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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 Home | audio한국어 영어 고속 저속

7.22.2007 (최지훈 목사)

“자비를 베푼 자”
("The Merciful One”)

---눅 10:25-37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아마도 크고 작은 봉사의 길에 나선 사람들 중에는 이 말씀의 도전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잘 알려진 것에 비해 그리 쉽게 받아들여지는 말씀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주는 도전이 매우 크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비유는 흔히 선행과 구제에 대한 이야기라고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 가운데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매우 무게 있는 질문에서 오늘 본문의 가르침이 나온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다시 한 번 들어 볼 만한 여지가 있습니다. 특히 오늘은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배경을 살펴봄으로서 새롭게 그것을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을 보면 어느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께 질문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실제로 질문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그에게 물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보기에 예수님은 무언가 그 틀에 완전히 맞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스스럼없이 병자를 고치는 모습을 보아서도 그렇고, 세리들과 거리낌없이 교제하는 모습도 그랬습니다. 무언가 율법 이상의 기준을 가졌거나 은연중에 성경을 무시하는 사람으로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그래서 마치 순수한 실존적 질문을 가진 사람처럼, 예수께 물은 것입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내용의 질문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질문이 질문인 이상, 이 대화를 엿듯는 우리는 또한 예수님의 대답을 관심있게 듣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율법사인것을 아시고 먼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성경의 선생인 네가 보기에 그 대답이 무엇이냐?” 여기에 대해 율법 교사는 율법의 핵심이자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내어 놓았습니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무언가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처럼 생각되었던 예수님이 오히려 “네가 이미 알고 있고 말한 그대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율법 선생은 분명 자기기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사뭇 진지하게 물은 것에 대해서 아마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올랐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이 말씀을 듣고 조금 당황하게 되는 이들은 바로 이 이야기를 듣는 우리들입니다. 이 예수님의 대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구원과 영생의 길을 이렇게 율법의 가르침을 통해 듣는 적이 드뭅니다. 무엇보다도 영생은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또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24에는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나를 믿으라’고 (또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시원하게 말씀해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히 율법 교사의 대답을 인정하신 면이 있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라고 하는 예수님의 대답을 그저 “안다고 생각하면서 왜 묻느냐”는 뜻으로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그 내용의 무게가 너무나 큽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 영생에 관해 물었을 때에도 예수님은 먼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 19:17) 이 청년과 마찬가지로 율법 교사의 관점을 아셨던 예수께서는 먼저 율법을 통해 대답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당신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적어도 이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분명한 만큼이나 그 영생의 내용이 바로 사랑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줍니다. 사랑함으로써 생명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오늘을 사는 삶에서 뿐만 아니라 다가올 심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라고 알려진 가르침에서 ‘영생을 상속할 사람들’이라 불린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내가 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다.” 요한 1서 3장 14절부터는 영원한 생명이란 어떤 것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 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3:14-15)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바로 그 다음 16절 말씀이 말해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4장 역시 말씀합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4:10-11)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유하게 하셔서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충분히 율법 교사의 대답에 대해 “네 대답이 옳다” 라고 대답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범법자로 생각했던 율법교사는 뜻밖의 대답을 들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보면 율법교사의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사랑하라”는 계명을 제대로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과연 내가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내 이웃입니까 하는 물음은 단지 이 예수님 앞에 선 율법교사만의 질문은 아닐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고 그 날은 쉬라고 하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안식일에 여행이 허용되는 거리를 구체적으로 정해 놓았었습니다.

