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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9. 조영진 목사
"생명의 복음(18)-고침받은 이후"
요한복음 5:10-18
오늘 본문은 38년된 병자가 고침받은 후 이어지는 상황을
전합니다.
I. 예수님께서는________을 범했다고
또 하나님을 자기____________라고 불렀다고 비판을 받기
시작하셨습니다.
II. (1)38년 동안 고생한 병자는__________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2)주님께서는 더________일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를 짓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3)주님께서는 내_________ 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_________고 말씀하셨습니다.
III.우리 모두는__________을 살리는 주님의___________입니다.
* 함께 나눌 물음들
1. 고침을 받은 후, 은혜받은 후 걸어 온 나의 삶을 돌아보십시다.
오늘 그 감사가, 그 감격이 살아있습니까?
2. 더 나쁜일 생기지 않도록 내가 조심해야 할 일들은 무엇입니까?
3. 은혜받은 내가 오늘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왜 그 일이 중요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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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J에 계신 최효섭 목사님께서 펴내신 책에서 소개하는 「오스카 와일드」의 우화적 단편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과거에 은혜를 입혀준 몇 종류의 사람을 그 후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우화적으로 엮은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은 한 주정꾼을 만납니다. 그는 거의 폐인과 같이 된 젊은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소?”하고 물었더니 주정꾼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내가 절름발이였을 때 나를 일으켜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엇을 먹고 살라는 말입니까? 그동안 직업을 구해 보았으나 만족한 직업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은 한 여자가 창녀가 되어 남자들 사이에서 희롱 받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로 되돌아갔오?” 창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창녀에게 건져 새 삶을 만들어준 것 같았으나, 창녀에서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단 말입니까? 나는 더욱 고독해서 살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창녀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한 불량자가 정신없이 이웃과 싸움을 하고 있는 장면에 부딪힙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청년,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소?” 불량자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 준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무엇을 보라는 겁니까? 보이는 것이 모두 신경을 돋구고 귀찮고 화나는 세상이 아닙니까? 결국 나는 화풀이도 하고, 마구 치고 받고 하는 생활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은혜받기를 간구합니다. 고침 받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나 고침받은 이후의 삶을 위해서도 그렇게 열심히,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은혜를 받고, 고침을 받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이후의 삶은 더욱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살아야 합니다. 고침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I.
오늘 본문 말씀은 38년이란 긴 세월을 병에 눌려서 살아온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고침받은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걷어가지고 걸어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병자는 곧 나음을 얻어서 자리를 걷어들고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병자가 고침받은 날이 안식일인데 자리를 들고 걸어감으로 안식일에 관한 규례를 어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대해서 39조 234항에 달하는 규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누구든지 안식일에 공중 장소에서 개인 주택으로 물건을 운반한 사람은 부주의로 그렇게 했으면 제사를 드리고, 만일 고의로 규례를 어겼으면 그 몸을 쪼개고 돌로 치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안식일에 급성환자를 고치는 것은 괜찮지만, 만성병자, 장애인들을 고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침대에 누인채 운반하는 것은 허락되었지만, 침대만 운반하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38년 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은 바로 이같은 안식일 규례에 대한 위반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 고침받은 사람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병자는 사실대로 이야기 했습니다. 나를 낫게 해주신 분이 자리를 걷어 가지고 가라고 명하셨기에 걸어갔노라고. 유대 사람들은 이 병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대에게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 가라고 한 사람이 누구요?” 그런데 병나은 사람은 그때 자기를 고쳐주신 분이 누구신지를 잘 몰랐습니다. 나중에 예수님 이신 것을 알게 되는데 이 일을 계기로 예수님께 대해 비난과 박해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 대한 비난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모독죄로 점차 비난과 위협에 직면해 가시게 되었습니다.
II.
38년된 병자가 예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침받은 이후의 삶에 비난의 회오리 바람이 불어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비난의 바람 또한 예수님을 향해 번져갔습니다.
