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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7. 문형일 전도사
"나그네에게 슬퍼 할 권리가 없는 이유"
예레미야 29:4-14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들은 우리가 사는 동안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우리들은 이 와싱톤에서. 그러나
가장 힘든 일은 외국에 포로로 잡혀간 것보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
그리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예레미야 선지자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있는 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희망이기에
우리 나그네들은 결코 슬퍼할 권리가 없습니다.
나눔의 생각들
1. 당신이 겪은 고난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2. 그 고난을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3. 하나님과 당신의 고난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4. 고난이 당신의 삶과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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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이태리에서 태어나 1921년에 사망한 이탈리안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는 자신의 음성을 음반으로 남긴 최초의 음악가로 당 시대 다른 테너가수들은 도저히 낼 수 없는 높은 고음과 강한 소리로 미국과 유럽의 유명 오페라단을 순회하며 공연하던 그 당시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으며 잘나가던 가수였습니다. 얼마나 그가 유명했는지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이 카루소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카루소 자신도 모든 사람이 자기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그가 차를 운전하고 뉴욕주의 시골을 달리다가 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자동차를 길에 세우고 가까운 농가에 들어가 도움을 청하게 되었는데 비상 수리 차가 올 때까지 그 농가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농부에게 자기 이름을 소개했습니다. “제 이름은 엔리코 카루소입니다.” 그랬더니 그 농부가 반색을 하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카루소요?” 제 평생에 그 유명한 “로빈슨 크루소를 만나게 되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영국의 작가 다니엘 디포의 소설에 나오는 가상의 인물이지 실제 인물이 아닙니다. 이 농부는 엔리코 카루소와 로빈슨 크루소를 혼동한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혼동은 엔리코 카루소 그 자신에게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유명한 자기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카루소에게 이 농부의 착각은 마치 요즘처럼 더운 한 여름, 등에 붓는 찬 물 한바가지 같은 경험을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착각은 자유라는 말이 생겼는지 모릅니다.
I.
그렇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렇게 착각하며 살 때도 있고 또 그 착각을 깨게 해주는 일들을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확인하는 순간들이 대부분 카루소 처럼 시골길을 가다 만나는 자동차의 고장 같은 고난과 아픔 혹은 불편함으로 오는 것을 또한 인정합니다. 일상적인 병원check-up을 위해 병원에 갔다가 의사로부터 갑작스런 암의 진단을 받을 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만나는 돌발적인 사고, 예고 없이 갑작스런 감원으로 생기는 실직의 경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나 가족의 죽음, 그리고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할 수없이 선택한 기러기 가족 생활이나 외국으로의 이민, 그리고 오랫동안 일하던 직장에서 은퇴하고 난 후 우리들은 모든 조건과 환경으로 우리들을 싸고 있던 우리들의 겉껍질이 떨어져 나간, 그래서 속 사람만 남은 실제의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아들 일곱과 딸 셋, 그리고 양 칠 천 마리 낙타 삼천 마리, 겨릿소 오 백 쌍, 암 나귀 오 백 마리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동방에 살던 부자 욥, 그의 껍질이 다 없어진 후 고백한 그의 진짜모습이 이렇습니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 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창세기 47장 9절에 야곱은 바로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년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야곱이 조금 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야곱만큼 복을 받은 사람 성경에 많지 않습니다. 수많은 가축들과 12명의 아들들과 특별히 그 인생 마지막에 그의 아들 요셉은 그 당시 가장 강했던 이집트의 바로, 왕의 총리대신 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야곱의 말이 옳습니다. 야곱이 본 자기 인생이 한마디로 떠돌이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그가 살면서 좋은 것, 귀한 것을 많이 경험했음에도, 130세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험악한 세월이 기억할만한 좋은 시간들보다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II.