바로 “내 이웃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라는 이러한 질문을 배경으로 예수께서는 이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느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몹시 맞고 길가에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어느 제사장이 그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가고 또 고상한 레위인 하나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하필 어느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 이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측은히 여겼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이 소위 상대를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만일 어느 누가 ‘여기까지가 당신의 이웃이오’ 하고 정할라치면 사마리아 사람이 낀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이 유대인의 상처를 싸매 주고 여관에 데려다 주고 심지어는 이후에 필요한 경비까지 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질문을 바꾸셨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라고 물었던 그에게 “누가 이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이’가 과연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가?”라고 하는 질문이 무색해졌습니다. 바로 이 때,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이로써 예수님은 영생의 길을 묻던 그의 질문에 완벽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사랑을 보느냐? 자비를 보느냐?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여라.” 이 놀라운 말씀에 더 이상의 설명을 단다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율법의 가르침은 말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어디까지나 외적인 기준으로만 생각하던 이 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유하게 하는 참 빛을 던져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본문의 비유는 “우리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섬겨야 한다” 라거나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도와주어야 한다”라고 정해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은 그러한 도덕적인 교훈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한 사람에게 어느 예기치 못한 사람이 자비를 베푼 이야기를 통해 사랑이 어떠함을 보여주시려 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따르다 보면 물론 우리의 이웃에서 ‘이 사람은 아니다’ 하고 확실히 제명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을 따르는 것과 사랑을 따르는 것은 다릅니다. 사랑은 자유합니다.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 사랑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의 우리의 만남을 생각해 보십시오. 진실한 이웃이라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모습들이 아직도 많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들의 신앙의 만남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가만히 보면 너무나도 다른 삶의 모습을 지닌 이들이지만 누구 못지 않은 이웃으로 지낼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공교롭게도 지난 주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던 한국인 스물 세 명이 납치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람들의 생명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이 일을 두고 일각에서는 교회에 대한 비난이 일고 있습니다. 일단 이 사건 자체는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정확히 알기 전에 섣불리 의견을 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기억할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있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으로서의 구제는 자기 자랑과 만용을 부르지만 사랑으로서의 섬김은 그 자체가 가장 큰 보상입니다.

마찬가지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남을 도와주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보다 더 근본적인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흔히 ‘선한 사마리아인’ 이라고 하는 표현이 등장할 때는 어떤 이가 낯선 사람에게 선행을 베푼 이야기가 따라나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단순한 친절이나 구제에 대한 가르침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참으로 높은 말씀에 대한 설명이며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사랑을 통한 영생에의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도 그 사랑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면에서 영생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이며 믿음으로 받는 선물입니다. 내가 사랑을 알지 않고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지 않고는 어떻게 우리가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주고 내 몸을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어저께 멕시코 유까딴의 한 마을에서는 한 작은 선교관의 준공식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2년 여간 계시면서 일해오신 장태전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아시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이 분이 수 년 전 단기 선교 여행에 처음 참가할 때에는 그런 일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가면서 왜 해외에 가서 일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셨던 터에 본인이 직접 가서 보시기로 하셨습니다. 멕시코에 도착해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 곳을 찾아온 마을 사람들의 머리를 감겨주는 일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머리 한 번 깎아주고 감겨주면 그것이 며칠이나 가겠습니까? 그것이 비행기 타고 가서 할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분이 팔을 걷어붙이고 한 아이의 머리에 비누칠을 하고 씻겨주는데 마구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에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 계속 멕시코 선교에 참여하시다가 결국 가서 살면서 일하시기까지 되셨습니다. 그 분이 평신도로서 2년 동안이나 가서 살 정도로 위해서 일했던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이며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여기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면 마땅한 대답이 없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작년 가을 개인적으로 장권사님을 찾아가서 일을 도우면서 그 곳에서 배우는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랑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거기에 선교관이 아니라 선교 단지를 지었다고 해도 그 자체로 기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시 오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새롭게 보이십니까?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라.” 네가 사랑을 본 그대로, 체험한대로, 너도 가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이야기와 더불어 더 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율법의 모든 엄중한 심판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분이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를 영생의 길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따른다면 그 분을 힘입어 그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되던지 사랑이라고 하는 붓을 써서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를 통해, 영적 훈련을 통해, 성령의 호흡을 통해, 그리고 사랑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여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은 좁은 길이지만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