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 5. 21 최지훈 전도사(1부) 문형일
전도사(2부) 홍인표 목사(3부)
차동빈 목사(4부)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
롬 6:1-11
얼마 전에 어느 유명한 골프선수가 도박으로 오천만불 이상의 빚을 지고 있다고 고백해서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한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부와 명예를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화려함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어두운 그늘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지난 10여년 동안 항상 빚을 갚느라 허덕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계속 더 큰 돈을 잃었습니다. 한번은 작년 가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한 대회에서 2등을 해서 무려 75만불의 상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곧바로 라스베가스로 차를 몰았습니다. 그리고 다섯 시간만에 165만불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쯤 되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결국 자기 인생은 망하고 말 것이라고 말한
것을 봅니다.
이 사람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내적인 자유가
없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합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려고 합니까? 그 안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참 생명을 찾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많은 사람들도 참된 자유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어느 사람이 예수께 와서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을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하였느냐?" "예,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우리를 가장 자유하게 하고 살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데에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을 깊이 순종하는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서 삶을
지어가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가장 자유하게 하는 길인데, 가장 옳은 길인데
어디에선가 그것을 택할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는 알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매일 다가오는 수많은
선택 속에서 그 반대를 택합니다. 열심히 살지만 하나님을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이미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 때 사람은 참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한 사람이 불순종한 것이지만 사실 그 안에서
그 자손된 온 인류가 죽었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사람은 어딘가 왠지 모르게 하나님을 향해 살아있지 않고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실제로 한 사람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처럼 한 사람 나사렛 예수께서 끝까지 그리고 온전히 순종하셔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6장부터의 말씀은 그렇다면 이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데에 생명이 있는데 은혜가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몇 가지 깊은 진리들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알아야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한 번 죽고 새 인생을 산다고 여기는 분 계십니까? 분명한 사실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된 사람은
그의 죽으심과도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세례받은 사람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에 아무리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당해도 내가 등을
돌려버리면 전혀 나와 상관 없는 것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픔을 겪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곳 나의 아픔입니다. 그 사람이 죽을 때 내 안에 한 부분이 죽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죽은 사람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죄에 종노릇하던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습니다. 심지어는 오늘 본문은
그와 함께 묻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체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부활을 체험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여기에 참 자유의 길이 있습니다. 죄를 이기는 길이 있습니다. 나의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사는 것입니다. 다시 살되 다시는 죄에 종노릇 하지 않는 새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셨으니 너희는 깨닫고 죄를 떠나도록 노력하라"가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믿는 우리의 죽음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죄의 지배에 놓여있던 우리의 말하자면 옛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죄는 죽은 사람을 다스릴
힘이 없습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이제는 죄의 능력과 정죄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사는 삶은 새로운 삶입니다.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삶입니다. 하루 하루가 주님의 은혜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2:20)
저는 이번 사순절 동안에 생각지 못한 곳에서 이 진리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에
관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면서였습니다.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숨이
끊어진 예수의 몸을 안고 한 여인이 하늘을 우러러 절규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장면보다도 제게 더 진실을
보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묶고 있던 죄의 권세를 깨뜨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지 모릅니다. "내 옛 사람이 죽은 것 같지 않은데요. 나는 아직도
유혹과 죄책감과 싸우고 심지어는 매일 죄를 짓는데요." 그렇지요. 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단순한 세례가 아니라 세례가
참으로 의미하는 회개의 결단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돌아서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죄를 버리고자 하는 결단도
없는데 어떻게 죄를 이기겠습니까? 병을 고치고자 하는 의지가 없고 의사를 찾아가지도 않는데 어떻게 병이 고쳐지겠습니까?
깊은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가 깊을수록 새 생명은 더욱 충만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11절 말씀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좀 더 정확한 표현은 "…그러한 사람으로 여겨야 합니다"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지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나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그리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았다고
여기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유혹이 다가올 때마다, 두려움과 죄책감이 위협할 때마다, "어리석고 이기적인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삶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세례 예식이 있습니다만 세례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대답해야 할 세 가지의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물음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악한 영적 세력과 세상의 악을 버리고 진정으로 당신의 죄를 회개합니까?"
두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모습의 불의와 악을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능력을 받아들입니까?"