욥과 야곱만 나그네입니까? 욥과 야곱 같은 부자들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세상 모든 사람들 저와 여러분 모두 다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 전서 1장 1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베드로가,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사는 나그네들인, 택하심을 입은 이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우리들의 인생의 문제는 그리고 우리가 찾고자 원하는 인생의 비밀은 바로 우리들의 매일 매일 매 순간이 바로 나그네의 삶인 것, 그러나 우리 인생 나그네길을 우리들 각자가 걷기는 하지만 우리들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걸어가는 것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지난 7월 저는 두 주간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아직 길이 다 닦이질 않아 먼지 나는 비포장 시골길을 한 시간 정도 달려 마을 앞뒤로 산이 있고 개울이 흐르는 마치 제가 초등학교 때 방학만 되면 내려가던 경기도 강화 같은 그림 같은 마을에 사는 나그네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인생 길은 그림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번에 저희들이 방문한 중국 마을의 조선족 동포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던 것은 지금이라는 현재의 생활에 대한 불만족 그것이었습니다. 한국에 가서 일하면, 미국에 가면 빠른 시간 안에 잘 살 수 있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몇 십 년 벌어야 할만큼의 돈을 빚을 지고 빌려 한국으로 동남아로 미국으로 어디든 나가고자 애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어린 젖먹이 자기 자녀들을 나이 드신 부모에게 맡기고 일할 수있는 모든 젊은이들이 떠나 버리고 난 마을에는 예외 없이 두통과 고혈압, 당뇨, 신경통으로 고생하는 연세 드신 부모들과 그들이 떼어놓듯 남기고 간 어린아이들뿐이었습니다. 한 할머니는 제게 와서 자기 손녀가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온 저를 보고는 저를 마치 어릴 때 자기를 버리고 떠난 자기 아빠를 만난 것처럼 기뻐하더라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오늘도 한국에서 혹은 외국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그 자식들은 문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는 나이든 부모의 가슴아픈 마음을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 또 아빠 엄마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 자라 가는, 그래서 밤에 자다가 깨면 돌아오지 않는 아빠 엄마를 부르며 우는 자기 자식들을 기억하며 살까? 또 그 땅에 남아 있는 중, 고등학교 어린 학생들, 그들의 가슴속에는 가난한 농촌에 살기 때문에 큰 도시, 좋은 학교는 돈이 없어서 갈 수 없다는 자포자기, 자신에 대한 열등감, 꿈 없는 그 미래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런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쳐는 “삶의 비극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우리 내면에서 죽어 가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라고 말했고 조지 허버트는 더 나아가 “꿈을 상실 할 때 인간은 죽어가기 시작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에서 간 우리 봉사단이 그들에게 해 줄 수있는 것은 그들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것도, 만병통치약을 주는 것도 아닌, 우리들도 똑같은 나그네라는 것과 우리 봉사단을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래서 우리가 진정 구해야 하는 희망, 우리의 기쁨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모든 봉사단을 그곳으로 인도하신 것을 그리고 같은 나그네로 살면서 잊지 말고 붙들어야 할 한가지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조요성 장로님, 김승희 전도사님 부부께서 인도하신 영어 class는 특히 인기가 높았는데 단순히 영어만을 배우게 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역경 가운데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한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영어를 공부하던 윤향련이라는 소녀가 쓴 작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되찾은 자신감
난 어제 미국에서 오신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웠다. 생각보다 문제가 참으로 어려웠다. 선생님께서 모든 학생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라고 두세 번 반복했지만 난 왠지 자꾸 다른 사람 보단 좀 떨어진 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매우 슬펐다. 돌아오는 길, 내일부터는 가지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 나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조그마한 풀이었다. 이 풀은 30도 되는 이 더운 날씨에도 말라서 축 늘어지지 않았다. 나는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풀은 산과 들에 저절로 자라나서 사람이 뿌리째 뽑기 전에는 매년마다 꼭 자라난다. 나는 이 풀이 대견스럽게 여겨졌다. 아주 작은 풀이지만 포기란 없는 것 같았다. 이번 해에 죽었다면 내년에는 또 다시 자랄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이 작은 풀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작은 일에 낙심하고 다시 일어설 줄 모르는 자신이 참으로 부끄러웠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일렀다. “윤 향련, 네 인생에 포기란 있어서는 안돼! 너도 충분히 할 수있는 애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분초를 다투어 열심히 공부하면 선생님처럼 영어공부를 잘 할 수 있을 거야. 아자! 아자! 파이팅”
나는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선 자신이 나절로 대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작은 풀에게서 얻은 교훈, 정말 나에게는 소중하였고 나의 잘못을 일깨우게 해준 작은 풀이 나는 너무너무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앞으로 무슨 일에서나 최고가 되기 위해 열심히 하고 곤란에 부딪쳤다 가도 꿋꿋이 설 수있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에 최선을 다하겠다.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 찾아준 것, 하나님을 붙들도록 희망을 준 것 그것이 우리 중국 봉사단이 향련이에게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나눈 가장 큰 선물이 되었습니다.
