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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10. 조영진 목사
"생명의 복음(12)-조연(助演)에 머문 사람
요한복음 3:22-36
역사는 주연들에게 화려한 조명을 보내지만 주연의 배후에는
수많은 조연들이 있습니다.
I.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조연이었습니다.
그는 “나는___________________가 아니고 그 분보다 앞서서
___________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밝혔습니다.
II. 세례 요한 같은 진정한_____________을 위해서는
(1)________________을 알고
(2)________________를 알아야 하며
(3)________________을 알고
(4) 진정한___________이 무엇임을 알아야 합니다.
III. 주님은___________하고 나는__________합니다.
* 함께 나눌 물음들
1. 예수님의 전도활동과 세례 요한과의 관계를 정리해 보십시오.
2. 내가 다른 사람의 흥함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이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3. 오늘 내가 있기까지 배후에서 조연을 해주신 분들에 대하여
함께 나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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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2차 대전의 영웅으로 유럽을 나치의 압제에서 건져내는데 큰 공헌을 한 George Patton 장군에게 한번은 기자가 물었습니다: “장군께서는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훌륭하게 전투를 지휘하셨습니까? 장군의 기동부대를 움직이는 그 많은 연료는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Patton 장군은 짧게 대답했습니다: “나도 모릅니다. 내 뒷처리를 해주는 부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연의 배후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조연들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주연에 관심을 갖고 주연의 업적만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주연의 배후에는 이름도, 빛도없이 헌신해 온 수많은 조연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연이 주연이 되려면 이 조연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 조연들이 없었다면, 주연의 찬란한 업적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놀라운 성취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I.
오늘 함께 읽은 요한복음 3:22 이하의 말씀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서 조연의 사명을 훌륭히 수행한 한사람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6개월 쯤 먼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예사롭지 않은 징조를 보여 주었던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후, 드디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다 백성들에게 메시야, 구원자가 오시는 길을 예비하도록 일깨웠습니다. 그 길은 바로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유다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이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그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준엄한 책망은 칼날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 구원자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본인 자신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다만 그분보다, 메시야 보다, 앞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임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의 진정한 위대함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전도활동이 시작되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례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 가운데서, 혹은 과거에 요한을 따라다녔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3:26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님, 보십시오. 요단강 건너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곧 선생님께서 증거하신 그분이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에게로 모여듭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의 이같은 걱정에 대해서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님을 밝히면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여러분, 이 말은 결코 쉬운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비교할 때, 세례 요한이 나은 점이 많았습니다. 그는 가정 배경이 예수님보다 나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름없는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셨는데, 세례 요한은 제사장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정도 나이가 많았고, 또 전도활동도 먼저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인사였지만, 세례 요한은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멧세지에 귀를 기울였고 회개하였습니다. 그가 메시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나이도 어리고 전도활동의 출발도 뒤늦은 예수님의 명성이 점점 높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주목과 관심도 세례 요한을 떠나 예수님께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이럴수가? 탄식하면서 예수님의 의리없음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세례를 주고, 백성들에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한 자신을 향해 이럴 수 있는가고, 배은 망덕이라고 원망을 늘어 놓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때가 저물어 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새 날이, 새 역사가 동터 옴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주연의 시대가 밝아오기에, 조연된 자신은 내려서야 할 때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은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듣는 기쁨으로 가득차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위대한 퇴장입니다.
II.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의 이 증언 속에 담겨진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세례 요한 같이 넓은 가슴, 트인 마음을 갖고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저마다 주연이 되고 싶지만, 주연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조연의 인생을 살아가지만 참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1) 무엇보다도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았던 사람입니다. 자신은 그리스도, 구원자가 아니며 그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사람, 그분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투철하게 인식했던 사람입니다.