그리고 세번째는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고백하며 온 마음으로 그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그를 당신의 주님으로
섬기겠습니까?" 이 길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마련된 자유와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영광의 부활로
다시 사신 것처럼 우리도 새 삶속에 행하기 위함입니다. 이 진리를 우리 삶속에 이루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오늘 5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한
자가 될 것입니다 (for if we have become knit together with the very likeness
of his death, we shall certainly also be knit together with the very
likeness of his resurrection)."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
삶 속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이 어떤 것이라고 꼭 집어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육신의 연약함일 수도 있고 환경의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포기해야 되는 상황이나 커다란 아픔일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독신
생활일 수도 있고 나그네 생활일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우리의 교만과 욕심과 자아 의지(self-will)를 죽이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부활을 체험하며 삽니다. 약함을 경험할수록, 죽음을 거칠수록, 오히려 그
전까지 불가능했던 새 삶을 경험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갖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그런데-그러한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떼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은 실제로 깊은 절망과 고난을 거쳐서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새 생명의 힘으로 거듭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가까이 오십니다. 저는 한국 최초의 신교 순교자라고 알려진 로버트 토마스 (Robert
Jermain Thomas) 목사의 전기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제네랄 셔먼 호에 통역관으로 동행했다가 배가 공격을 받으면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금 평양 과학기술대학이 지어지고 있는
그 자리에 토마스 목사 기념 교회가 서 있던 자리라고 합니다. 사실 그는 조선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중국 상해로 파송되었던
선교사였습니다. 막 결혼한 아내와 함께 넉 달이 넘는 긴 항해를 거쳐 중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의 구태의연한
사역과 선임 선교사의 배려 없는 요구들로 고생하던 중 사랑하는 아내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불안과 유산의 충격이 겹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자신의 선교 의지때문에 아내가 희생되었다고 생각하니 고통스러운 회의감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의 슬픔은 이성적인 자제력을 잃을 정도가 되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동역하던 선교사의 무례한 월권 행위와 모함이 점점 심해지자 그는 끝내 비통한 마음으로 선교회에 사표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장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통역관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주변에
놀랍게도 전도의 기회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믿게 된 사람이 하나 둘씩 모었습니다. 절망의 큰 홍수가 휩쓸고 간
깊은 골짜기에 복음에 대한 의지가 새롭게 생기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멀리 조선에서 온 두 천주교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토마스 목사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는 성서공회원의 자격으로 성경을 가지고 당시 박해가
극심하던 조선으로 떠났습니다. 수 개월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오직 복음을 위해 수 천 킬로미터를 여행하였습니다. 황해도와
평안도를 여행하는 동안 성경을 나누어 주며 수 많은 한국 말과 그 뜻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가 두 번째 한국 선교 여행
중 순교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7세였습니다.
그가 자신을 죽이려는 병사에게 성경을 전해주고 기도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절망을 딛고 일어났던 그의 삶에 예수가 계셨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빌 3:10-11) 마찬가지로 전에는 부끄러움의 이유였던 고난과 연약함과
겸손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길은 좁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셔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하십니다. 내 힘으로는 버릴 수 없는 나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소멸되게 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내가 죽고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하는 일을 과연 할 수 있겠습니까? 빌립보서 3장에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같이 생각하십시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참 중요한 말입니다. 넘어진 것은 넘어진 것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그것들은 십자가 밑에 내려 놓고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지낸
바 된 것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이제 내게 새 삶을 주신 하나님을 선택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을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고 끝까지 하나님께 순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다시 태어났더라면 하는
후회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전의 나의 아픔을 가서 되돌려 놓을
수는 없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으로 새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은 심지어는 내가 전에 가졌던 아픔도, 슬픔도,
어려움도 모두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게 하시고 진정으로 나를 새로운 부활로 나오게 하실 권세가 있으십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 여기십시오." 그리스도의 죽음을 여러분의 죽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스도의 부활을 여러분의 새 삶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자유인으로 참 생명 안에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주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우리를 주님께로 부르심을 감사드립니다.
성령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 속에 세례와 함께 주님과 맺은 언약을 새롭게 하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주신 소명을 감당하게 하시옵소서.
영원히 만물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