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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9. 10 김영봉 목사
요한복음 연속설교: 생명의 복음(60)
"대야와 수건"(3)
-- 요한복음 13:12-17; 시편 131:1-3
1.
어떤 일을 할 때, 그 동기(motive)를 따져 보면,
두 가지 중 하나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는, 채워지지 않은 무엇을 채우기
위해, 손에 없는 무엇을 손에 넣기 위해 일하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미 채워져 있기 때문에, 이미 내 손에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나누기 위해 일하는 경우입니다. 여러분이 일하시는 동기를 가만히 앉아
따져 보시기 바랍니다. 대개는 이 둘 중의 하나에 속합니다. 뭔가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채우려고 분투하는 경우가 있고, 자신에게 넘치고
있는 무엇인가를 나누기 위해 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읽어드린 시편 131편은 제가 매우 좋아하는,
그리고 자주 사용하는 시편입니다. 저는, 이 시편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잘 그려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1절에서,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영적 삶이 없이 분투하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현재의 심경을
고백합니다.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더 이상 그러지 않지만, 과거에는, 교만하고
오만하게 행동했으며, 아무도 가져보지 못한 것을 가지려고 했고, 누구도 꿈꿔보지
못한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싶어했다는 말입니다. 이 시편의 제목이 ‘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에 이 시편을
적용해 보면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지금도 유대인들은, 우리
민족이 광개토 대왕 시절의 국력과 영화를 그리워하듯, 다윗 시대의 국력과 영화를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장차 올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에서 날 것이며,
다윗처럼 영광스러운 이스라엘을 재건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윗의 왕국은
이처럼 위대했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제국을 이루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닥달했습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온 국민을 몰아 부쳤습니다. 주변 나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점령했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은 점점 넓어졌고 강해졌습니다. 강해지면 강해지는만큼, 야심은
더 커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땅을 모두 점령하고 싶은 욕망, 민족이란 민족은
모두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 단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왕으로 등극하고 싶은 욕망이 다윗의 마음을 압도했습니다.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는 쉴 겨를도 없이 분투했습니다.
다윗도 인간이었으니, 때로 지쳤을 것이고, 때로 쉬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그 모든 정복 전쟁을 실행한 동기는 ‘채워지지 않은 것을
채우고, 가지지 않은 것을 가지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나라를
정복하고 나면 잠시 만족감을 즐길 수 있었으나, 금새 더 큰 욕망이 마음 속에
차올랐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마음 속에는 "이번 전쟁이 끝나면 만족이
있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을 것입니다만, 그는 번번이 더 큰 야심과
욕망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2.
이 시기에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중국
출신의 NBA 농구선수 야오밍보다도 더 거대한 골리앗 장군 앞에
대적하여 섰을 때, 다윗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매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삼상 17:45)
고 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를 모조리 우리 손에 넘겨 주실 것이다"(47절).
여기서 보듯,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능력의 하나님’을 ‘이용’할 줄만 알았습니다.
그분의 능력을 이용해 ‘큰 것을 가지려’ 했고, ‘놀라운 일을
이루려’ 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자신의 야망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옆에서 시중을 드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에 나오는 지니(genie)같은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참된
만족의 근원인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분 안에서 만족을 찾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 그분을 이용만 하려 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업적을 이루어도,
아무리 많은 민족을 정복해도, 아무리 많은 영토를 손 안에 넣어도, 아무리 많은
궁녀들을 거느려도, 그에게는 만족이 없었습니다. 참된 만족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들지 못하고, 그분의 능력을 이용하려 하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2절은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사귐을 통해 참된
만족과 성취와 행복을 발견한 상태를 그리고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에 적용한다면,
능력의 근원으로만 알았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과의 사귐을 통해,
그분 안에서 자신의 만족과 성취를 발견했다는 말입니다. 그 많은 정복 전쟁을
통해서도, 그 많은 전리품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었던 만족감과 안식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러자 오랜 세월동안 쉴 줄 모르고 들떠 있던 그의 마음에
비로소 평안이 들어찼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이 마음 상태를, 시인은 ‘어머니 품에 안긴 젖 뗀 아이’
에 비유합니다. 어머니 품에 안겨 젖을 달라고 보채고 떼를 쓰는 ‘젖먹이’가
아닙니다. 더 이상 어머니에게 보채고 안달할 이유가 없이, 그냥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젖 뗀 아이’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통해, 더 이상 자신과 이웃을 닥달하며
지치도록 분투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의 마음 상태를 잘 그려줍니다.
3.
