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10.23 최지훈 전도사
"사랑을 위한 포기"(Letting Go for Love's Sake)
"
마태복음 10:37-39
오늘은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많은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마음에 부담을 느끼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왜 이런 어려운 말씀
을 선택하여 설교하려 하는지 (특히 오늘처럼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이 만남을 가지는
주일에 이러한 말씀을 전하는 지) 의아해 하실 분도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기는 어떤 소위 강도 높은 말씀을 특별히 이야기하고
싶은 개인적인 야심은 없습니다. 설교자에게도 전하는 말씀을
순종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단지 저로서는 오늘 이 복음서의
가르침을 말해야 한다는 제 마음의 부담을 도저히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것을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심지어는
한 가족 안에서도 갈등이 생길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어떤 취향이나 기호의 문제가 아닌 삶의 의미를
좌우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져오는 갈등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갈등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은 양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예수께서는 좀
더 원리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 그리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합당하지 않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 배경을 참작하더라도 쉽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중요하고 그것이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씀은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인륜까지 포기하고 당신을 선택하라는 말씀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어느 젊은 어머니가 저에게 한 번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지금 내 아이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라고 하는 것은 내게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가족조차도 둘째가 되어야 하며 중요하지 않고 심지어는 희생하여도 마땅하다는 뜻입니까?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교회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가족을 전혀 돌아보지 않기로 한 사람들의 소식이 종종 들립니다. 일에 빠져서 관계를 소홀히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일부가 되어서 "주님을 위한 내 앞길을 막지 마라" 하면서 오직 교회나 선교에 생애를 바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서 반드시 그러한 결론을 끌어 낼 수는 없습니다.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부모나 자식을 포기하거나 소홀히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그 분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며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디를 가나 가정을 파괴하는 종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자기...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그는 믿음을 배반한 자이며 불신자보다도 더 악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까지 갈등을 가져오는 주체를 어떤 일이나 집단이 아닌 바로 본인 자신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무슨 수를 써서든지 맹목적으로 자신에게 묶어 두려는 마치 어떤 cult의 지도자와 같은 사람입니까? 오늘날도 자살 폭탄을 감행하는 수많은 테러집단이 추종자들에게 그러한 희생을 요구하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경우에는 미국에 살고 있는 모슬렘이라도 개종하는 자에게는 죽음의 위협이 따라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은 도저히 그러한 모습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권세욕과 이기주의에 사로잡혀서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맹신을 요구하는 사람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사랑과 용서와 진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이런 것들을 뜻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저 강조하기 위해 쓰신 표현이라거나 아니면 소수의 특별히 선택된 제자들을 위해 하신 말씀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것을 무시하는 대가가 너무나 큽니다.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적합하지 않다"! "내게 적합하지 않다"? 어느 미국 대통령이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 한 번은 말하기를 "나는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시간을 지켜 일하고 휴가를 꼬박꼬박 찾아가며 일하는 사람은 내 스태프에 필요하지 않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좋건 나쁘건 간에 나하고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의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당신께 합당하지 않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과연 예수가 어떤 분인가 하는 질문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단지 2000년 전에 살았던 어느 한 훌륭한 선생, 어느 한 사람으로서 따르고 사랑하라고 이해하기에는, 마치 내 가족을 향한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옆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예수님은 당신을 그 이상으로 표현하신 말씀을 너무나 많이 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부활이며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며 내 아버지로부터 보고 들은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느 한 사람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역사적인 인물이셨지만 예를 들어 그의 머리 색깔이 어떠했는지, 키가 어느 정도였는지, 누구의 아들이었는지, 심지어는 얼마나 훌륭했는지 하는 인간적인 관심으로 우리는 그 분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또는 그 분의 삶과 죽음을 가장 실제적인 모습으로 영화 속에 재연해 보는 것이나 또는 소위 성지를 찾아가 그가 걸으셨던 곳을 나도 걸어보고 싶은 그러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있을 지 모르나 우리의 주된 관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만나게 하시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진리와의 만남이며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술을 평할 때 "가장 토속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말이 있듯이 2000년 전에 유대 땅에 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한 사람 안에는 오히려 한 개인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도록 하는 진리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부르심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고 만난 사람은 결코 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에게 오셨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6-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영광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곳은 십자가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른 모든 선입견을 내려놓고 한 번 십자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의 거창한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눈을 들어서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한번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곧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이 가지셨던 믿음으로 나의 믿음 없음을 덮어 주시고 주님의 순결함으로 나의 거짓됨을 씻어 주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나의 사랑 없음을 덮어 주옵소서." 십자가의 주님 앞에서 나의 아집과 교만을 내려놓고 거듭날 때 우리는 사실은 나의 아버지도, 나의 어머니도, 나의 아들도 딸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오늘 하신 말씀, 즉 부모나 자식보다도 당신을 더 사랑할 것이라고 말하실 수 있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사랑하라는 뜻 중 하나는 곳 그럼으로써 참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도 나에게 가장 친숙한 관계 속에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는데 무심하고 그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자녀를 대하는 나, 아내나 남편을 대하는 나, 심지어는 나를 대하는 내 안에 더욱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우리 스스로와, 또 이웃과 화해하게 하시는 진리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곁에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참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진리이신 하나님의 모습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의로우신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과의 중재자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나와의 중재자라는 말은 결국은 그리스도는 나와 모든 사람과 이 세상의 모든 것 사이의 중재자가 되셨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누구를 만나던, 무엇을 가지던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참된 만남이 될 수 있으며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없이는 나의 모든 관계에서 결국 나의 외롭고 이기적이고 소유적인 모습을 뿌리뽑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무엇을 가져도 그 자체로 참된 만족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겉모습은 멀쩡하나 서로와 세상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여기 모두가 단정하고 차려 입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뚜껑을 열어 보면 전부 다 어딘가에 아픔이 있고 깨어진 관계가 있고 뛰쳐나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나마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치유를 경험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픔들이 우리가 사랑하지 않아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사랑하기 때문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잘 해 보려고 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어느 상담 교수이자 목사님께서 부부가 갈라지는 것은 많은 경우 서로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서로와 함께 살기가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에서 우리의 아집과 욕심을 골라내고 진실로 믿고 참으로 용서하게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힘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이 바로 그 힘입니다.