(1)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처음 고침받은 이 병자는 자신을 고쳐주신 분이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곳을 빠져 나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뒤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를 만나서 말씀해 주심으로 자기를 고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많은 경우 우리도 그렇습니다. 인생 여정 속에서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인도해 주셨는데, 바로 그것이 은혜인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인 줄도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지금까지 건강한 것 주님의 은혜인데, 건강은 당연히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열심히 관리해서 건강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열심히 운동하고 관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내 사업이 잘되는 것 하나님 은혜인 줄 모르고 내 능력, 내 힘 때문인 줄로 착각합니다. 그런 힘, 그런 능력을 우리 주님께서 은혜로 주셨는데도 말입니다. 자녀들이 똑똑하고 앞가림을 잘하는 것 신통한 그들이나 똑똑한 부모 탓으로 은근히 치부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인데도 말입니다.
이 착각 때문에 우리 삶 속에서 감사가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탁이나 원망은 많이 하지만, 감사는 점차 인색해 가고 있습니다. 놀라운 은혜을 받았어도 얼마 동안은 감사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주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메말라 가는 것을 봅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분, 우리의 삶을 고치시고 새롭게 세워가시는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더 깊은 감사를 드리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른 찬송가 처럼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이 간구, 이 열망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어느 실업인이 “백만번의 감사” 라는 책을 써서 미국 국회도서관에 판권 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국회도서관은 이 책에 대하여 “책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판권 등록을 거절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책에는 다른 말은 전혀없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는 이 한 문장이 백만번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백만번의 감사”였습니다. 여러분, 백만번의 감사가 책으로서 등록할 가치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들, 죄인된 인생이 고침받은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필요한 내용입니다. 잊어서는 안되는 내용입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신 주님을 기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2) 38년 동안 병상에서 고생해 오다가 고침을 받은 이 환자는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네가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생기지 않도록 하여라.”
이 말씀은 질병과 죄, 좀 더 범위를 넓히면 고난과 죄의 관계를 생각케 해줍니다. 유대 사람들은 고난은, 질병은 바로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때부터 시각장애인 이었던 사람이 누구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가고 사람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의 죄도 아니고 이 시각장애인의 죄도 아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나타내시려는 것이다.” 고난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는 길이라고 말씀하심으로 고난의 원인보다 고난의 의미에 촛점을 맞추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38년 동안 앓아 온 이 병자의 질병은 죄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더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고난이, 질병이 죄의 결과는 아닙니다만, 그러나어떤 고난은 죄 혹은 우리의 잘못된 판단이나 행동의 결과로 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담배를 피우면 심장과 폐에 악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고, 담배갑에는 경고문까지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무시하고 담배를 피우다가 폐암이 걸리게 되면 여러분, 누구 탓입니까? 하나님 탓입니까?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어서 불행히도 다리를 크게 다쳤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여러분, 누구 탓입니까? 누가 원인을 제공했습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음주운전을 한 사람입니까?
우리 모두 은혜를 받았으면 옛 생활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인생이 고침을 받았으면 생활의 습관, 생활의 우선 순위가 바뀌어야 합니다. 마음만이 아니라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도 구체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제가 첫 번째 안식년을 가졌던 1992년에 참석했던 New Start 세미나는 제 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배운 건강원리 가운데 하나는 병이 생겼을 때 우리는 약으로 증세를 없애면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병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근본 원인, 곧 생활을 바꾸는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 생활을 바꾸는 것이 바로 New Start인데, 먹는 음식부터 시작해서 마시는 음료, 적당한 운동, 충분한 휴식 등등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때 생활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달려갔다면, 아마도 제 인생 여정에 큰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인생을 고쳐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감사는 입술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바뀌어야 합니다. 더 심한 것, 더 나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악된 삶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릇된 생활습관, 그릇된 삶의 우선 순위, 그릇된 식생활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의 모습, 생활의 습관들을 다시 세워가야 합니다.
