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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 Home | audio한국어 영어 고속 저속

2006. 7. 9 김영봉 목사

요한복음 연속설교: 생명의 복음(54)
"하나님의 대지에 심겨진 씨앗" (The Seed Planted in the Soil of God)

-- 요한복음 12:20-26

1.

지금 보시는 이것이 무엇처럼 보입니까? 벌레 같기도 하고, 펭귄을 박제해 놓은 것 같기도 하지요? 이것은 밀알 하나를 위에서 아래로 자른 모습입니다. 가장 바깥에 있는 것이 두 겹의 껍질 (aleurone and bran layer)입니다. 껍질 안에서 씨눈(germ)을 싸고 있는 것이 씨젖(endosperm)이라는 겁니다. 씨눈은 가장 밑에 있는 손톱처럼 생긴 부분을 가리킵니다. 껍질은 씨눈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씨젖 혹은 배젖이라고 부르는 씨앗의 살 부분은 씨눈을 보호하기도 하고, 나중에 흙에 심겨졌을 때 씨눈이 자랄 수 있는 기본적인 영양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씨눈이 죽어 있으면 이 씨앗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껍질이 아무리 강해도, 씨젖이 아무리 실해도, 씨눈이 죽어 있으면 그 씨앗은 죽은 겁니다. 저 작은 씨눈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 밀이 땅에 심겨졌을 때, 씨눈은 흙 속에서 수분과 양분을 섭취하여 밀이삭으로 자라납니다. 결국 이 한 알의 밀은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성장합니다.

2.

오늘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유명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24절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이 말씀을 두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 예수님의 표현에 문제가 있음을 알겠습니다. 밀알이 흙에 심겨져서 싹을 내고 줄기를 뻗어나가는 것은 그 밀알이 살아있기 때문이며, 그 생명이 충만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이 죽어있다면, 그 씨앗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저도 어릴 적에 배추씨와 무우씨를 심어본 적이 있습니다. 밭에 이랑을 만들고 손가락만한 나무로 흙 속에 구멍을 내고 그 안에 씨앗 서너 개를 넣고 다시 덮어줍니다. 그렇게 한 다음 물을 주고 여러 날을 지내고 보면, 파릇 파릇 순이 올라옵니다. 그런데, 씨앗을 심은 자리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도 군데 군데 있습니다. 그곳을 파서 확인해보면, 씨앗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 씨앗을 손으로 눌러 보면, 딱딱하게 굳어 있거나, 속이 텅 비어 있습니다. 죽어 있는 겁니다. 반면, 어느 정도 자란 무우 싹을 뽑아 보면, 씨앗은 간 곳 없습니다. 씨앗이 싹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씨앗이 흙 속에 심겨져서 싹을 내고 나무로 커가는 것은 ‘씨앗의 죽음’이 아닙니다. 물론, 껍질로 보면 죽음입니다. 씨눈이 생명의 약동을 시작하면 호도나 은행처럼 강한 껍질을 가진 씨앗이라 하더라도 무력하게 깨어져 나갑니다. 그 껍질은 깨어진 다음 흙 속에서 썩어 거름의 역할을 합니다. 씨젖 즉 씨앗의 살의 입장에서 보아도, 씨앗의 성장은 죽음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씨눈이 성장하기 시작하면 씨젖은 분해되어 그 양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껍질과 씨젖은 씨눈이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거기까지가 그것들에게 주어진 생입니다. 때가 되었을 때 모든 것을 다 내어주어 씨눈이 자라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반대로 되어야 옳을 것 같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살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혹은 이렇게 표현해도 좋겠습니다. "죽어있는 밀알은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살아있는 밀알은 흙 속에 심겨져서 나무로 자라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더 정확한 표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반대로 표현하셨을까요? 그분이 저만큼도 생각할 줄 몰라서 그랬을까요? 어림없는 일입니다. 제가 그분의 생각을 티끌 만큼이라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은 일부러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살아있는 씨앗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죽어 있는 씨앗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사는 것이고, 산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죽는 것이라는 진실을 전하고 싶으셨습니다. 이 진실에 눈을 떠야만,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3.

위에서 본 씨앗의 구조는 얼마나 인간의 모습과 닮았는지요! 성경은 인간을 세 종류의 요소를 가진 유기적(organic)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셋이면서 하나고, 하나이면서 셋입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성격을 우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육’(flesh)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육체와, ‘혼’(mind)이라고 부르는 정신적인 요소, 그리고 ‘영’(spirit)이라고 부르는 영적 요소가 인간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입니다. 동물에게는 육과 혼이 주어졌지만, 영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영이 주어졌기 때문에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 ‘영적 존재’ 즉 ‘살아있는 영’ 혹은 ‘살(flesh)을 가진 영’으로 지으셨습니다.

흥미롭게도,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요소와 씨앗을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요소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육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육체는 마치 씨앗의 껍질과 같습니다. 껍질이 없으면 씨젖도, 씨눈도 보전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는 인간의 혼 즉 정신과 인간의 영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육신이 약하면 정신도 제 역할을 할 수 없고, 영도 약해집니다. 인간의 혼은 또한 씨젖과 같고, 인간의 영은 씨눈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씨젖은 껍질의 보호를 받다가 씨눈이 발아를 시작하면 자신을 먹이로 제공합니다.

