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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9. 조영진 목사

"생명의 복음(19)-죽음에서 생명으로"

요한복음 5:19-30


우리 신앙에서 핵심적인 내용은______________께서 누구신가?
라는 질문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I. 예수님께서는____________께서 하시는 일을_____________도
그대로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II. 예수님께서는
(1)________사람들을______________일을 하십니다.
(2) 예수님의 말을__________,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________사람을_________에서_________으로 옮겨주십니다.
(3) 아버지의 뜻에 따라_____________하십니다.

III.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는 바로___________입니다.

* 함께 나눌 물음들

1. 나는 예수님을 누구시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내게서 누구십니까?

2. 나는 과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습니까?
지금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까?

3. 심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과연 심판이 있음을 믿고 있습니까?
내 삶은 심판에 대한 믿음 때문에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 일 것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 따라 그리스도인인가 비 그리스도인인가가 결정되고, 또 그 대답에 따라 우리 인생의 목적과 길이 달라집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나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보다 실존적인 대답을 기대하시며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오늘 이 시대는 또 한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라는 이 질문을 더욱 심각하게 생각하고 물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종교 다원적인 역사의 현실 속에서 이 물음은 계속 중요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다양한 종교간의 대화와 이해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청되는 이 시대를 맞아 종교학자들은 다원주의적 이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믿음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옮길 것을 주장합니다. 이같은 변화를 그들은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기독교 역시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임을 받아 들이면서 예수님을 믿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믿음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라는 이 성경의 말씀들은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기 보다는 예수님께 대한 처음 교회의 신앙 고백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를 보면 이같은 종교 다원주의적인 예수 그리스도 이해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처음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 속에서 주후 400여년 경까지 계속해서 묻고 논의했던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위대한 예언자 가운데 한사람 일 뿐이라고 주장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보다는 낫지만, 하나님 보다는 못하신 분(More than human being, but less than God)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들은 교리의 정통적인 신앙과 교회의 형성과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주후 5세기 들어서면서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I.

오늘 본문 말씀도 이 문제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펼쳐지고 있습니다. 먼저 5장 1절 이하를 보면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표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셨다고 해서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게 되었는데, 더욱 문제가 악화된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같은 비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하시는 일은 바로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시는 모든 일을 보여 주신다고.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당신이 지어내어서 마음대로 하시는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며, 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을 지탱해 주는 양식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는다고 비난하는 유대인들의 이야기는 바로 진실을 모르는데서 오는 공격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았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고 계시는 이 구원의 역사를 깨달았더라면 그들은 비난보다 찬양을, 공격보다는 감사의 고백을 드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결코 과장이나 허장성세가 아니었습니다. 신성모독도 아니었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인류의 스승 혹은 훌륭한 예언자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종교간의 이해와 대화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시켜 가면서까지 그런 길을 갈 수는 없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 단체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서 인생과 역사를 살리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 예는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믿지않고 종교다원론적인 그리스도 이해를 계속 붙들려면 성경에서 요한복음을 빼고 이야기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할 때, 우리는 그분을 통한 구원의 길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분도 우리와 같은, 단지 좀 더 위대한 우리의 스승에 불과하다면 그분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과연 우리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능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II.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다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따라 하시는 것 뿐이라고. 그렇다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일은 무엇입니까? 그때 유대 땅에서 행하셨던 그일은 과거의 역사 속에 묻혀버리고 만 것입니까? 아니면 그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까? 그 일은 무엇입니까?

(1) 오늘 본문 5:21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사람들을 일으켜 살리시니,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살린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죽은 사람들을 일으켜 살리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이어받아 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 번 죽은사람을 살리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나사로를 각각 죽음에서 플어 살리셨습니다. 물론 이렇게 죽은 사람들을 살리셨지만,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죽은 자”라는 이 표현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죽음은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 영적인 죽음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신다는 말씀은 많은 경우 이 영적인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어렸을 적에 생물시간에 나무를 죽이는 간단한 방법은 나무의 껍질 층을 반지처럼 잘라내면 곧 시들어 죽는다고 배운 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뿌리로부터 흡수된 수분이 바로 가지와 잎들에게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뿌리와 단절된 나뭇가지나 잎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에서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겉모습은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것입니다. 결국은 죽고, 멸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죽은 생명,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간 이 생명들을 살리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들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이일을 하고 계십니다.

