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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 Home | audio한국어 영어 고속 저속

2007.9.23(김영봉 목사)

요한복음 연속설교: 생명의 복음(85)
“그것도 죄가 됩니까?”(Is That a Sin, Too?)
--요한복음 16:8-9; 누가복음 5:1-9

1.

어느 청년에게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아 본 일이 있습니다. “목사님, 야동을 보는 것도 죄가 되나요?”

'야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야한 동영상’의 약자입니다. 야한 동영상이 무엇인지 모르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등급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저질스러운, 욕정을 자극시키는 영상물을 가리킵니다. 그런 것이 요즈음은 너무도 쉽게, 너무도 많이 유포되고 있습니다. 컴퓨터에 익숙해지는 순간, 가장 먼저 싸움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수 없는 사람들이 이것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이 중독은 건강한 정신과 영혼을 파괴시키고, 건강한 부부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런데도 이 심각한 질병은 갈수록 더욱 번성해지기만 하고 있고, 이에 대한 인간의 저항력은 갈수록 약해져만 가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는 야동에 관한 한 면역결핍증(immunodeficiency)에 걸린 것처럼 무력합니다.

야동에 관해 설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 관심은 “그것도 죄가 됩니까?”라는 그 청년의 질문에 있습니다. 그 청년이 그렇게 물은 이유는,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느냐고 놀라실 분이 계시겠습니다만, 인간의 두뇌는 생각보다 명석해서, 진리가 아닌 것도 논리를 사용하여 진리처럼 둔갑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더 타락해 있어서, 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던 일에 어느 정도의 정당성만 주어지면, 모른 척 하고 따라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동을 보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며, 그것을 통해 엉킨 감정을 해소시키면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겁니다. 좀 더 깊이 파헤쳐 보면, 야동의 생산과 보급으로 인해 엄청난 해악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야동을 본다고 해서 인간의 정서가 승화되거나 순화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논리가 귀에 솔깃 해집니다. 한 편으로 그것이 가책이 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그 논리를 질끈 믿고 즐기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다 보면, 마음 한 편에서는 “아니야, 그래도 그건 죄야!”라는 음성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믿음을 가진 어린 청년들에게 얼마나 고민이 되겠습니까? 꼭 나이가 많다고 해서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씀입니다.

"그것도 죄가 됩니까?”라는 질문은 믿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질문입니다. 학위를 속였다고 죄가 됩니까? 이혼이 죄가 됩니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죄가 됩니까? 주일에 가게를 여는 것이 죄가 됩니까? 내 가게에서 포르노 잡지를 파는 것이 죕니까? 동성연애가 죕니까? 선의 거짓말도 죄가 됩니까?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이 죄가 됩니까? 성형수술 하는 것이 죕니까? 임신 중절이 죕니까? 계속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2.

“그것도 죄가 됩니까?” 여러분, 이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심사가 있습니다. 이렇게 묻는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언급한 그것이 죄가 아니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합니다. ‘죄’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것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되면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집단 무의식 안에는 죄에 대한 심판을 두려워 하는 본능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름을 달고 싶어 합니다.

사실은 이것이 우리 세속 문화의 집요한 고집입니다. 서구 문화는 기독교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죄’와 ‘죄에 대한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꼭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무의식 중에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라는 용어를 어떻게든 추방시키려 합니다. 죄라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이 ‘이름 다시 짓기’(renaming)입니다.

임신 중절을 ‘선택’(choice)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살인을 ‘자기 방어’(self-defense)라고 부릅니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고 싶은 탐욕을 ‘선의의 경쟁’이라고 부릅니다. 음란을 ‘자기 표현’(self-expression)이라고 부릅니다. ‘탐욕’을 ‘비전’ 혹은 ‘소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불륜’을 ‘생애 처음 찾아오는 참된 사랑’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권리’의 이름으로 ‘희생과 헌신’의 요청을 거부합니다. ‘허영’을 ‘패션 감각’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자랑’을 ‘PR’이라고 이름짓습니다. ‘노후 대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한 없이 물질을 쌓아둡니다.