왜, 우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통해서만 진정한 만족감을 누리게 되는 것일까요? 대답이 너무 간단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인간 존재가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에게 있어서 부모와 다시 합하는 것 외에는
진정한 만족이 있을 수 없듯, 하나님에게서 잉태되어 나온 우리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찾는 만족과 안식감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제서야
우리 마음과 영혼은 평안히 쉴 수 있고, 회복과 치유와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 평화와 안식을 발견하고, 변치않는
만족감과 행복감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 빈둥 놀면서 시간을 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그 동안에 일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의 이유와
목적을 발견합니다. ‘채워지지 않은 것을 채우기 위해’ 일하지 않고, 이제는
‘이미 채워졌기 때문에’ 일하게 됩니다. ‘가지지 않은 무엇을 가지기 위해’
일하지 않고,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여 일하게 됩니다.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복에 감사해서 보답하는 마음으로 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과 같은 일을 하더라도, 일하는 동기가 다르고, 일하는 방법이 다르고, 일하는
열정이 다르고, 일하는 태도가 다르며, 일하는 표정이 다르고, 일의 열매가
다릅니다.
내게 주어진 대야와 수건을 꺼내어 다른 사람을 섬길 때,
우리는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채워진 상태에서 봉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만족과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봉사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이웃에게도 그리고 교회에게도 불행한
일이 됩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만, 그 만족은 잠시 후
더 큰 욕망을 불러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안겨 주고,
명분으로 내세웠던 ‘주님의 일’은 방해받게 됩니다. 실제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주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허감을 채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뉴저지에서 목회할 때 경험했던 일을 하나 나누려고 합니다.
당시 저희가 살던 타운(town)에 라티노가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섬기던 교회는 멕시칸 전도사님을 초청하여 ‘라티노 미쎤’(Latino Mission)을
시작했습니다. 그 소식이 지역 신문에 기사로 났습니다. ‘백인 교회에 부임한
동양인 목사가 라티노들에 대한 사역을 시작했다’는 것이 뉴스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기사가 나간 후, 그 지역에 사는 라티노 한 분이 제게 전화를 하여 그 미쎤을
돕고 싶다고 제안했습니다. 만나 보니, 믿음도 좋고, 재능도 많고, 열심도 있는
분입니다. 초등학교 교사로 은퇴할 즈음에 이르렀는데, 스페인어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매우 유능한 일꾼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
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미쎤은 몇 개월 후에, 그 멕시칸 전도사님과
푸에토리칸 자원 봉사자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미쎤의 주도권을 두고 자주 싸우는 겁니다. 젊은 전도사님은 그 자원
봉사자를 두고, "자기가 다 하고, 나는 뒷치닥거리만 하란다"고 불평합니다.
그 자원봉사자는, "내가 자기 미쎤을 돕겠다는데,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어떻게든 이 미쎤을 성사시켜 라티노들에게 도움을 주겠느냐?"는
애초의 목적은 그들의 관심사에서 떠나 버렸습니다. 주도권을 잡으려는 사람과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람 사이의 갈등만이 깊어갔습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사람 둘을 중재하느라, 저도 속을 좀 썩었습니다.
일이 그르쳐지고 나서야,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자원봉사로 나선 그분은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그 미션을 ‘돕겠다’고 나섰지만,
사실은 그 마음에 있는 공허감을 채우기 위한 일이 필요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도우러 왔다"고 말했지만, 실은 "지배하러" 왔었습니다.
그분은 마침내 분노를 안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분 자신도,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숨겨진 동기를 알지 못하고 있음에 분명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신앙인들이 얼마나 쉽게 자신에 대한 착각에 빠질 수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채,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지를
깨닫고, 심하게 떨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도 언제나 그런 위험 앞에 서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끊임 없이 깨어있고, 끊임 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끊임 없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서지 않으면 그 함정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4.
개신교 영성 운동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 중 하나인 리차드 포스터
(Richard Foster)는 이제는 고전이 된 그의 책 'The Celebration of Discipline'에서
‘자기의를 위한 봉사’(Self-righteous service)와 ‘진정한 봉사’(True service)를
대조시켜서 설명해 줍니다(Chapter 9: The Discipline of Service).
‘자기의를 위한 봉사’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봉사 혹은 자기 좋은 맛에 하는
봉사를 말합니다. 즉,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하는 봉사를 말합니다.
반면, ‘진정한 봉사’는 하나님 안에서 참된 만족을 발견한 사람이 하는 봉사를
가리킵니다. 어떻게 다른지 한 번 보십시다.
첫째, 자기의를 위한 봉사는 인간적인 노력에서 옵니다.
봉사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합니다. 반면, 진정한 봉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거룩한 열망에 따라 행동합니다.
둘째, 자기의를 위한 봉사는 ‘큰 일’(the big deal)을
도모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만한 큰 업적을 꿈 꿉니다. 도모하는 일이 클수록
흥분합니다. 반면, 진정한 봉사는 ‘큰 일’과 ‘작은 일’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혹시 ‘커 보이는’ 일과 ‘작아 보이는 일’이 구분된다면, 진정한 봉사자는 작아
보이는 일을 택합니다.