사명을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허송하고 또 허탈감에 빠지는 것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매일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주어지는 책임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인생의 사명을 찾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책임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 책임들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어 갈 것인지 보다 큰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것이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돈버는 것이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성공을 추구함이 우리 인생의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위한 공부인지, 무엇을 위하여 돈을 버는지, 무엇을 위하여 성공하는지 그 “무엇을 위하여”가 있어야 합니다. 그 “무엇을 위하여”가 인생의 목적이고 사명입니다. 그 사명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만이 내 인생 본연의, 본래의 사명을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사명을 투철하게 깨달았던 사람입니다. 그 사명에 충성했던 사람입니다.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서의 사명을 그는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2) 세례 요한은 자신의 때를 알았습니다. 이제는 구원의 역사에서 퇴장 할 때가 다가옴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주책부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를 읽고 그 싸인에 순응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때를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지, 나갈 때인지 물러설 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올라갈 때인지 내려설 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감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때가 기울어져 감을 알았습니다. 저물어 가는 자신의 때를 되돌려 놓으려고 추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경우 인생이 추하게 되는 것은 이 때를 분별하지 못하거나 무리하게 자기 때를 연장하려는 경우입니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이 때를 지혜롭게 분별했더라면 오늘 역사 속에서 다른 모습을 남겼을텐데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제는 후배에게 물려 주셔야 할 때인데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붙들고 계시려다가 은퇴가 아닌 망퇴, 망령스러운 은퇴를 하시는 목사님들을 뵈면 안타깝습니다.
산호세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자 지난 수요일 자 중앙일보 종교란에 저의 기사가 크게 보도된 것을 읽었습니다. 지난 3월31일 한인봉사센터 이전 감사예배에 말씀을 전하러 갔다가 기자를 뵈웠는데 이렇게 크게 쓰실 줄은 몰랐습니다. 감리사로 파송되기에 축하한다는 인사를 받습니다만, 사실 저의 심경은 착잡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와 집사람이 때를 분별하는데서 둔감해지지 않도록 기도해 온 것입니다. 저희 두사람의 거취가 우리 교회의 미래에 부담이 되어서는 안되겠다고 늘 다짐해왔습니다. 그런데 금년 들어서면서 모임에 참석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함께 느낀 것은 이제는 신선하고 새로운 목회자의 리더쉽이 요청되는 시점이 찾아오고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시대는 디지털 시대로, 우리의 생각도 급속하게 변화해 가는데, 또 우리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는 더욱 젊은 세대에 다가가야 하는데, 저로서는 한계가 있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점차 굳어져 갔습니다. 그래서 금년 연회가 끝나면 내년에 옮길 뜻을 표하고 서서히 준비했으면 했는데, 주님의 계획은 좀 더 급하셨습니다. 구름 기둥이 예상보다 빨리 떠올라서 그 인도하심에 응답하기로 했습니다. 아무쪼록 기도하기는 저의 때 분별이 과연 적절했다고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랍니다.
(3) 세례 요한의 고백,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이 고백 속에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한계를 정직히 보았음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사명의 자각과 직접 연결되는 것입니다만, 우리는 자신의 한계, 자신의 경계선(Boundary)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 점에서 투철했습니다. 조연으로 기뻐했습니다. 주연이 되지 못함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연이 받게되는 화려한 각광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축하해 주고 기뻐해 주었습니다. 자신의 사명, 자신의 때, 자신의 경계선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이 갖고 있는 한계가 무한히 확대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이 한계의 극복을 위하여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기도와 최선의 노력은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목회실에 이 글을 걸어 놓았습니다: "Work as if everything depended on you. Pray as if everything depended on God.(모든 것이 내게 달려있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일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처럼 기도하라.)” 예수회를 창설한 Ignatius Loyola의 말입니다. 내 자신의 한계의 극복을 위하여 우리는 기도하면서 부단히, 최선을 다하여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함도 요청됩니다. 한계의 극복과 한계의 인정이라는 이 두 과제 속에서 지혜로운 분별이 필요합니다. 너무 일찍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 게으름에 빠지기 쉽고, 너무 늦게 자신의 한계를 깨달으면 착각이나 망상 속에서 세월을 허송하게 됩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이 Abraham Lincoln이나 이순신 장군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한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못된다 해도 우리 각자가 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 있습니다. 모두가 주연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조연으로서도 훌륭한 역할을 감당할 수있습니다. 모두가 일등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결과가 이등이라면 우리는 그 한계를 깨닫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은퇴하신 최효섭 목사님께서는 2등에 머문 사람을 위하여 이런 기도문을 쓰셨습니다.
보다 더 훌륭해지려 하였으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
보다 고상하게 살려하였으나
빛을 내지 못하고 만 사람,
급한 성격을 누르려하였으나
결국 생긴대로 살고 만 사람,
사업에 성공하여 부자가 되려하였으나
그럭저럭 밥이나 먹게 된 사람,
그다지 학교성적도 좋지 않았고,
그다지 높은 자리에도 앉지 못했고
그다지 남긴 것도 없으며
그다지 선인(善人)도 못되었던
그런 이들을 축복해 주소서
1등 아님에 낙심하지 말게 하시고
2등의 가치를 발견하게 하시며
다시 한번 시작할 용기를 주소서.
