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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8.12 (김영봉 목사)
요한복음 연속설교: 생명의 복음(80)
“정말 믿느냐?” (Do You Truly Believe?)
--요한복음 16:5-7, 25-33
1.
한국에 어떤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중소 기업을 운영하는 그는 믿음이 좋아 보이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업을 통해 나오는 이윤으로 선교 사업을 돕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일 년에
적지 않은 시간을, 해외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사비를 털어 선교 활동을 하곤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부목사님을 모셔서 사내 예배를 드립니다. 직원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의무적으로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는 술 마시는 것을 싫어하여, 술상무를 고용하여 접대하는 일을
대신 하게 합니다. 술과 관계된 모든 모임에는 술상무를 대신 보냅니다. 그는 회사 수입의 십일조와 자신의 수입의 십일조를
어김없이 교회에 바칩니다. 직원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고합니다. 그것이 자기처럼 축복받는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자, 이쯤 되면, 여러분은 “그 사람, 참 믿음 좋은 사람이로군.”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회사에
다니는 사원들이 사장에게서 아무런 애정을 못 느끼고 오히려 이용 당하고 있다는 느낌만 받는다면, 해외 선교 사업에
많은 돈을 쓰는 사장이 정작 사원들의 복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면, 교회에 드리는 십일조는 정확하지만 자신의 개인
씀씀이에는 절제가 없다면, 술 자리는 피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는 각종 모임에는 빠지는 법이 없다면, 그리고 사내
예배를 드리는 목적이 사원들의 영적 성장에 있지 않고, 사원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려는 데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그 사람의 믿음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과연, 믿음이 좋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믿음이 강하다는 말이 진실로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믿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좋은 믿음, 강한 믿음을 가지기 원하는데, 과연 어떤 것이 좋은 믿음이며, 어떤 것이 강한 믿음일까요? 너무나도 기본적인
질문인 것 같지만, 실은 대답하기 힘든 질문입니다.
2.
오늘 읽은 본문에서 저는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고별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당신의
죽음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그 죽음에 대한 그분의 태도가 아주 특별합니다. 그 어떤 두려움도, 아쉬움도 그분에게서
느낄 수가 없습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당하는 죽음은 그 어떤 이유로든 비통한 죽음입니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가장 공포스러운 십자가 형에 의해 죽는 죽음입니다. 요절하는 것도 애통스럽고, 장차 당할 모욕과 수치와 고통을 생각하면
더욱 치가 떨리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그런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비통하고 애석하고 참혹한 죽음을 말하면서,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간다”(5절)고 말씀합니다.
28절에서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세상에 왔다. 나는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멀리 여행을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이 제자들에게
오히려 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7절을 보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당할 참혹한 죽음을 두고, 예수님은 마치, 만수무강을 누리고 세상을
떠나는 노인처럼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반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두고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 다른 지방으로
가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분이 죽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두려움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5절 하반절로부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서 아무도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고, 도리어 내가 한 말 때문에 너희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 찼다.”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묻는 제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말은 그들이 뭔가 불길한 징조를 느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캐물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모른체 하고 싶었습니다. 그 현실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공포스러운 죽음을 두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담담함과 뭔가 불길한 징조를 두고 두려워 떠는 제자들의 모습이 이 본문에서
뚜렷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이후의 말씀을 읽어 보면, 그들의 두려움을 해소시켜 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좀 더 분명한
표현을 사용하여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두려움과 슬픔을 벗어난 사람처럼 이렇게
대답합니다. 29절과 30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제 밝히어 말씀하여 주시고,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시니,
이제야 우리는, 선생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과, 누가 선생님께 물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환히 알려 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습니다.” 이 말을 하는 제자들의 표정은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흥분해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응대하십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만, 뒤이어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감안하여 의역을 한다면, “너희가 정말 믿는다는 말이냐?”라고
하면 좋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제야 믿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그 믿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어 보십시오. “보아라.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 두고, 제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벌써 왔다.”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제 말로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이제는 믿어진다고? 너희는 너희를 모른다. 아직도
멀었다. 믿음은 위기에 닥쳐 보아야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다. 너희는 잠시 후에 위기가 닥칠 때, 모두 나를
두고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그런 믿음 가지고는 안된다.” 그러시면서 33절 후반절에 보면,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여기서 ‘세상’은 ‘세상의 죄와
유혹’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참된 믿음으로써 모든 유혹과 죄를 이기고 끝까지 하나님의 길을 갔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세상을 이겼습니다.
