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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9.30(김영봉 목사)
요한복음 연속설교: 생명의 복음(86)
"십자가는 살아있다"
(The Cross Is Alive!)
요한복음 16:8-10; 로마서 3:21-26
1.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주 묻는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왜 꼭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평생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선하게 산 사람이라면, 구원 받을 만 하지 않습니까? 평생 나쁜 짓만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그 사람은 천국에 가고, 평생 선하게 산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해서 지옥에 간다면, 그처럼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아주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정당해 보이는 지적이요 질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심판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선행과 악행을 기준으로 한 사람의 구원과 멸망을 판정한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합격선과
불 합격선을 어떻게 정하겠습니까? 그 사람에게는 분명히 악행과 선행이 복합되어 있을 텐데,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신이 신(God)처럼 마음의 중심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 사람이 선행을 쌓으면서 그 마음에 가지고
있던 불순한 의도와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혹은 그 사람이 악행을 하면서도, 마음 안에 담고 있던 의로운 삶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신은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한 사람을 죄인으로 혹은 의인으로 판정하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면, 겉으로 드러난 선행과 악행으로 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매일같이 범죄자들의 얼굴을 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그 사람이 다른 모든 면에서도 죄인인 것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아주 훌륭해 보이는 사람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추악한 죄인일 수 있고, 모두 다 손가락질 하는
악한 사람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비교적 좋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겉과 속을 함께 보지 않고는,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보지 않고는, 그리고 그 사람이 일평생 행한 선행과 악행을 다 보지 않고는, 결코 그 사람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2.
요즈음, 한국에서는 어우동과 황진이 이후의 최고의 스캔들이라고들 말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신문을 펴든, 인터넷을
열든,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이 그 여인의 이름입니다. 여론은 그 여인을 마치 악녀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습니다. 아직
그 전모가 다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문제가 적지 않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행적만으로도, 대단히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뉴스를 따라가는 중에 저는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불교계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여인이
불교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대문구 봉원동에 있는 어느 교회에 출근길에 자주 들러 예배당에서 홀로 기도하다가 가곤 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기독교인인지 불교인인지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기사를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일 그 여인이 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치밀한 계산과 조작을 통해 입신출세를 위해 분투했던 사람이라면,
종종 예배당에 들러 기도하고, 때로는 헌금까지 놓고 간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이 계획하는 부정한 음모를 성사시켜 달라고
기도했을까요? 오히려, 그렇게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고 있었던 내적인 번민을 누구에겐가 내려놓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 여인이 진실하지 않았을까요?
지금 저는, 우리가 인간적으로 판단하는 ‘죄’와 ‘의’ 혹은 ‘악’과 ‘선’의 차이가 얼마나 믿기 어려운 것인지를
따지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라고 해도, 그 사람에게는 여전히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다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고매한 성인이라고 칭찬받는다 하더라도, 그 사람 안에는 여전히 부정한 것을 탐하는 은밀한 죄가 있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으로는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중심을 본다면 별 차이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선행과 악행을 구원과 멸망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얼른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합리적이고
공정한 것이 아닙니다.
3.
이렇게 대답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단박에 이렇게 되묻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과연 정당합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시키고, 예수 믿지 않으면 멸망시킨다면, 그것처럼 부당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부당합니다. "선행과 악행의 정도를 기준으로 삼을 수 없으니, 그럼 그 대신 예수 믿는 것을
기준으로 하자"고 말하는 것은, 마치 대학 입학자를 결정하는 데 성적을 기준으로 하기 어려우니 키 순서대로
하자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일입니다. 키가 큰 것과 작은 것이 대학 입학의 자격과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것처럼, 예수 믿는 것이 구원받는 데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선행이 2% 부족하여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하면, 안타깝고 억울하지만 그래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네가
예수를 믿지 않았으니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하면, 정말 억울할 것 같습니다. 그럴 것 같지 않습니까?
