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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2. 조영진 목사

"생명의 복음(17)-낫고 싶습니까?"

요한복음 5:1-9


요한복음서는 기적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__________으로 이해합니다.

I. 38년전 병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___________과
___________이 있습니다.

II. 주님은 베데스다 못가를 찾아오셨습니다.
(1) “낫고 싶으냐?” 아직____________을 품고 있는지
__________물으셨습니다.
(2)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__________”는 말씀을 듣고
이 병자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3) 기독교 신앙은___________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III._______하고 굳어진 삶의___________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 함께 나눌 물음들

1. 내 믿음생활에서 굳어진 좋지 못한 모습이 있습니까?
부끄럽지만 함께 나눕시다.

2. 내 삶의 여정에서 가장 깊은 절망을 느꼈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어디에서, 어떻게 희망을 찾았습니까?

3. 예수님께서 내 삶을 일으켜 세워 주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함께 나눕시다.

지난 주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 주신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도 예수님의 치유의 사역을 보여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 처럼 요한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단순한 기적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기적을 표징 혹은 표적이라고 표현하면서, 이 표징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가를 일깨워 주는 싸인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 표징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설교 말씀은 바로 이 표징의 의미를 세밀하게 설명해 줍니다. 5장에 기록된 말씀은 바로 이같은 특징들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I.

예수님께서 명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입니다. 양의 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양의 문이란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문들 가운데 동북편에 있는 문이었습니다. 이 문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양을 사고 파는 시장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말 속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자비의 집”이란 의미로 해석합니다. 이 베데스다 못에는 주랑 다섯이 있었고 그 주랑 안에는 많은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앞을 못보는 시각장애인들, 다리를 저는 사람들, 중풍환자들이 누워있었습니다. 이 모든 병자들의 가슴 속에는 한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뛰어 들어가 병고침을 받고자 하는 소원이었습니다.

거기 38년된 병자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60세라고 가정해 보면 그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병과 함께 살아온 사람입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서 누워 지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병자 역시 고침받고 싶은 소망을 안고 베데스다 못가에서 기다려왔습니다. 얼마의 세월을 기다려 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설사 물이 움직인다 해도 그 물속에 맨 먼저 뛰어 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발로 걸어 들어갈 수 없기에 누군가가 넣어 주어야 했는데, 이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있는 38년된 환자, 그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절망 그리고 무력감이었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을 병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병이 가져다 주는 고통과 아픔에 눌려온 사람이었습니다. 가냘픈 희망을 안고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왔지만, 그 희망마저도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고침받을 수 있는 기회가 코 앞에 다가왔지만, 그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무력함에 또한번 가슴 아파해야 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다가와도 끝이 보이면 그래도 견딜만 합니다. 고침받을 길이 있다면 그래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가슴 속에 희망이 있는 한 그래도 싸워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38년된 병자에게는 끝도, 고침받을 길도,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통 속에서 자유를 잃어버린 부자유함 속에서, 그냥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물이 움직여도 뛰어 들어갈 수 없는 무력감 속에서 더욱 안타까운 가슴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II.

그런데, 그런데 이 고난의 현장, 이 즐비한 환자들의 신음소리로 채워져 있는 이 베데스다 못가의 주랑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절망과 무력감 속에서 나날을 보내는 38년된 병자에게 오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이 38년된 병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낫고 싶으냐?”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아니 38년이나 누워서 살아온 이 병자가 낫고 싶어하는 것은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물으셨습니다: “낫고 싶으냐?”