(2) 그렇다면 이 생명을 살리는 일,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는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본문 5:2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여기에 생명을 회복하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으시면 됩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응답해서 하나님을 믿으시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듣는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듣는다는 말은 단순히 귀로 듣는다는 뜻 이상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향해서 왜 말을 안 듣느냐고 책망할 때, 이 듣는다는 말은 단순히 귀로 듣는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왜 이 말에 따르지 않는가? 왜 순종하지 않는가 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란 요한복음서가 강조하는 Key Word, 핵심 단어인데, 단순히 죽은 다음에 누리는 천국에서의 삶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영원한 생명을 지금, 이 땅에서부터 누릴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도 5:24에서 “또 나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고”와 같은 미래형으로 기록하지 않고, 이미 가지고 있다는 계속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현재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먹고, 입고, 마시고 즐기는 그 차원을 넘어서는- 생명을 누릴 뿐 아니라, 죽음마저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죽음에 매이지 않는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3) 한가지 더 오늘 본문 말씀이 주시는 멧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5:27은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5:22의 말씀도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권한을 모두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본문에 따르면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않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될 것입니다. 그리고 불순종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말것인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결코 선택의 대상이 아닙니다. 선택하면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말것인가 처럼 중요한 선택, 중요한 응답이 없습니다. 이 응답은 바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판이란 단어에도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심판은 인간의 죄와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이란 뜻도 있지만, 심판이란 말씀 속에는 restoring the original order, 본래적인 질서를 회복시킨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심판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거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심판은 언제나 올바르고 정직합니다. 왜냐하면 본문 5:30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자기 마음대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내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바로 정의 그 자체 이십니다. 진리 그 자체 이십니다. 사랑 그 자체 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심판은 언제나 올바르십니다

III.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는 이 말씀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밝히셨습니다. 또한 죽음으로 생명으로 옮기는 이 역사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5:25을 보십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

구원자를 기다리던 유대 백성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인생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역사는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지금 살것이라고. 그렇습니다. 이같은 역사는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만이 아닙니다. 2000여년전 유대 땅에서 만이 아닙니다.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는 오늘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인생과 역사가 변혁되는 놀라운 일은 지금, 여기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부활절에 세례 예식을 거행한 후, 제가 세례를 베푸는 것은 끝내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마지막으로 #101 “생명의 길” 과정을 하면서 아직 세례를 받지 않으신 분들, 또 세례때의 서약을 갱신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오늘 2부예배 시간에 세례/입교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세례 예식을 베풀때마다 감사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분들의 삶에서 보게되는 우리 주님의 손길, 우리 주님의 역사입니다. 주님께서는 2000년전 유대땅에서 뿐 아니라, 21세기 워싱턴에서도 역사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해오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고 계십니다.

이 생명의 살리는 주님의 역사는 지금 우리 모두의 삶속에서도 일어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주님을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갑니다. 새로운 인생, 새로운 생명의 날이 동터오게 됩니다. 몇해전 연합감리교회 홍보국에서 한인교회들을 위하여 발간하는 “섬기는 사람들”에 실렸던 한 권사님의 고백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서 제 설교를 줄입니다.

외로움! 권사님은 이것을 제일 무서워했습니다. 9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새 장가를 들으신 후부터 권사님은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라면서 뼈가 저리도록, 꼼짝 못하도록 이 외로움은 권사님의 인생을 휘감아 버렸습니다. 그렇게 잘해 주시던 아버지마저도 새 어머니에게 흠뻑 빠져버린 뒤 아버지의 야단을 맞으며 외로움과 야속함에 차라리 죽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19살 되던 해 결혼을 한 권사님은 5년만에 남편과 사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의 행복이 진정 무엇인지도 모를 때였습니다. ‘외로움’은 운명처럼 더욱 찡하게 다가왔습니다. 졸지에 4살 짜리 딸 아이가 딸린 24살의 청상과부가 된 것입니다. 정말로 정신없이 이 아이를 키웠습니다. 이렇게 자란 딸이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이제는 외로움도 끝이나나 싶었는데... 이 딸 내외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1979년 외동딸의 초청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딸을 보고 미국에 온 셈인데... 이 길이 바로 완전히 고독의 감옥에 갇히는 직행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딸네 두 내외가 출근하게 되면 텅 빈집을 혼자 지키는 외로운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권사님은 교회 가는 날만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교회에 가서 열심히 사람들과 어울리며 수다를 떨어야 좀 숨통이 트이곤 했기 때문입니다. 권사님에게는 열심히 신앙생활 했던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이 동생이 6.25 당시 학병으로 참가했다가 부상당해 후방병원에 이송되었을 때, 권사님은 하나님께서 동생을 살려 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죽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은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버님은 교회에 출석하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돌아가셨지만, 권사님은 그저 건성으로 아버님 성화에 못 이겨 교회에 가곤 했었습니다. 이런 권사님이 미국에 와서 열심히 교회에 가는 날짜만 손꼽게 된 것입니다. 그놈의 외로움 때문에...