III.
오늘 우리에게 주신 예레미야 선지자의 편지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슬퍼하고 있는 나그네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나그네임을 애써 외면하며 하나님이 계신 것과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복이 되신다는 것을 드러내 놓고 반대하며 자기들의 자랑의 껍질들을 쌓던 사람들, 이 편지를 받게 된 이스라엘의 경우는 다른 나라의 신들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섬기며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던 그들을 다시 살리시려고 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 왕을 보내셔서 그들이 자랑하던 성전과 모든 산당과 금과 은과 화려한 옷들과 가축과 자녀들까지 모두 빼앗아 버리고 가장 귀하게 여기던 왕과 신하들과 재주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바빌로니아에 사로잡아가게 하시고 이제 포로가 되어 모든 소망과 희망을 잃어버린,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 자기의 자존심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띄우신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입니다.
IV.
이제 다시는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 갈 수 없다는 좌절로, 이렇게 앉아서 포로로 죽기보다는 아니다! 다시 돌아 갈 수 있다! 라고 속이고 있는 하나님이 보내지 않은 거짓 선지자들의 선동으로 반란을 음모하다가 벌써 여러 명이 죽음을 당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 왕에게 조공을 가지고 들어간 엘리사와 그마랴의 손에 이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 내용은 이렇습니다.
1.집을 짓고 정착하라(5절). 집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이 살아가는 가장 안전한 장소입니다. 마음이 쉼을 얻기 위해서는 고향집 같은 곳이 필요한 것을 예레미야는 알았습니다. 집을 지으라, 비가 새고 집을 지을 재료로는 짚밖에 없더라도 힘을 모아 마음이, 육체가 쉴 수있는 공간을 만들라고 말합니다.
2.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먹어라(5절). 계절의 리듬,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살라는 말입니다. 씨를 뿌릴 때 씨를 뿌리라는 말이요 추수 때 나가서 부지런히 추수하고 거둔 것은 기쁨으로 먹으라는 네 마음을 즐겁게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의 시간표를 맞추어 그 시간표대로 살라는 말입니다.
3.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아라(6절).
공동체를 이루고, 혼자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으면 자녀를 가진 사람들과 대화가 통하는 것처럼 혼자 닫고 살지 말고 열어 놓고 살라는 것이요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들이 내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가장 힘들고 어려운 부탁을 하십니다. 그것은
4. 너희 원수를 용서하라(7절). 바빌론을 이라크를 내 아버지의 원수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동안 그 사람에게 평안은 없습니다. 아직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간 그 70년이 끝나지 않았는데 그 동안을 미움으로 죽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움은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샬롬, 이스라엘 자손들과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바빌로니아에도 샬롬의 하나님인 것을 선포하십니다.
5. 기도하라(12절). 사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 질 수있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만나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들어주실 뿐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6. 나를 믿어라(10절-14절).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완전히 회복시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사로잡아간 당시 가장 강력한 나라 바빌로니아의 시간은 하나님께 이제 겨우 70년 밖에 남지 않은 것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V.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은 재물, 영화, 장수의 복을 넘어 중단 없이 계속되는 하나님과의 사귐, 그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우리 나그네를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포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득히 자라난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우리는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사라져버린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들의 자신감을 또한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샬롬, 평화의 편지로 그들이 잃어버린 자신감, 그것은 먼저 그들 자신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 당신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시기 원하십니다. 원망과 의심으로, 살 소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낙심함으로 서서히 죽어 가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이스라엘을 살려 내십니다.
생명의 비밀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삽니다.
아모스 서 5장 4절에서 6절에 보면
“나 주가 이스라엘 가문에 선고한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산다. 너희는 베델을 찾지 말고, 길갈로 들어가지 말고, 브엘세바로 넘어가지 말아라. 길갈 주민들은 반드시 사로잡혀 가고, 베델은 폐허가 될 것이다.” 너희는 주님을 찾아라. 그러면 산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요셉의 집에 불같이 달려드시어 베델을 살라버리실 것이니, 그때에는 아무도 그 불을 끄지 못한 것이다.“
또한 호세아 2장 16절에서 20절에는
“그 날에 너는 나를 ‘나의 남편’ 이라고 부르고, 다시는 ‘나의 주인’ 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 나는 그의 입에서 바알 신들의 이름을 모두 없애고, 바알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그날에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벌레와 언약을 맺고, 활과 칼을 꺾어 버리며 땅에서 전쟁을 없애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놓고 살 수 있게 하겠다. 그 때에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 내가 너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너와 결혼하겠다. 그러면 너는 나 주를 바로 알 것이다. ”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위해 예비하고 계시는 모든 복을 받는 비결은 겸손히 순종함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리는 전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에스겔 33장 10절, 11절입니다.