저는 예수님의 이 질문 속에서 절망과 무력감 속에 사로잡혀 있는 이 병자에게 희망의 불꽃을 지피시려는 주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38년 동안 병과 함께 살아온 이 환자는 어쩌면 병이 익숙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절망의 깊은 나락 속에서 너무 오래 살다 보니까 희망의 심지는 다 타버리고 좌절만이, 무력감만이 자리잡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고침받고자 하는 열망마저 시들해 졌을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이 병자에게 희망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게 하셨습니다. 희망의 심지에 불을 붙여 좌절과 무력감의 어두움을 내 몰아 주셨습니다. 다시 나음을, 고침받음을 희망하게 하셨습니다. 꿈꾸게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희망, 무너져 내린 꿈을 되찾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오늘의 교회에도, 이 희망이 필요합니다. 유명한 신학자였던 Karl Barth는 베데스다 못가를 현대교회의 모습으로 이해했습니다. 교회는 깨끗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문제도, 다툼도 있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 교회가, 병들어 있는 모습에 너무 익숙해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가 다 그렇고 그렇다고 체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얼마나 나음, 고침 받기를 열망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 생활도 과연 고침받기를 열망하고 있습니까? 오랜 습관으로 굳어져 버린 믿음의 모습, 좌절의 틈새에서 피어난 시니컬한 믿음의 모습에 어느듯 익숙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한국교회의 옛날 어른들은 병들어 있는 우리 신앙의 모습을 이렇게 노래하신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일날을 당하였어도 세상일만 생각하니 세상병이요, 둘째는 예배당에 재종을 쳐도 아직도 우물쭈물하니 게으름병이라. 셋째는 믿는 형제 서로 보면서 두눈만 힐끗힐끗 시기병이요, 넷째는 예배당에 앉아도 살림살이 염려하니 염려병이라. 다섯째는 예배당에 출석부 보니 동그라미 가득하니 결석병이요, 여섯째는 예배당에 늦게 나와서 정신없이 기도하니 외식병이라. 일곱째는 예배당에 와서 앉아 고개만 끄덕끄덕 졸음병이요, 여덟째는 성경 말씀 암만 들어도 은혜받지 못했으니 기갈병이라. 아홉째는 헌금 바칠 때 돈 아까워 우물쭈물 인색병이요, 열째는 예배하고 돌아가서도 세상 일만 생각하니 세상병이라.

여러분, 이 병들이 낫기를 원하십니까? 고침받기를 원하십니까? 낫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좀 예수 잘 믿어보려는 꿈이 있으십니까? 주님께서는 이 아침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낫고 싶으냐?”

(2) 38년된 병자는 주님께 자신이 연못에 뛰어들어갈 수 없는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 넣어줄 사람이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전해 드렸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 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 가거라.” 이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습니다.

꿈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낫고자 하는 희망마저 꺼져가던 이 병자가 일어나서 걷게 되었습니다. 자리를 걷어 가지고 새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절망과 좌절은 떠나갔습니다. 무력함도 사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누가 고쳐주셨는지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한 채 걷고 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일은 그때 한번 뿐이었습니까? 물론 오늘날 누워있던 병자가 일어나 걷게되는 역사는 여러 가지 길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의사와 함께 의학의 도움을 통하여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의 역사로 일어나 걸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도 절망과 무력함의 사슬이 그리스도안에서 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희망과 보람에 찬 새로운 인생이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저 앉았던 인생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 걷고 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채 그날 그날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길과 빛을 찾아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신앙강좌를 인도해 주신 적이 있는 김성일 장로라는 소설가가 계십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믿게된 간증이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라는 책에 실려있는데, 서울에 있는 사랑의 교회 원로목사이신 옥한흠 목사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설교하시면서 이렇게 요약, 소개해 주셨습니다.

