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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18. 정진호 교수

“시온의 대로"

시편 84편 1-7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하나님께서 올해 저에게 주신 말씀은 <떡-잔-집>이라는 세 가지 주제입니다. 코스타 집회나 부흥회에서 가는 곳마다 이 세 가지의 말씀을 시리즈로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하나가 너무나 중요한 성경의 주제를 담고 있기에 하루에 다 말씀드리기는 벅찹니다. 더욱이 시간이 제한된 주일 아침에는 가장 중요한 떡 이야기조차 말씀드릴 수 가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순서를 바꾸어 마지막 집이야기를 먼저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내일은 떡과 잔을 섞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급할 때는 영화도 끝 장면부터 보고 다시 처음부터 보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정신만 차리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황순원씨가 쓴 <카인의 후예>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담은 소설입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갑니다. 이 땅이 네 동생 아벨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이제는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하여도 그 땅이 소출을 내지 않을 것이며 너는 유리 방황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이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북한 땅은 지금도 아벨의 피가 흐르는 땅입니다. 두만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중국은 해마다 풍년인데, 그 땅은 먹을 것이 없어 유리방황하며 헤매는 꽃제비들로 가득합니다.

카인이 에덴 동쪽 놋땅에서 처음 한 일은 에녹이라는 이름의 성을 쌓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너를 죽이지 못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하나님을 떠난 카인은 그 말씀을 믿지 못하여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인류는 자기가 만든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원래 집이라는 단어는 헬라 어로 오이코스(oikos)라고 합니다. 이 단어에서 Ecology, 즉 생태학이라는 단어가 파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사람에게 만들어주신 생태환경은 너무나 아름답고 먹을 것이 풍족한 에덴동산이었습니다. 그 러나 그곳에서 스스로 도망쳐 하나님을 등지고 멸망의 길, 죽음의 길을 걷게 된 인류는 죽음과 굶주림을 피해 유리방황하는 나그네 인생, 나그네 실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인생을 나그네 길로 보고 있습니다. 베드로서에도 사도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하노라고 서문을 달고 있고 역대상 29장 15절에서도 우리 인생은 잠시 머물다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은 나그네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는 우상을 만들고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데라의 집, 우상을 섬기는 육신의 아비의 집에서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불러내십니다. 네 아비의 집에서 나와라! "Get out of your father's house"

우상을 섬기는 아비 데라의 집에서 끌어내어 우리를 나그네 인생으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새집, 가나안 땅, 천국의 도성을 향해 걸어가도록 명령하십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근심에 싸인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마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
그렇습니다. 결국 성도의 삶이란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사가는 것"입 니다. 우상을 섬기던 육신의 집에서 떠나 영원한 천국 예수님이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그 아버지의 집,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는 시편 기자의 절절한 심정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How lovely is your tabernacle!"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나그네 인생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집의 모형을 짓도록 만드십 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짓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을 담아놓은 성전 건축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실낙원 이후 거짓 성전을 짓고 살아가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루시고 애굽의 종살이에서 다시 불러내어 광야에서 성막을 짓게 하십 니다. 그 당시 성전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움직이는 성전이었습니다. 그 성막은 다윗 시대에 이르면 인간의 소욕에 의해 성전 건물로 땅 위에 고정되어 붙박이 성전이 되어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성전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하나님이 그 성전밖을 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파수꾼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하 7장을 보면 백향목 궁전에서 호화롭게 지내던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이 여호와를 위해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간청하는 장면이 나옵 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웃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어찌 네가 나를 위해 집을 짓겠다고 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지어주리라." 하시며 장차 다윗의 자손으로 나타날 참 성전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에 대한 유명한 예언을 해 주십니다.