전혀 억울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자신들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당연히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은 다 정당해 보이는 법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하면, 이건 정말 부당해
보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아니, 당신, 제 정신이요? 목사가 그게 할 말이요? 예수 믿는 것이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없다니요? 목회를 그만 하고 싶소?"라고 걱정하실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면허증을
따거나 입장권을 사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천국 문에서 누군가가 지키고 있다가, 예수 믿는 ‘증’(certificate)을
보여주면 입장시키고, 그 증이 없으면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기
원하십니다. 대학에는 정원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정원이 없습니다. 모든 심사는 떨어뜨릴 것을 결정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떨어뜨릴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16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 이유는 ‘누구나’,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에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 읽어드린 로마서 3장 23절에서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에 빠져 있었으므로, 모두 멸망될 상황에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선행을 쌓아 보아야, 그것이 상황을 바꾸어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딱하게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롬 3:22).
다시 말씀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어떤 조건을 채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민
구원의 손길을 잡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마치 홍수 물에 떠밀려 내려가 죽을 위기에 있는 사람이 헬리콥터에서
내려 준 사다리에 올라타는 일과 같습니다. 사다리에 매달리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홍수가 다 지나고 나서,
사다리에 매달린 사람과 매달리지 않은 사람을 구별한 다음, 매달린 사람은 구해주고 매달리지 않은 사람은 탈락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다리에 매달리는 것 자체가 구원입니다. 구조대는 홍수 물에 휩쓸린 사람들을 모두 구해
주려 합니다. 누구든, 구조대의 손길을 덥석 잡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그 손길을 끝내 뿌리치는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뻗은 구조의 손길을 잡는 행동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높은 기준을 가지고 마지막 심판대에서 모든 사람을 심사하여,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또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판정하는 분이 아닙니다. 혹은,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예수 믿는 ‘증’을 검사하여 구원과 멸망을
결정하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 하십니다. 그 의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피와 물을 다 쏟으심으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 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롬 3:2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하늘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비참한 종말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여신 것이었습니다. 죄의 홍수 물 가운데서 솟아날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아무리 많은 선행을 쌓아도 하나님의 기준에 맞을 만큼 의로워질 수 없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써 하나님의 의를 덧입고, 그 의를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아무리 높이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도, 이 길 앞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아도, 이 길 앞에서는 동일합니다. 우리의 외양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며,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용서를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써 의롭다
함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앞에 설 담력을 얻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기댈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내세울만한 어떤 의가 있습니까? 죄송합니다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혹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까? 자신을 돌아볼 때, 오직 허물과 죄밖에 보이지 않습니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는 그것도 아무런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편의 한 구절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도 입김에 지나지 아니하고, 신분이 높은 사람도 속임수에 지나지 아니하니,
그들을 모두 다 저울에 올려놓아도 입김보다 가벼울 것이다"(시 62:9). 실로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찾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덧입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댈 뿐입니다.