“그러므로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여라.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온갖 허물과 우리의 모든 죄악이 우리를 짓눌러서, 우리가 그 속에서 기진 하여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살 수 있는가? 하였다. 너는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한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한다. 너희는 돌이켜 떠나거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는 왜 죽으려고 하느냐?” 하여라
그렇습니다. 우리 나그네들은 슬퍼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과 어떠한 일에도 그 하나님은 그 환경을 알고 계시고 그 일을 해결 할 수있는 힘과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편지는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를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겠다. 내가 너희를 쫓아 보냈던 세상의 모든 나라, 모든 지역에서 너희를 모아오겠다. 내가 너희를 포로로 보냈으나, 나는 너희를 그곳에서 너희의 고향으로 다시 데려오겠다. 나 주의 말이다”(12절-14절).
V.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가능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와 힘을 다해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주님은 인생 나그네길을 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한 초청을 하십니다. 너도 네 뜻을 다해 너의 힘을 다해 나를 따르겠느냐고. 기쁨 없는, 소망 없는, 슬픔과 낙심으로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사라져 버린 포로 생활을 청산하는 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 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 미국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드리며 제 설교를 줄입니다.
이 목사님의 친구 중에 4년 전에 돌아가신 Marshall Hamer, 마샬 헤이머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B-17 폭격기의 소총수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임무를 수행하다 독일 군에게 격추를 당해 17 슈타락 (Stalag 17)이라는 악명 높은 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수용소에서는 자벼온 미군 포로들에게 매 주 우편엽서(post cards)와 면도기(razor blades)를 지급했는데 대부분의 포로들은 그것들을 받기가 무섭게 화를 내며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들 모두 이 post card가 미국에 도착하기 전에 석방되기를 원했고 그 카드가 제대로 전달 될 지 의심했으며 언제 풀려 날 지 기약도 없고 보는 사람도 없는 포로 수용소에서 면도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미군 포로들은 그래서 일체의 운동도 하지 않고 지냈지만 마샬 헤이머는 달랐습니다. 그는 남들이 쓰레기통에 버린 우편 엽서를 주어다가 사연을 적어 자기 고향에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알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가 아는 사람이 기억 나지 않을 때는 심지어 자기가 주소를 만들어내서까지 이 편지 쓰는 일을 계속 했습니다. 얼마 후 그가 보낸 우편엽서를 받은 사람들이 답장을 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답장을 보내면서 담배와 다른 물품까지 보내주었습니다. 마샬 헤이머의 영혼은 수많은 사람들의 답장으로 살아났으며 담배와 다른 물건들은 간수들에게 주는 뇌물로 요긴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는 매일 운동을 했기 때문에 완벽한 건강을 유지 할 수 있었습니다. 2차 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들어 독일 군들이 Stalag 17 수용소를 포기하고 베를린으로 철수하기 위해 운동장에 가지고 갈 수 없는 모든 물건들을 태우기 위해 불을 질렀습니다. 이때 이제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세 명의 미국 포로들- 그들은 자기 발로 베를린까지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는 자기 발로 불 속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습니다. 반면에 마샬 헤이머는 자기가 먼저 보낸 그 편지에 응답한 사람들 그 사람들을 통해 갖게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소망으로 단련된 두 어깨에 두 명의 다른 동료를 부축한 채 베를린까지 걸어갔고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는 마침내 기다리던 아니, 이미 수용소에서 맛보고 있었던 자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 마샬 헤이머,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와서 자유를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에 우리에게는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아직 우리는 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우리는 슬퍼할 수 없습니다. 나그네 된 우리에게는 결코 슬퍼할 권리가 없습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은 “This time, like all times, is a good one, if we but knew what to do with it." 지금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좋은 시간이다 단 그것을 어떻게 사용 할 줄 만 알고 있다면 안다면.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지나가는 시간 속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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