그런데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교회에서 생활할 때는 괜찮은데,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갑자기 외로움이 몰려와 더욱 못 견디게 괴롭혔습니다. 교회에서 많이 듣던 평강, 기쁨, 사랑이란 자신의 생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잠을 청하기 위해 매일 밤,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증상은 점점 심각해져 수면제를 복용해야 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1988년 원망과 불평, 미움과 좌절에 방황하던 이 생명을 불쌍히 여기신 주님은 선한 목자 상동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담임이신 장순창 목사님을 통해 말씀에 눈을 뜨게 하시더니 성령님을 알고 싶고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때 마침 교회에서 성령 체험을 위한 ‘기도학교’ 8주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6주째 ‘주님의 기도’를 공부하던 중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대목에서 갑자기 반세기 동안 서모인 어머니를 원망하고 미워했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마치면서 그 밤을 눈물로 회개하며 지새웠습니다. 울어도 울어도 어디에서 눈물이 그토록 많이 나오는지... 공부 시간에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은 하나님께, 사람 앞에 잘못한 것을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진정한 회개”라고 배운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새 어머님께 용서를 빌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 돌아와 전화기 앞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50 평생을 증오하고 살던 분께 전화를 건다고 생각하니 손이 전화기에 가지 않았습니다. 또 막상 통화가 된다고 해도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문제였습니다. “괜히 망신만 당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도 들었습니다.

얼마를 머뭇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해라! 해라!”하는 음성이 마음을 때리며, 어떤 강한 힘이 손을 전화기 다이얼로 옮기는 듯했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머니의 음성이라 직감적으로 깨닫게 될 때 권사님은 또 할말을 잊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입에서 “어머니, 저예요”라고 간신히 말하고는 울음이 복받쳐 올라 그냥 흐느껴 울고 말았습니다. 한참을 울다보니 저쪽에서도 같이 울고 있었습니다. 50년만에 어머니와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폭포수와 같은 평강과 기쁨이 쏟아져 내려왔습니다. 너무나 벅차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우한 운명, 고독한 마음을 모두 주님 앞에 내놓고 주님을 영접하니 금방 날아갈 것 같은 자유함이 벅차게 가슴에 메워왔습니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일후에, 권사님은 완전히 변하셨습니다. 당장 술이나 수면제가 필요 없어지고 잠 못 이루어 힘들었던 밤이 누우면 바로 단잠에 빠지는 꿈 같은 밤으로 변했습니다. 원망하던 입술이 찬송의 입술로, 외로움에 떨던 시간들은 주님과 교제하는 기도의 시간들로 바뀌었습니다. 마음은 항상 즐겁고 기쁨이 충만하며 감사가 샘물 같이 솟아나는 인생으로 변했습니다.

89년, 예수님의 딸로 새로 태어난 후 지금까지 새벽제단을 지키면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뜻하지 않은 유방암 선고에 잠시 방황했지만, 주님 전에서 목사님과 기도하니 불안한 마음은 밀물처럼 물러가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믿어졌습니다. 담대함과 평안함이 안개처럼 몸을 감싸고 있는 느낌 속에 수술을 받고 완쾌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권사님은 하나님께서 암 환자들을 찾아 위로하며 용기를 줄 수 있는 사역자로 사용하시려는 뜻이 있으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98년에는 오랫동안 드렸던 기도를 마침내 응답해 주셔서 ‘어머니나 잘 믿으시라’던 딸과 사위가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권사님은 칠순이 훨씬 넘으셨지만, 교인들은 권사님을 “Miss Kim”이라고 부릅니다. 사랑방 기도 후원자로 사랑방 리더와 식구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기쁨, 한나 전도회(60세이상 여성) 회장으로 교회의 어머니 사명을 감당하는 보람, 영접부원으로 처음 나오는 분들을 반기며 자신의 모습을 통해 기쁨을 주시는 주님을 소개하고 그 분들을 안내할 때 행복함을 느낍니다. 그 무엇보다도 외로운 사람들을 보듬어 안고 살아 갈 때 권사님은 생애 최고의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오늘도 살아납니다. 오늘도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여러분, 나는 이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까? 나의 참 생명은 내 삶속에서 피어나고 있습니까? 나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