저는 이 성경대목을 읽을 때마다 어린 시절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지금은 어버이날로 바뀌었지만 그 때는 어머니날이었습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동생 셋과 함께 끙끙대며 의논을 하여 사다드린 선물이 커다란 바나나 한 송이였습니다. 그 때만 해도 바나나가 무척 귀한 시절이었거든요 . 아무튼 어머니는 그 바나나를 보자 웃으셨습니다. 그러나 무척 좋아하셨던것 같아요. 결국 그 바나나는 우리 네 형제가 다 먹어버리고 말았죠.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다고 교회를 짓고 교회 안에서 행하는 대부분의 일들이 이와 같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들을 바라보시며 용납하고 계실 뿐이죠.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솔로몬의 성전도 무너져 내리고 바벨론의 포로생활 70년 후에 다시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지고 또 그 성전도 무너져 내리고 다시 헤롯 성전이 세워지고.... 이렇듯 인간의 역사는 불완전한 성전을 짓고 또 허무는 그런 역사들을 반복해왔습니다. 그 같은 모든 거짓 성전의 역사를 종식하고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참 성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렇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의 옆구리에 찔린 창과 함께 물과 피를 쏟아져 나오는 그 순간, 신랑 예수의 신부 되신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마치 아담이 깊이 잠든 후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옆구리에서 피묻은 손으로 신부 하와를 끄집어내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반드시 이 같은 피 흘림과 희생의 현장에서만 탄생합니다. 초대 교회의 피 흘림의 역사나, 복음이 들어가고자 하는 곳마다 순교자의 피가 흘렀던 세계 선교의 역사를 회고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조선반도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의 피흘림의 터 위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지고 40년 후에 평양 대부흥이 일어난 역사를 기억하십니까? 놀랍게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기념하여 세워졌던 기념교회의 터 위에 평양과기대가 세워지고 있음이 밝혀졌습 니다. (그 사실을 듣고 평양과기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와 부흥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팔복의 김우현 감독은 토마스를 파송했던 웨일즈의 교회까지 찾아가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것과 함께 만든 제 책이 규장 출판사에서 <멈출 수 없는 하늘의 열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어떻습니까? 한국 교회에 아니 이민 교회를 포함해서 이런 피 흘림과 희생이 있습니까? 자신이 받은 축복만 계수하며 자신이 먹을 떡만 챙기며 안이하게 살아가는 웰빙 크리스천들 속에서 진정한 예수의 제자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과연 진정한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다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참 교회는 광야의 성막과도 같이 움직이는 성전이 되어야만 합니다. 교회는 모빌리티(MOBILITY)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을 향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움직이며 달려갈 수 있는 교회, 그것이 참 성전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꾸만 교회를 자신의 욕심을 따라 고착화시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신학자 중에 벤쿠버 리전트 칼리지의 폴 스티븐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쓴 나머지 6일(The other six days)라는 책을 보면 진정한 예배는 교회 건물 안에서 주일 하루 드려지는 것만이 아니라 나머지 6일 동안 성 도의 삶의 현장에서 드려지는 산 제사(living sacrifice)가 더 중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교회를 세상과 분리하여 생각하는 이원론을 질타하면서 그는 루터, 켈빈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이 구원론의 관점에서는 개혁을 이루었지만, 교회론의 관점에 서는 절반의 개혁 밖에는 이루지 못했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희가 가서 일하고 있는 연변과기대나 지금 짓고자 노력하는 평양과기대도 하나님이 거하시는 교회를 짓는 것이요, 그 속에서 일하는 행위 역시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저희가 연변과기대에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진정한 아버지의 집을 알지 못하고 유리 방황하던 그 연변의 중국 학생들에게 집을 지어주러 간 것입니다. 과거에 개방이 되기 전에는 그래도 오순도순 가족끼리 사랑하며 살던 연변의 조선족들이 요즘은 물질 우상 숭배가 들어온 이후 가정이 다 깨져버렸습니다. 