이렇듯, 세상은 어떻게든 죄라는 말을 피할 뿐 아니라, 그 원인에 대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도 사소하게 취급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고 부르는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정상’도 없고 ‘비정상’도 없는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더 이상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어진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것은 더 이상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에서의 선택이 아니라, 나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서의 선택만이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선택의 유일한 기준은 “나에게 좋으냐 나쁘냐?”에 있습니다. 다 각기, 자기 좋은 대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 이런 시대에 사는 청년이 아직도 죄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실은, 기적같은 일입니다. 이런 사회, 이런 시대에 사는 청년이 아직도 옳고 그름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입니다. 이런 시대에 살면서, 아직도 죄를 따지고 있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있는 기성 세대는 필연적으로 젊은 세대로부터 거부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 상태로 계속 진행하다 보면, 머지 않은 장래에 ‘죄’라는 단어가 <고어사전> (Dictionary of Archaic Words)에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 <고어사전>에서는 ‘죄’를 이렇게 정의할 것입니다.

죄: 현재 사용되지 않는 말로서, 우리의 조상들이 무지몽매하여,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여겨 쓸 데 없는 스트레쓰를 주고 받았을 때, 사용했던 말이다. 죄에 속하는 것으로는, 예컨대, 기독교의 신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 배우자 외에 다른 파트너와 즐기는 것 등이 있었다.

이렇게 정의해 놓고는, 그 사전의 편집자는 너무나도 감격스러워 이렇게 덧붙일 것입니다.

지금은 이 모든 일들이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의 대상이 되었다. 아, 얼마나 행복한 세상인가!

3.

이렇듯, 세상은 ‘죄’라는 단어를 어떻게든 추방하고, 아무런 죄 의식 없이 마음대로 즐기며 살아가려고 힘씁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세상의 뚜렷한 흐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믿는 사람들도 이 흐름에 슬쩍 편승하려 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 세상은 하나님을 등지고 그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성서의 증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를 깨우치시게 되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성을 자각하게 되며, 성령과의 깊은 사귐에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더 예민하게 자신의 죄성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믿었던 사람들은 성령과의 인격적인 사귐이 시작되면서 자신이 과연 죄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게 됩니다. 성인이 되어 성령을 체험하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난생 처음 가슴을 압도하는 엄청난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이 현상은 꼭 인생을 방탕하게 살았던 사람에게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볼 때 정말 괜찮게 산 것 같은 사람 혹은 정말 존경받아 마땅한 것 같은 사람들도 성령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정한 의미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정체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영어의 crime에 해당하는 ‘범법’은 법이 제정되어야만 성립됩니다. 법이 없을 때는 범법도 없었습니다. 옛날 저희는 국가 원수를 비판하면 범법자가 되는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런 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법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신문을 읽다 보면, 어떤 경우에는 너무하다는 생각을 할 정도입니다. 반면,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죄’는 영어로 sin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설 때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죄 즉 자신의 sin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들은 “내가 왜 죄인입니까? 내가 행한 것 중에서 죄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항변합니다.

이 사람을 논리로 설득하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게 할 방도는 없어 보입니다. 그 스스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의 거룩성 앞에 서서 자신의 부정함을 깨닫고, 그분의 완전하심 앞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닫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음을 압도해 오는 죄책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 “오, 주님, 저는 실로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실로, 모든 성령 체험은 자신의 죄에 대한 쓰라린 자각과 그 죄에 대한 절통한 회개로 시작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자신의 죄성에 대해 온 몸으로 떨고 눈물을 쏟아 본 일이 없다면, 아직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4.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 5장 1-11절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처음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이 시키는 대로, 깊은 곳에 나아가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밤 새 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는데,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친구들에게 와서 도와 달라고 청합니다. 그물을 모두 걷어 배에 올려 놓고 난 베드로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에 사로잡혔습니다. 자신에게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라고 명령하신 그분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계시던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8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죄에 대해 한 마디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 전까지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었으니,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배워 알기는 했겠지만, 그것을 깨닫고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따져 보아도, 자신을 스스로 죄인이라고 규정할만한 잘못을 행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생각할 때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그는 이 모든 착각으로부터 깨어났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죄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무너졌습니다.