C.S. Lewis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 서기 전까지는,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밧줄의 예를 듭니다. 제 손에 밧줄이 들려 있다고 합시다. 저는 그 밧줄로 어떤
물건을 묶으려 합니다. 이럴 경우, 저는 그 밧줄을 대충 보고는 쓸만하다고 판단하고 물건을 묶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밧줄을 타고 10층짜리 빌딩에서 내려 와야 한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 저는 그 밧줄에 생명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꼼꼼히 살펴 볼 것입니다. 아마도 제 마음에 그 밧줄이 튼튼하다고 확실히 믿어지지 않는 한, 저는 그 밧줄에 몸을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믿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믿을 수 있게 되었다고 흥분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 그 믿음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믿음은 생사의 기로에 세워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믿음이었습니다. 그런 믿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믿음처럼, 세상의 모든 환난과 박해와 죽음의 너머까지 우리를 데리고 갈 수 있는 믿음이어야만
합니다. 그런 믿음이 진실로 강한 믿음이요 좋은 믿음입니다.
3.
저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저 자신과 여러분을 흔들기를 원합니다. 아마도,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대부분은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실 것입니다. 오늘 2부 예배에서는 김상형, 한상연 부부께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뉴욕의 로체스터에서 오랫동안 사시다가 은퇴하신 후, 2년 전에 이 지역으로 이사 오시고, 1년 전부터 우리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1년 동안 성실하게 믿음 생활을 해 오시면서, 이제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사건이 바로 세례 사건입니다. 다른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 믿음의 형제 자매된 성도들은
세례 받는 이들을 위해 축복의 기도를 드릴뿐 아니라, 자신들이 이미 받은 세례를 기억하고, 세례 이후의 영적 생활에
대해 반성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례 받을 때, 내가 드렸던 고백,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얼마나 더
깊어졌는지, 혹은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주 기회가 좋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질문을 우리 모두에게 제기하렵니다. “나는 과연 정말
믿고 있습니까? 당신은 정말 믿고 있습니까?”
이 질문이 왜 우리를 흔드는 질문인지, 그 이유를 다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머리로 인정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입술로 “주여, 주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주일 마다
교회에 나와 예배 드리고 봉사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대로 사는 것’인데,
믿는대로 사는 것은 그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교회에서 믿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당장 죽어도 구원받기에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내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지금
당장 죽어도 하나님의 나라에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믿는 믿음은 매우 중요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살아가면서
당하게 될 모든 환난과 시련과 박해와 죽음까지 이겨낼 정도로 강하지 않으면, 지금 아무리 큰 소리로 “아멘, 제가
믿습니다!”라고 외쳐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다고 믿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
믿음이 나의 삶의 여정에서 겪어야 하는 모든 우여곡절을 통과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 중에, 예수님께 “주님, 제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분이 “그래, 네가 진실로 나를 믿는구나! 네 믿음이야말로
세상을 이길 믿음이로구나! 네 믿음이라면 어떤 유혹과 죄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인정해 주실 분이 얼마나
계실까요? 몇 분 계시다면야,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클 것입니다. 저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의 믿음을 얕보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에 이르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사실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설사 그런 믿음에 이른 사람이 있다해도, 그분은 필경, “아닙니다. 저의 믿음은 너무도 부족합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 주옵소서”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얼마 전, 설교 중에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의 이야기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일생을 선교사로 살았던
스탠리 존스 목사님은 “예배 드리기 위해 교회 안에 모여있는 사람들 중 적어도 3분의 2는 여전히 선교의 대상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저는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아직도 참된 믿음으로
인도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날 예배가 끝난 후, 어느 장로님께서, “목사님,
제가 선교 대상인 2/3에 속하는지, 참된 믿음에 이른 1/3에 속하는지, 생각하니 두렵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나는 선교가 필요한 2/3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한, 희망이 있습니다. 그 반대로 생각하는 게 문제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오늘의 질문에 대해서도 똑 같은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중에 “당신은 정말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아멘! 저는 정말 믿습니다”라고 답하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그분이야말로 가장 희망이 없는 분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더 큰 희망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제게 있는 이 믿음 가지고는 안됩니다. 이 믿음으로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믿음으로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을까요? 이 믿음으로 제가 세상에서 당할
환난 가운데서 든든히 설 수 있을까요? 이 믿음으로 거룩하게 살 수 있을까요? 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주님, 제게 더 큰 믿음을 주십시오.”