씨눈에는 신비로운 요소가 담겨 있어서, 흙 속에 있는 생명의 요소와 연락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씨의 껍질과 씨젖은 흙 속에 들어가면 썩고 맙니다. 그런데 씨눈만은 썩지 않고, 흙 속에서 생명의 요소를 끌어들여 무럭 무럭 자라갑니다. 씨눈이 흙 속에서 썩지 않는 이유는 흙과 교류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주어진 세 가지 요소 중,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영뿐입니다.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영으로만 그분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하나님을 알 수도, 교류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영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씨앗은 씨눈 때문에 씨앗입니다. 물론, 껍질과 씨젖도 중요합니다만, 씨눈이 없으면 혹은 씨눈이 죽어 있으면, 그 씨앗은 죽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영 때문에 인간이 됩니다. 육신과 정신도 중요합니다만, 영이 없으면 혹은 영이 죽어 있으면, 그 사람은 죽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서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들을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여깁니다. 가장 중요한 인간의 본질이 죽어 있으므로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성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4.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우리 인간의 삶과 씨앗의 삶이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씨앗과 같은 상태의 인간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이 그림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특별기도학교’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면 이와 같은 상태가 됩니다. 우리 안에 영이 살아나지만, 그것은 마치 씨앗에 숨겨진 씨눈처럼 아주 작고 무력합니다. 씨앗을 그대로 두면, 씨눈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 우리 속에 있는 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씨앗이 흙 속에 심겨져서, 씨눈이 흙 속에 있는 수분과 양분을 만나게 되면, 그 때에야 비로소 씨눈은 무럭무럭 성장하여 나무도 되고 열매도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하나님께 심겨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심겨질 때, 우리 속에 있는 영이 무럭 무럭 자라, 나무도 되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맺습니다.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이라는 토양에 심겨지는 데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은 마치 씨앗에게 있어 대지와 같습니다. 대지에 심겨지지 않는 한, 씨앗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씨앗에게 주어진 생명은 피어나지 못합니다. 이처럼, 인간도 하나님이라는 대지에 심겨져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심겨지지 않은 인생은 마치 길바닥에 나뒹굴며 태양 빛에 말라가는 씨앗과 같은 신세입니다. 그렇게 하여 지나가는 새나 다람쥐의 먹이가 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만, 씨앗에 담겨진 그 무한한 가능성을 생각하면 아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 심겨지지 못한 인간이 그렇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그럭 저럭 잘 살 수 있지만, 그러나 인간이 인간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인생이 참된 생명으로 변화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토양에 심겨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토양에 심겨지면, 우리 속에서 잠자고 있던 혹은 죽어 있던 영이 활동을 시작합니다. 씨눈이 흙에서 수분과 양분을 섭취하여 자라듯, 우리의 영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자라갑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고, 하나님의 사랑을 흡수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빨아들입니다. 그렇게 할 때, 처음에는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약하던 영이 점차 강하게 되고, 나중에는 육과 혼을 다스릴 정도로 강해집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거쳐야 할 변화요 성장입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우리의 영이 충만히 자라서 마음과 육신이 영의 지도에 순종하여, 온 몸이 하나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는 상태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씨앗이 대지에 심겨져서 나무로 성장한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씨앗이 대지에 심겨지는 것을 ‘씨앗의 죽음’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듯,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대지에 심기는 것을 ‘인간의 죽음’ 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은, 그런 면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대지에 심기게 되면, 그 동안 즐기던 일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막 8:34)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죽음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머뭇거립니다. "지금 믿기에는, 즐길 것이 너무 많고, 나는 너무나 젊었다"고 말하면서, 즐길만한 것이 모두 고갈되고, 즐길 기력도 모두 쇠진하면, 그 때가 되면 혹시 믿을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믿는다고 하는 분들 가운데도 적당한 선에 멈추어 서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려는 분들이 계십니다. 비유하자면, 씨앗이 땅에 심겨지기는 했는데, 물기가 없는 얕은 땅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땅 속 깊이 심겨지기는 했는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대지의 열기와 습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씨앗은 대지의 열기와 습기를 피할 수 없지만, 인간은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향력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지에 심겨져 있는 것만으로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분에게 자신을 활짝 열고 모두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분이 분해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분해하도록 맡겨야합니다. 나를 지키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잃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 마음껏 분해하도록 할 때, 우리는 진실로 우리 자신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2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말씀으로 인해 놀라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예수님의 특별한 어법입니다. 그분은 특별히 강조하려는 부분에서 전혀 익숙하지 않은, 이상한 표현을 사용하곤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을 듣고 잊어먹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라"는 표현으로써 강조하려 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즐기던 쾌락을 미워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서 즐기던 것들을 멀리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대지에 심겨져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 가는 것, 바로 그 삶이 곧 영원한 삶이라는 뜻입니다.