베드로는 무식한 어부였으니 그랬을 법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바울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당시의 사회에서는 엘리트 중 엘리트였습니다. 유대인들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렇고, 로마인들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렇고, 누구에게도 빠질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으로서, 이민 사회에서도 존중받고, 미국인 주류 사회에서도 존중받는 사람, 그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존경받고, 교회에서도 존경받는 그런 사람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사람들 가운데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조건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그 대단했던 바울도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대면하고는, 자신의 죄성에 압도 당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딤전 2:15)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이 점에서 예외는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에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롬 3:10)라고 했는데, 실로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모두 다 죄인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서 너무나 벗어나 있으며, 하나님의 기대에 너무나 못미치는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과 만나면 이 사실을 깨닫습니다. 내가 살아온 것들을 하나 하나 되짚어 보지 않더라도, 성령의 빛이 비추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그냥, 너무나도 분명해집니다. 마치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궁지에 몰린 범인이 한 순간 돌아서 두 손을 올리고 순순히 포박을 받는 것처럼, 우리는 더 이상 부정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고,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5.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잊고 있던 우리의 죄성을 깨닫게 하고 인정하게 이끄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과의 사귐이 깊어지면 질수록, 우리는 죄에 대해 더욱 예민해지게 됩니다. 반면, 이 세상은 ‘죄’라는 단어를 어떻게든 추방시키려 하고, 모든 것을 ‘정당한 선택’의 대상으로 둔갑시키면서, 죄에 대해 따지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 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이끄시려는 방향과 세상이 우리를 이끌려는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부단히 깨워 일으켜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이끄십니다. 하지만 세상이 이끄는 방향에 이끌리기를 바라는 마음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자주 찢겨질 듯 고통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성령을 거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교를 싫어하고, 전도를 혐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이 이끄는대로 죄 속에서 그대로 머물러 살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에, 사람들은 성령을 거부하고 예수 믿기를 거부합니다. 예수님을 죽게 한 유대인 지도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 즐겨왔던 죄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원했고, 그 사실을 끝까지 은폐하기를 선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한, 그들은 마음을 엄습해 오는 죄책감을 처리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마음 놓고 그들이 누리고 있던 죄를 누리려면, 예수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다양한 이유를 댑니다. 교회가 썩었다, 교회가 돈만 밝힌다, 설교가 형편 없다, 교인들이 모두 위선자들이다, 교회가 차별대우한다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이유들을 대면서 믿기를 거부합니다. 참 불행한 일은 그 이유들이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이 믿기를 거부하는 참된 이유는 아닙니다. 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에 일어날 일들이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믿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무너져 스스로의 죄성을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의 반대편으로 흘러가고 있는 세상의 흐름에서 빠져 나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감당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자신의 나태한 욕망과 길들여지지 않은 충동을 따라 살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믿기를 거부하던 사람들이 결국 성령 앞에 무너져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 이어령 교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과거에 그분은, 자신과 같은 지성인들이 어느 교회에 가서 어느 목사의 설교를 들을 수 있겠느냐는 핑계를 댔던 분입니다. 그분의 지적에도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분은 결국 성령의 임재 앞에서 두 손을 들었습니다. 수준 높은 설교에 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성을 고발해 오는 성령의 음성에, 결국 74세에 이르러서야 용기를 내어 응답했습니다. 그분은 회심하면서 쓴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의 말미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 묻은 이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것으로 저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이어령 선생께서 앞으로 한국의 C. S. Lewis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떻게 보면, 두 분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두 분 다 무신론자로서 문학에서 구원을 찾다가, 결국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두 분 모두 깊은 사상과 탁월한 문학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기대가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됩니다. C. S. Lewis가 쓴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같은 책이 이어령 선생을 통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2천년 동안의 역사를 돌아봅니다. 이 오랜 기간 동안, 교회가 완전해서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은 없습니다. 목사가 훌륭해서 그 목사를 보고 자신의 죄성을 깨달은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교인이 너무도 훌륭하여 그 모습을 보고 “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시대였든지, 교회는 언제나 허물이 있었으며, 목회자들도 언제나 어느 정도의 흠이 있었고, 교인들도 완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회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던 것은 우리 중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깨우치심 때문이었습니다. 들려지는 복음 안에서 성령의 깨우치심을 받고 스스로의 죄성을 인정하고 나면, 교회의 허물과 목회자의 흠과 교인들의 불완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도 예외가 아님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6.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 “그[즉 보혜사 성령]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참으로 진리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죄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그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죄 안에 살면서 그 죄를 숨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즐기겠다는 죄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때때로 그런 질문을 받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것이 왜 죄가 됩니까?”