우리의 삶의 경험으로 보아도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사이에 오히려 자기 부인이 필요하고 신뢰가 필요합니다. 그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상대방을 원하고 사랑하는 것 그 이상의 제 3의 무언가가 있어야 함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도 그 사람과 내가 진정으로 만날 수 있게 하는 무언가의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사랑하는 자식들에 대해서 오히려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습니까? 모든 것을 다 주고 생명까지 줄 수 있을 것 같지만 이제는 그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사실 해 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때가 옵니다. 우리는 나의 가장 가까운 관계보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사실은 그들이 마음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는 참 생명이시기 때문에 이 천국의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심지어 가족간의 갈등과 아픔을 감내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제자 됨의 대가를 가볍게 생각하거나 영적으로만 해석해 버려서는 안됩니다. 아, 결국 주님께서 모두 화평을 이루시겠구나 하고 넘어가는 것은 오산입니다. 얼마 전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체험을 한 어느 집사님의 간증 속에서 그 분이 예수를 믿게 된 후 아내에게 쓴 편지 중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내 안에, 그리고 당신과 나 사이에 천국이 있어요."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 천국을 소유하고 소유하지 못하는 차이가 심지어는 한 집안 식구끼리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단번에 온 세상에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실 안타까운 말씀으로 내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을 주러 오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만일 가족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중 불가피하게 양자 택일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McLean Bible Church의 Lon Solomon 목사님은 유태인인데 예수를 믿고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92년에 그 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이야기를 한 번 하셨는데 희한한 것은 그 이모들, 즉 돌아가신 어머니의 누이들이 장례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연락이 오기를 "네가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계속 믿는 한 너는 장지에는 와도 어머니의 장례식에는 오지 못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머니의 장례식인데 기가 막힌 일이었지만, 시늉이라도 예수를 부인하면 제일 앞자리가 자기의 것이건만, 결국 그 분은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시기 일 주일 전에 그 어머니는 예수를 주로 영접하셨습니다. 분명히 천국에서 "아들아, 잘했다.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고 말하시는 어머니를 본다고 말하신 적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정과 자아의 욕심은 너무나 끈질깁니다. 그렇기에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게 오려거든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본의 아니게 복음을 위해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 희생을 겪는 결과도 생깁니다. 아니, 사실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부르심은 준엄한 것입니다.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분명 전폭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바로 거기에 참 생명이 있고 참 자유가 있고 기쁨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저와 함께 켄터키에서 공부한 사람 중에 이철호 전도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재작년 1월 달 미네아폴리스에 갔더니 거기서 공부하면서 열심히 학생들을 데리고 사역하고 있었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중국 선교사가 되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친구가 제가 섬기던 교회에 와서 이런 간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학생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자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공부해야 하니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교회에 가는 것을 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이미 교회가, 아니 예수님이 이미 그의 생명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녀오고 나면 어김없이 아버지가 매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도 아닌 고등학생이 매 주마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영혼이 불쌍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날도 매를 맞고 나서는 너무나 설움에 겨워서 '내가 왜 이렇게 매일 맞으면서 예수를 믿어야 하나? 이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기장을 붙들고 쌓였던 원망을 쏟아놓으려고 하던 찰나에 성령께서 갑자기 마음을 사로잡으셔서 대신 아버지를 위한 용서와 간절한 기도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 어머니가 방을 치우다가 그 눈물 자국이 가득한 일기장을 발견하고 아버지에게 보여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날부터 아버지는 마음을 돌리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이전도사가 가는 목회의 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나중에 이야기하기를 자기가 이런 간증을 하면 사람들은 자기 아버지를 아주 거친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누구보다도 인격적이고 고상하신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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