5.

얼마 전, PBS에서 방영하는 Religion and Ethics Newsweekly라는 주간 종교 뉴스는 페루에서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토니 라자라(Tony Lazzara) 박사의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현재 63세의 이 의사는 약 25년 전만 해도 아틀란타에 있는 에모리 대학교(Emory University, Atlanta) 의과대학에서 진료하고 가르치던, 잘 나가던 소아과 의사였습니다. 특히 그는 신생아의 뇌수술에 있어 권위자였습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아주 편안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아주 좋은 스포츠카도 가지고 있었고, 고급 가구로 채워진 콘도미니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있었지만, 진실로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I was living on easy street. I mean, I had a nice little sports car and I had a nice condominium with fancy furniture, but it didn't mean anything. It was there, but it didn't really mean anything.)

그는 의미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찾았습니다. 그는 의과대학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만,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시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신생아실의 Intensive Care에 있던 한 어린이의 뇌수술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수술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 아이를 살려만 주십시오. 그러면 예배에 다시 나가겠습니다." 기도의 응답인지 어떤지 모르지만, 그 아이는 살아났고, 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20여년 만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뿐이었습니다. 예배 참여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몇년 후, 또 한 번의 어려운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정보다 일찍 태어난 미숙아 신생아에게 도뇨관(catheter)를 넣는, 아주 어려운 수술이었습니다. 수술이 실패하면, 그 아이는 생명을 잃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 이번에 이 아이를 살려 주시면, 이제 저를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그 수술은 성공했고, 약속대로 그는 영적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대지에 깊이 심어지도록, 예수님의 손에 자신을 드렸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마음대로 하시도록 활짝 열었습니다. 그 이후, 그의 믿음은 회복되었고, 하나님의 신비로운 인도하심에 이끌려, 지금은 페루의 한 슬럼가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벗으로, 친구로, 의사로, 아버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일하고 있는 한 사람이 기자에게 말합니다. "라자라 박사는 자기 신앙에 대해 말하는 일이 별로 없지요. 하지만 그는 매일 저녁이면 기도회에 나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 일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한답니다." 기자는 라자라 박사에게 "당신에게 있어 행복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라자라 박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합니다.

만일 라자라 박사가 아틀란타에 그대로 남아 대학 병원에서 일하면서 고액 연봉의 의사로 유명세를 날리며, 좋은 집에, 좋은 차에, 고급스러운 여가 생활을 즐기며, 풍족한 노후 대책까지 세워놓고, 하루 하루를 즐기고 있었다면, 그는 한 알의 밀알로 남아 있을뻔 했습니다. 물론, 아틀란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로서 대학 병원에서 가르치고 진료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느 도시에서든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학 병원에서의 연구와 진료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더라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다만, 그것이 전부이고, 그것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편안하고 안락하게 누리며 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랬더라면 그는 밀알 하나로 남아, 그 안에 있는 생명을 끝내 죽 게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라자라 박사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토양에 심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주저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 돌아가기는 했으나, 그분에게 자신을 완전히 열지는 않았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분에 의해서 변화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한 조숙아를 통해 라자라 박사를 무장 해제시키셨습니다 (disarmed). 결국 그는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분이 이끄시는대로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그의 영성은 자라가기 시작했고, 그 영의 이끌림을 받아 그는 지금, 세속적으로는 불행해 보이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기 전, 페루의 빈민가에 가서 봉사하며 살라는 요청을 받았다면, 뭐라고 말했을까요? 필경, "그거 참 좋은 일이기는 하나, 나는 아니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자신이 그 때까지 누리고 있던 모든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고 그의 영성이 회복된 지금, 그는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로 누리던 성공의 삶을 불행했던 기간으로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에 아무런 미련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섬기는 것 외에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6.

라자라 박사에 비하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대지에 심기기는 했으나 아직 싹을 내지 못하고 있는 씨앗과 같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라자라 박사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예배는 드립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없습니다. 더 이상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히게 되면 신세 망칠까 두려워, 적당한 선에서 머뭇거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을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분께 더 가까이 다가가 자신을 열고 그분께 맡기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신비로운 손길로 여러분을 지속적으로 깨우실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무너져 "하나님, 당신이 이겼습니다.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할, 그 날이 올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스스로 자원하여 그분 앞에 무릎을 꿇으면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혹은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열어 마음껏 자라고 변화하고 싶지만, 뭔가 잘못되어, 변화가 더딘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요즈음 ‘특별기도학교’를 통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열고 맡기는 삶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반응에 매 주일 놀라고 있습니다. 영적 삶에 대한 우리 성도님들의 열망이 이렇게 뜨거운 줄 몰랐습니다. 제가 안내하는 것들을 기쁘게 그리고 남김없이 흡수해 들이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거기에 여러분의 실천력까지 덧붙여지면, 여러분의 영성은 무럭 무럭 자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가면, 세상적으로는 죽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말씀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26절). 우리가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 다른 무슨 바램이 있을까요?

오, 주님! 우리 모두에게 이 삶을 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