돈 벌러 부모 들이 한국으로 러시아로 간 후, 더러는 부모가 이혼하고 엄마 얼굴을 7-8년 동안 못 보았다는 아이들이 허다합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술 마시고 여자에게 손찌 검하고 노름하며 지내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가정의 존재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저희가 찾아가 진정한 그리스 도인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의 생각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연변과기대에서 5년간 함께 일했던 김동구 교수라고 있습니다. 제 대학시절 술친구였는데, 둘 다 뒤늦게 예수 믿게 된 이후 미국 LA에서 살고 있던 이 친구를 초청하여 함께 일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부가 대학 생활관 기숙사에서 학생들을 사랑으로 섬기는데 정말 대단한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학생들 가운데 에는 말썽꾸러기들이 워낙 많으니까 김동구 교수가 기숙사 사감을 하는 동안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학생들이 학교를 벗어나 술 마시고 패싸움 벌이는 사고를 치면 경찰서에 붙들려가서 전화가 옵니다. 그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경찰서로 달려가 학생들 대신 사과하고 돈 물어줄 것은 물어주고, 학생들이 구치소에 들어가지 않도록 겨우 풀어내서 술이 곤드레만드레 된 학생들을 기숙사로 끌고 옵니다. 술 취한 아이들을 그 상태에서 일단 기숙사에 데리고 와서 그냥 재웁니다. 아침에 깨고 나면 사고를 친 학생들은 어제 일이 생각나 서 겁을 먹고 교수님 앞에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김동구 교수는 한마디도 안 하고 학생들을 시내의 좋은 식당으로 데리고 갑니다. 음식을 시켜서 먹으라고 한 다음 먹고 싶을 때까지 다 먹입니다. 야단맞을 각오로 온 학생들은 교수가 좋은 음식을 사주니 어리둥절할 하죠. 먹으면서도 음식이 계속 목에 걸리겠죠. 다 먹고 나면 언제 야단칠까 싶어 눈치만 보고 있는 그 학생들을 다시 목욕탕에 데리고 갑니다. 함께 목욕하며 깨끗이 씻기고 난 후 그냥 기숙사에 데리고 올라와서 말없이 학생들을 그냥 돌려보냅니다. 아이들은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런 일을 한 번 겪고 나면 이 학생들의 인생이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비로소 아버지의 큰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평양과기대를 짓고 하고자 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들어가 집을 지어주고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자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저는 이 일이 단순히 대학을 짓는 차원을 넘어서서 성전 회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여 이 프로젝트를 "스룹바벨 프로젝트"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과거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성이 교회가 다 무너져 내리고 우상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저희가 요즘 평양과기대를 짓기 위해 한국과 세계에 흩어진 이민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호소하고 있는데 참 어려움이 많습니다. 국제적인 정치 경제의 어려움 속에서 크리스천들조차도 좀처럼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러 는 보수적인 생각을 지닌 분들은 그들은 우리의 적이요, 원수들인데 왜 우리가 그 들을 도와야 하는가 하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어도 우리 크리스천들은 달 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크리스처니티의 본질은 손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반드시 십자가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드려 우리들을 먹이시고 살리신 것처럼, 우리가 가진 떡들을 내놓지 않는다면 결코 우리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기업 무를 자이기 때문
둘째,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 속으로 들어가는 기회이기 때문
셋째,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 예화... 인도네시아 선교사 이야기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던 무리들은 어제 먹은 떡을 생각하며 그 다음날 예수를 찾아 나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천 년 전에도 예수님 주변에는 수많은 무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찾아 몰려드는 무리들을 향해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도전합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

- 휴스턴에서 겪은 간증(믿음이란 무엇인가)
- 일본 코스타에서 깨달은 간증(까마귀와 독수리)
- 독립투사(희생과 헌신)

시온의 대로는 하이웨이처럼 곧게 펼쳐진 평탄 대로가 아닙니다.
그 길은 나그네길(pilgrimage)요, 눈물 골짜기가 기다리고 있는 길이기 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걸어가며 날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를 하나님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그네 길이 끝나는 날 우리는 각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신이 걸어 온 인생길에 대해 평가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