(3)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다고 비난하며 박해하기를 시작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 대한 유대인들의 비난을 더욱 격화시켰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할 말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루신 것이었습니다. 처음 세상을 만드실 때 하나님께서는 제7일에 안식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조의 역사는 끝났지만, 돌보시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의 역사는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이 시간도 우리에게 섭리의 손길을 펴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생명을 살리는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두려움 없이, 주저하지 않고 행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노동 이해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심으로 노동의 거룩함을 가르쳐 주셨으며, 또한 부지런한 삶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게으른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일하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놀고 먹으려고 합니까? 가나안 복민운동을 펼치셨던 김용기 장로님께서는 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준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이씨조선이 노동을 천히 여긴 유교문화, 땀흘리기를 싫어한 불한당 때문에 망했다고 지적하시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부지런해야 된다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장로님께서는 또 예수님의 손바닥에는 두 개의 못자국이 있다고도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으로 생긴 못자국이요, 다른 하나는 목수의 아들로 열심히 일하신데서 생긴 못자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우리 모두도 일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같이 바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은퇴하면 좀 한가할까 하시던 분들도 만나 뵈면 은퇴하니까 더 바빠졌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바쁘다는 것은 그만큼 일이 있다는 이야기이기에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무엇 때문에 바쁩니까? 무슨 일에 정말 힘을 쏟고 계십니까? 바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무슨 일 때문에 바쁜가 하는 문제입니다. 내일, 내 자신을 위한 일 때문에만 바쁘지, 과연 하나님의 일, 주님의 일을 위해서도 바쁘십니까?
예수님께서 바쁘셨던 것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일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그 일을 하기 위하여 바쁘셨습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살리는 일 때문에 바쁘셨습니다. 여러분, 이 일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이 일에 도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입이 되어서 이웃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초청하며,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 일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습니까? 우리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일하고 있습니까?
특별히 전국지도자 대회에 참석하신 목사님, 평신도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 일, 생명 살리는 이 일을 위하여 휴가도 포기하고 오셨으니 감사합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금번 기회를 통하여 우리 모두 정말 열심히 배워보십시다. 보다 신실한 주님의 도구가 되도록 훈련 받으십시다.
어떤 사람이 길거리에서 헐벗은 채 추위에 떨고 있는 한 소녀를 보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움 속에서 마음에 아픔을 느낀 이 사람은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하나님, 이 안타까운 현실을 왜 그대로 두십니까? 이런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왜 일하지 않고 계십니까?" 그날밤 이 사람은 주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길거리에 불쌍한 소녀를 위해서 나는 분명히 일을 했단다. 내가 너를 창조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여러분과 저를 창조하셨습니다.
III.
고침받는 것 중요합니다. 은혜받는 것 필요합니다.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은혜 받았으면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침받았으면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 주신 분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 그분의 은혜를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돌아서야 합니다. 더 나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악된 삶의 자리에서 돌아서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삶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일해야 합니다. 부지런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오늘도 일하시니 그리스도의 손과 발, 그분의 도구가 되어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일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여러분, 고침 받으셨습니까? 그 사랑에 감사하십시다. 은혜 받으셨습니까? 감사하며 사십시다. 우리의 입술과 삶에서 감사가 메마르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십시다. 감사는 은혜받은 사람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감사는 고침받은 인생의 표어입니다. 숨질 때에도 우리의 할 말은 바로 감사입니다.
독일의 한 중년 그리스도인이 대학병원의 수술실에서 혀의 암 때문에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취 주사를 손에 든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환자에게 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씀은 없습니까?” 글로 쓸 수는 있겠지만, 혀를 사용하는 언어는 이것이 최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간호원, 조수, 수련의사들을 비롯하여 둘러 선 모든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는 심각했습니다. 잠시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마다 만일 내가 이 환자라면, 만일 나에게 한 마디 언어밖에 남아 있지 않다면,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때 이 환자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입이 움직였습니다. 그는 같은 말을 세 번 되풀이함으로써 최후의 말을 남겼습니다. “주 예수여, 감사합니다.” “주 예수여, 감사합니다.” “주 예수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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