죄가 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앞에 두고도 그 길을 걷기를 거부한다는 말은, 곧 죄 안에 그대로 머물러 살겠다는 고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서서 자신의 죄에 대해 통곡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써 죄를 용서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와지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됩니다. 아주 심각한, 아주 치명적인 죄가 됩니다.

성령과의 교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 죄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죄를 탐하던 우리의 옛 본성에게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동안 즐기던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면, 우리는 알게 됩니다. 죄 안에서 즐기는 것은 실은 즐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들볶는 것이며 학대하는 것임을! 그것을 깨닫고 죄로부터 벗어나 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점점 참된 행복과 만족을 맛보게 됩니다. 그전과는 전혀 다른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때때로 숨어있던 타락한 옛 본성이 고개를 들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로 인해 때때로 유혹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금새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옛날 즐기던 재미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로운 재미가 비교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시, “야동을 보는 것이 죄인가요?”라고 물었던 그 청년에게 제가 뭐라고 답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그 청년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슨 일을 두고 죄냐 아니냐를 따지고, 죄라고 판단될 때, 기를 쓰고 그 죄의 유혹을 뿌리치는 방법으로 대처한다면 백전 백패할 것입니다. 먼저 할 것은 성령과 함께 매일 사귀는 일에 힘 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당신을 이끌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당신은 자주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당신으로서는 넘어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도 지금은 그것을 허용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의 한계임을 인정하고, 당신 자신에 대해 절망하면서, 더욱 하나님을 찾고, 더욱 성령과 동행하며 살아가기를 힘쓰십시오. 그러다 보면, 성령께서 당신에게 깨달음을 주셔서, 점점 야동이 추하고 악해 보일 것이고, 그것에 빠져 있는 당신 자신의 모습이 딱하게 보일 것이고, 그 야동이 당신에게 끼치는 피해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즐기는 것이 아니라 실은 당신 자신을 학대하는 일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렵지 않게 그것을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7.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목록을 손에 들고 그것 하나 하나를 대상으로 싸워 이기기 위해 힘 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려 하니, 백전백패 합니다. 그렇게 자꾸만 실패하다 보니, 어떻게든 죄의 목록을 줄여 보려고 힘씁니다. “그것도 죄가 됩니까?”라는 질문은 죄의 목록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기계적으로, 율법적으로 살아기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룩성에 이르는 길을 찾아가기를 기대하십니다. 성령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 죄를 극복하고 거룩함에 이르기를 기대하십니다.

진실로 경계해야 할 것은 거룩함에 이르는 이 여정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야동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야동을 보는 것이 거룩함에 이르는 우리의 영적 여정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Susanna Wesley)가 아들에게 죄에 대해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너의 이성을 약화시키는 것,
Whatever weakens your reason,
무엇이든지 너의 양심을 둔감하게 만드는 것,
impairs the tenderness of your conscience,
무엇이든지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의식을 흐리게 하는 것,
obscures your sense of God,
그리고 무엇이든지 영적인 것들의 맛을 약화시키는 것,
and takes off the relish of spiritual things
그것이 너에게 죄가 된다!
that to you is si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성령과 이 세상 중에서, 어떤 이끌림을 따라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짓눌려 넘어져 통곡했던 경험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성을 인정하십니까? 진실로 그러하시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면했던 것입니다. 그 성령님과 함께 늘 동행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왜 자신이 죄인인지 아직도 모르겠고 아직도 인정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너무 늦기 전에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에서 겪었던 그 경험이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하십시오. 십자가는 우리의 죄성을 고발해 오는 칼날이며, 동시에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여러분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것도 죄가 됩니까?”라고 따지고 항변하기를 즐기는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 “그렇습니다, 다 죄가 됩니다. 그리고 죄인은 바로 접니다”라고 고백하는 이방인으로서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인간의 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성령님,
저희를 깨우치소서.
저희의 죄성에 깨어나
소스라치게 놀라게 하소서.
죄를 부정하는 이 세상에서
이방인으로 살게 하소서.
성령님과의 더 깊은 사귐을 통해
거룩함에 더 깊이 참여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