5.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심화시키는 데 있어서 어려운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기독교 신앙은 자연 법칙에
의존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연 법칙을 초월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능력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해 동물을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장은 그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그래야 제사 드리는 사람의 죄가 그 동물에게 전가되고, 그 동물이 죽을 때 제사 드리는 사람의 죄도
함께 없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자연 법칙이 아닙니다. 자연 법칙에 따르면, 동물의 죄는 동물의 것이고, 사람의
죄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 법칙에 따르면 제사란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십자가에서 그분이 흘린 피가 우리의 죄를 대신 속한다는 것은 자연 법칙이
아닙니다. 모두 다 사이비과학자가 되어버린 현대인들, 그 중 대부분은 ‘과학 숭배자’가 된 현대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원리는 자연 법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
조치요, 하나님의 전권적인 약속과 능력 때문에 효력을 발휘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우리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에 근거하여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십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심화시키기 어려운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많은 경우, 생각해서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여 터득하고 깨닫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주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기독교의 진리는 논리를
초월할 때도 많습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설득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논리 숭배자’들에게 기독교
진리는 어렵습니다. 실은, 자신만의 논리가 얼마나 허점투성이인지, 얼마나 비좁은 틀 안에 갇혀 있는 것인지를 알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논리로써 모든 것을 걸려 내려 합니다. 기독교 진리는 그 좁은 논리로는 결코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믿고 순종하고 실천할 때 그 진면목을 드러냅니다. 생각만 해 가지고는 모순투성이인 것처럼 보이는 가르침들이
실천할 때 그 능력을 드러냅니다. 생각만 해 가지고는 전혀 될 것 같지 않던 가르침들이 우직하게 믿고 그대로 순종할
때 참 모습을 드러냅니다. ‘십자가의 도’(the Truth of the Cross)가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진리를 머리로 이해하여 수긍할 길은 없습니다. 사실, 기독교의 진리 가운데 말로
혹은 논리로 설명하기 가장 어려운 주제가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이 진리는 자연 법칙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논리를 초월해 존재하는 영적 세계를 믿고, 복음이 요청하는 대로 십자가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할 때, 생명의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온 몸을 감싸는 듯한 용서의 은혜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문득 나를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음성을 들어 보셨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고 찬양하는 중에,
그것이 나무나 철로 만든 구조물이 아니라, 영적인 실체로서 살아 꿈틀 거리는 것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십자가 앞에
나와 겸손히 낮아져 기도할 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평강과 위로를 맛보신 일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숨겨두고 있던 죄를 고발하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 보셨습니까? 십자가 아래서 겸손히 기도할 때,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완전한 의가 자신의 존재 전체를 덮어씌우는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이것을
자연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것을 논리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십자가로 나아가십시다.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로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따라 십자가로 나아가십시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자연 법칙에 대한 우리의 무한 신뢰(unlimited trust)를
잠시 거둡시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논리에 대한 우리의 무한 신뢰를 잠깐 거두십시다. 잠시만, 자연 법칙은 창조주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며, 자연 법칙에는 우리가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으며, 지금 우리가 아는 자연 법칙이
다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이 있음을 인정하십시다. 잠시만, 내 이성과 논리로 단정했다가 낭패를 보았던 경험을 기억하고,
논리를 내려놓고 복음의 요청에 순종해 보십시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그 앞에 엎드리십시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그 그늘 아래로 들어가십시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용서의 능력이며, 성결의 능력이고, 의의 능력이며,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능력을 체험하려면,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죄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때,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 우리를 감쌀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빛나는 의의 옷을 입혀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옷을 두르고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확인할 때, 우리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완전한 거룩성에 전율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완전한 의, 완전한 거룩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 초청을 전합니다. 성령께서 지금 여러분 각자의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앞으로
나오라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꿀라고! 아니, 이미 오래 전부터 성령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려 오셨습니다. 여러분이
듣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하여, 여러분의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부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응답을 미룰수록 손해는 여러분에게 돌아갑니다. 오늘, 결심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내 존재 전체를
떠밀고 내려가는 죄의 홍수 가운데 있음을 깨닫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구원의 사다리에 몸을 맡기지 않겠습니까? "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가 주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저를 받아 주시고, 저를 다스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미 이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신 분들에게도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한 번 체험하고 나서 천당
가는 티켓을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숨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며 품고 또한 지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묵상하고, 십자가를 품어 안고, 또한 십자가를 짊어지십시다. 십자가와
내 존재가 떼려야 뗄 수 없이 하나가 되게 하십시다. 십자가의 능력이 나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죄의
유혹에서 나를 지켜 줄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내 상처를 치유해 줄 것이며, 아픔을 위로해 줄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내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을 향해 나아가도록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나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살아있습니다.
오, 주님,
저희가 ‘과학 종교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희가 ‘논리 신봉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우상 숭배로 인해
십자가가 가려졌습니다.
주님,
저희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소서.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그 앞에 나아가 엎드릴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그 능력으로써
세상을 이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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