4.
이렇게 겸손히,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 진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이르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비밀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우리 스스로 힘쓰고 애써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물을 받을 때,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서 믿어지지 않던 것이 믿어지게 됩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나서 ‘어렴풋이’ 믿어지던 것이 점점 든든히 믿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며, 더
깊은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 믿음은 삶에 속속들이 미치게 되고, 그렇게 깊이 뿌리 내린 믿음은 그 어떤 환난과 시련도
통과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이 믿음의 선물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등을 지고 그분의 손길을 피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선물을 우리 모두에게 주고 싶어하시는데, 우리는 한사코 그 선물을 받지 않으려고
피해 다닙니다. 선물을 마련하고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기회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선물을
구합니다만, 한 번 그 선물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는, 더 이상 믿음을 구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일평생
지속하는 영적 여정인데, 믿음을 마치 천국 입장권을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믿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적당한 정도’를 정해 놓고, 그 정도에서 그치려 합니다.
왜 사람들은 그 좋은 믿음의 선물을 받지 않으려고 피해 다닙니까? 그것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주
위험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선물을 받았다가는, 그 선물 때문에 매우 불편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선물 때문에 지금 우리가 스스로 손에 넣고 즐기는 것들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빠져
있는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보다는 우리 스스로 손에 넣고 즐기고 있는 것들이 더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믿음의 길보다 이 세상에서 가르치는 승리의 길이 더 좋아 보입니다. 믿음을 얻었다가는
그 길에서 떠나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피해 다닙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믿는다고 하면서 어느 정도에서 멈추는 것입니까?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르치는 승리의 길을 걸으면서,
믿음의 능력을 얻어 그 길에서 승승장구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 같이, 아니 어떤 경우에는
그들보다 더 이기적이고 야박하고 비열하게 행동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경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 읽은 16장 33절의 말씀, 즉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말씀을 읽을 때 신이 납니다. 이 말씀이 꼭,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그 믿음을 통해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신 말씀은 “온갖 유혹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한 마디 기도로써 질병을 물리치는 것이기보다는, 그
병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흐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사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벌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심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게 사업을 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분투하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선선히 양보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많은 돈을 벌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많은 수입을 얻었을 때,
그 돈 때문에 타락하지 않고, 그 돈을 잘 관리할 수 있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 믿음이 좋아 보입니까? 이 선물이 좋아 보입니까? 진실로 강한 믿음이란 이렇게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속속들이
바꾸어 놓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세상적으로 볼 때 손해보는 길을 가게 한다면, 이 믿음이야말로 진실로 위험 천만해
보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그 선물을 받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하나님을 피하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되 적당한 선에서 멈추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일 주일에 한 번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교회에
이름이 등록된 것으로, 가끔 필요할 때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 도움을 얻는 것으로,
혹시나 내세가 있을지 모르니 그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 장치로 생각하고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것 아닙니까?
5.