셋째, 자기의를 위한 봉사는 외적인 보상(external rewards)
을 기대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고 칭찬해주고 보상해 주기를 기대하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반면, 진정한 봉사는 알려지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알려져서 사람들이 칭찬해도 겸손하게 처신합니다만, 알려지지 않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넷째, 자기의를 위한 봉사는 결과(results)에 집착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봉사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봉사하는 과정 자체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다섯째, 자기의를 위한 봉사는 누구를 섬길 것인지,
어떻게 섬길 것인지를 자신이 선택합니다. 늘 ‘섬길만한 대상’을 찾고, 사람을
차별합니다. 반면, 진정한 봉사는 차별하지 않습니다. 섬길 기회를 발견하면,
누구든지 섬길 수 있습니다.
여섯째, 자기의를 위한 봉사는 자기의 기분과 변덕에 의해
달라집니다. 기분 좋으면 하고, 기분 나쁘면 하지 않습니다. 반면, 진정한 봉사는
상황에 신실하게 응답합니다. 기분을 따르는 것은 봉사에 방해가 됨을 알고
경계합니다.
일곱째, 자기의를 위한 봉사는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봉사는 봉사이고, 생활은 생활이라는 생각에 따라 움직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봉사는 ‘생활 방식’(life-style)입니다. 늘 봉사하며, 무엇을 하든지 봉사하는
마음으로 합니다.
여덟째, 자기의를 위한 봉사는 봉사를 받는 사람들의
필요와 감정에 둔감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돕겠다고 나섭니다. 반면, 진정한
봉사는 상황에 따라서 물러설 줄도 알고 나설 줄도 압니다. 행동하기 전에
인내심을 가지고 귀 기울일 줄 압니다.
아홉째, 자기의를 위한 봉사는 공동체를 균열시킵니다.
자기의 공을 세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진정한 봉사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헌신합니다.
5. 여러분은 이 아홉 가지의 항목들을 들으면서 누구를
생각하셨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생각하고 이 항목들을 들었다면, 지금
여러분은 성령의 음성을 듣고 계신 것입니다. 만일 나 아닌 다른 누구를
생각하고 있었다면, 여러분은 미혹된 것입니다. 이 아홉 가지 항목을
보고, "나의 봉사는 자기의를 위한 것이었구나!", "나의 봉사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을 채우기 위한 분투였구나!"하고 자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에서 예를 든 그 라티노 미쎤 자원 봉사자와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는 저 자신을 속일 수 없습니다. 자기의를 위한
봉사와 진정한 봉사의 경계선에서 오락가락하는 저 자신의 모습을 숨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우리의 대야와
수건을 꺼내들고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어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얼른 보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대야와
수건을 꺼내들고 형제 자매의 발치에 무릎꿇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 봉사를
하면서 진실로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을 유지하고, 겸손하고 기쁘게 그 일을 지속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발을 다 씻어주고 조용히 물러나, "나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마음에 섭섭함이나 분노가
없이, 오히려 신령한 기쁨으로 행복해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더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행복감을 누리는 동안 틈틈이 비집고 들어오는
부정한 생각, 즉‘이만하면 나는 정말 잘 하고 있어.’라는 생각을 알아차리고
뿌리치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입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오늘 시편 131편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지 말고, 그분을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여기고 인격적으로 깊이 사귀어 나가노라면,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말로만 명령을 주실 수도 있었으나,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분
안에서 회복되고 치유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제대로 도울 수가 없습니다.
먼저 사랑에 당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돕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지배하려하고, 상처와 갈등만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만으로는
안 됩니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 마음이 푹
잠겨야 합니다.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가끔 진정한 봉사에서
오는 신령한 기쁨에 젖곤 합니다. 그 기쁨은 그 무엇보다도 뿌리 깊고 든든한 행
복감을 주지만, 동시에 저를 더 겸손하게 만들고, 더 진실하게 만들고, 더 조용하게
만듭니다. 제가 들떠 다닌다면, 자기의를 위해 분투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겸손하게, 진실하게, 투명하게, 차분하게
그러나 견실하게 행동할 때는, 바로 제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여 그 사랑의
힘으로 행동할 때입니다. 아, 이 상태에 언제나 머물러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겨워, 그 사랑의 힘으로,
사랑의 봉사를 행하는 신령한 기쁨 속에서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 은총이 매일, 매 순간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주님을 이용하는 신앙이 아니라
주님을 사모하는 신앙으로 이끄소서.
주님의 품 안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회복되고 치유되고 변화되어
참된 봉사의 삶을 살게 하소서.
자기의를 위한 봉사와 참된 봉사의 경계선에서
저희 손을 잡아 주시어
늘 참된 봉사에 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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