김성일 장로님은 어렸을 때 예수를 믿었지만 머리가 커지면서 믿음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저버린 직접적인 동기는 사르트르의 책을 읽고서였습니다. 사르트르가 주장한 ‘자유의 길’이라는 사상에 공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상은 누구든지 자기 식대로 살아야 하고 그러다가 저지르는 행동은 자기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현대인이라고 하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그 정도의 책임은 질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의 길의 의미였습니다. 그는 그 말이 너무나도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째째하게 날마다 “주여”하며 애걸할 필요 없이 자기가 하는 행동은 끝까지 책임질 줄 아는 자신감 있는 인생을 살아 보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마음속에서 지워 버렸습니다. 해방감과 자유를 누리면서 몇 십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아내가 위암 선고를 받고 수술을 하게 된 바로 그 순간, 자신은 아무 것도 책임질 수 없는 38년 된 병자와 같은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병들게 한 장본인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날마다 술 먹고 집에 오면 아내를 들볶았고 어떤 때는 외박을 해 아내한테 스트레스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심한 스트레스를 연일 받으니 위벽이 헐게 되었고 나중에는 암이 생기게 되었다는 결론을 얻은 것입니다. 아내를 병들게 한 사람이 자기였기 때문에 자신이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 길을 택했노라고 큰소리쳤지만, 막상 아내가 병들자 아무 책임도 질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목을 맨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매력적이었던 사르트르도 아내의 병 앞에서는 아무 도움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고통스러웠습니다.

바로 그때 그를 찾아온 분이 계셨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거침없이 발로 차 버렸던 예수라는 사나이였습니다. 그는 뼈아픈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를 찾아와 함께 울어 주셨습니다.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니체도, 사르트르도 다 도망쳐 버린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신음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작심하고 새벽 기도 모임에 나가기로 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렸습니다. 어느 새벽, 주님께서 “일어나 걸어라.”하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 후에 아내가 병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고침을 받은 아내와 함께 기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어나 걷는 역사는 2,000여년전의 이야기 만은 아닙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 역사는 일어납니다. 나에게도 이 역사는 일어나야 합니다. 나도, 우리도 일어나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야 합니다.

(3) 한가지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아이러니를 발견합니다. 여러분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뛰어 들 수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제일 병이 가벼운 사람들, 누구보다도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일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 38년된 병자같은 사람은 베데스다 못가에 오기는 했지만,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 처럼 어려웠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힘이있는 사람이 더욱 가질 수 있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앞장을 섭니다. 인정을 받습니다. 힘이 없는 사람, 능력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발 붙이기가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사람, 가장 치료가 필요하지만 못받고 있는 38년된 병자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무능한 사람이라고 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보잘 것 없다해도 저버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눈은 이들에게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어떤 절망 속에 있어도 일어 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그만큼 처참하면 처참할수록 주님의 가슴은 그만큼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힘들면 힘들수록 우리 주님의 구원의 손길은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좀 시간이 걸려도 끈질기게 주님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를 고쳐주실 분은 주님 밖에 없으십니다. 주님 만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습니다. 끌레르보외 버나드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제가 무엇을 했기에 저를 피해 숨으시는 겁니까? 이런 기도하기에도 지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계속 기도하고, 구하며 계속 기다릴 것입니다. 주님 밖에는 달리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밖에는 갈 곳이 없습니다. 주님 만이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습니다. 주님 만이 오늘 우리도 걷게 하실 수 있습니다.

III.

예수님께서는 2,000여년전 베데스다 못가를 찾아오셨습니다. 각색 장애인과 병자들로 주랑마다 가득찬 고난과 아픔의 현장 속에 오셨습니다. 그때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 베데스다의 못가와 같은 우리 삶의 현장 속에 오고 계십니다.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낫고 싶으냐?”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무기력하고 굳어진 삶의 아픈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체념과 좌절, 고통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최용덕 목사님께서 “일어나 걸으라”는 복음성가를 작곡, 작사하셨습니다. 주보 속지의 한면에 실려있는데 같이 보십시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 주시네

(후렴)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 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문전도사님께서 먼저 1절을 부르신 후 1절부터 다시 우리 함께 부르십시다.

여러분, 낫고 싶으십니까? 나으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일어서야 합니다. 일어나서 자리를 걷어가지고 걸어가야 합니다. 이 길이 사는 길입니다. 이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이 길이 뜻있고, 멋있게 사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