선택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두고 계신 믿음의 선물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한 번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믿음은 우리에게 영원한 진리를 알게 합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를
보게 합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하고, 우리의 소명을 발견하게 합니다. 그
믿음은 우리의 삶을 영원한 차원으로 올려 줍니다. 그 믿음은 참된 사랑을 알게 하고 또한 행하도록 변화시켜 줍니다.
그 믿음은 오염되고 비뚤어진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며 바로 잡아 줍니다. 그 믿음은 이 세상이 어디에서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를 알게 해 주며, 그 세상 안에서 참되게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고 또한 힘을 얻게 합니다. 그 믿음은 이 세상
너머를 보게 해 주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해 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해
줍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미리 누리며,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진정한 자유를 누리도록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믿음의 선물은 이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진정한 성패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이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믿음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를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두 가지의 비유가 생각날 것입니다.
어떤 농부가 다른 사람의 밭에서 일하다가, 누군가가 오래 전에 그 밭에 숨겨 놓은 엄청난 보물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샀다는 비유(마태복음 13:44)를 기억하십니까? 또한 어느 보석상이 매우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는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그것을 샀다는 비유(마 13:45-46)를 기억하십니까? 이 두 비유가 말하려는
요점은 믿음이 이토록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걸만큼 이 믿음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에 모든 것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믿음 안에 살면서 이 세상에서 견뎌야 할 온갖 우여곡절을 거쳐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믿고 나서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진다면, 문제는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믿고 나서 오랫 동안 믿지 않는 사람과
동일하게 질병도 견뎌야 하고, 실패도 당해야 하며, 때로는 재앙도 겪어야 합니다. 믿는다고 해서 이런 것으로부터 면제되지
않습니다. 그뿐입니까? 믿기 때문에 자초해야 하는 손해도 있고, 믿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박해도 있고, 믿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환난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견디면서도 변하지 않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실상, 믿음은
어려울 때보다 잘 될 때 더 쉽게 흔들립니다. 모든 일이 다 잘 될 때,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고 권력이 생길 때,
믿음은 더욱 위기를 겪습니다. 그 모든 번영과 부의 유혹에도 견딜 수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믿음, 제 아무리 큰
부와 명예에도 유혹받지 않는 믿음에 이르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작은 위기 앞에서도
부들부들 떠는 초라한 신자가 되기 원치 않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작은 고난 앞에서 인간성의 바닦까지 드러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작은 이익 앞에서 수치스럽게 행동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조금만 조건이 좋아지면 교만해지고 기고만장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큰 위기 앞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 위에 견고히 서 있기를 빕니다. 큰 고난 앞에서도 믿음의 능력으로 고결하게 견뎌낼 수 있기를 빕니다. 엄청난
부의 유혹 앞에서도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빕니다.
6.
그런 점에서, 오늘의 질문을,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정말 믿는가? 나는 정말
믿는 사람인가? 내 믿음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인가? 내 믿음은 그 어떤 환난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인가? 내
믿음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떨지 않을 믿음인가? 내 믿음은 부의 유혹과 명예의 유혹과 유명세의 유혹까지 견뎌낼 수
있는 믿음인가? 인생에서 겪어야 하는 모든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도 여전히 변함 없는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저는 두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깊이, 더 낮게, 더 자주, 더 절실하게 주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저를 이 믿음으로 인도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와 긍휼에 힘입어, 그 어떤 번영과 부와
명예의 유혹에도 변질되지 않는 믿음, 그리고 그 어떤 고난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진실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 제 육신이 쉬는 마지막 숨보다 더 오래 갈 수 있는 믿음, 마침내 저의 전 존재를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다
줄 수 있는 믿음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오, 주님
저희에게는 믿음이 없습니다.
저희의 믿음은 너무도 부족합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저희의 눈을 열어 주시어
주님께서 주신 믿음의 선물을 알아보게 하시고,
그 믿음 안에서 무럭 무럭 자라게 하소서.
세상을 이길 참된 믿음에 이르도록
저희를 인도하여 주소서.
의식을 잃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동안에라도
주님을 믿는 믿음이
저희를 인도할 정도로
저희가 믿음 안에서 자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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