아멘
(4) 세례 요한의 고백 속에서 또 한가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성공의 의미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성공입니까?
세례 요한은 조연에 머문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한때 반짝이다가 사라져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제자들도, 사람들도 떠나 쇠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헤롯왕에게 바른 말 했다가 잔치 자리에서 한때의 즐거움의 대가로 목이 달아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위대함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여인이 낳은 사람 가운데 세례 요한 만한 사람이 없다고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이 삶의 모습은 우리에게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를 생각케 합니다. 세상은 일등만을 인정합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금메달만을 칭송합니다. 세상은 주연만을 치켜세웁니다. 조연은 별다른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기준은 좀 다릅니다. 일등만이 아닙니다. 정상만이 아닙니다. 주연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주연이나 조연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정상이나 바닥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문제는 최선을 다했는가? 최선의 사람이 되었는가? 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판단 하시지도 않으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는 이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다섯 달란트 받아서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두 달란트 받아서 두 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똑같은 칭찬이 주어졌습니다. 두 달란트 남긴 사람에게 너는 왜 이 종처럼 다섯 달란트 남기지 못했냐고 추궁하지않으셨습니다. 똑같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내 잔치 자리에 참여하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최선의 것이 되면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성공의 대열에 설 수 있습니다. Douglas Mallock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높은 산꼭대기의 소나무가 될 수 없다면
골짜기의 숲이 되십시오
그러나 작아도 시냇가의 가장 아름다운 숲이 되십시오
큰 나무가 될 수 없으면 작은 숲이 되십시오
넓은 대로(大路)가 될 수 없다면 오솔길이 되십시오
태양이 될 수 없으면 별이 되십시오
성공과 실패는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 되든 최선의 것이 되는데 있습니다.
III.
세례 요한은 조연으로 그 삶을 끝맺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때와 한계를 알았습니다. 그는 진정 성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진정한 성공의 삶을 살려면 내 인생 속에서 주님은 흥하시고 나는 쇠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 속에 흥하시면 우리는 내일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아온 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주저하는 나는 쇠해야만 합니다. 이 고백, 이 삶을 안고 살아가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성공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 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주연이나 조연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일등이나 이등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주신 사명 깨닫고 때와 한계를 지혜롭게 분별하여 최선의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금번 산호세 총회에 참석해서 L.A에 있는 한사랑 교회를 섬기시는 김태경 목사님께로부터 책 한권을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성공 이란 제목의 책인데, 현재 오하이오주 Dayton에 있는 Wright대학 음대 교수로 계시는 차인홍 교수의 삶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차인홍 교수는 두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린 후 일생을 휠체어에 앉아 살아왔습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아홉 살 때 성세재활원에 맏겨졌는데, 여기에서 바이올린 무료 레슨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할원 졸업 후 24살이 될 때까지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그였지만, 굴하지 않고 장애인들로 구성된 베데스다 사중주단을 창단, 음악인의 도움을 받아 훈련을 쌓으며 연주해 오면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칩니다. 기적적으로 신시내티 음악대학에 와서 유학을 하게 되고, 뉴욕 부룩클린 음악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습니다. 잠시 귀국하여 대전시향의 악장으로 있다가 다시 미국에 와서 South Carolina 주립대학교에서 지휘를 전공,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그 뒤에 Wright대학에 교수로 임용되어 바이올린 교수겸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차인홍 교수께서 헤쳐오신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 그분이 이룩해온 승리의 모습도 귀했지만, 그분의 오늘이 있기까지 곳곳에서 그분을 돕고 격려하고 도운 많은 조연들의 모습 앞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성세재활원 시절 어느 날 재활원을 찾아와 바이올린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던 강민자 선생님, 베데스다 사중주단을 창단, 피나는 훈련을 시켜주신 고영일 선생님, 미국 유학길을 도와주고 자신의 유학을 늦추면서 뒷바라지 해 주신 김태경 목사님, 그밖에도 수많은 조연들이 오늘의 차인홍 교수님의 있도록 뒷받침했습니다. 한번은 South Carolina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직장을 찾지 못하고 L.A.에서 김태경 목사님 교회에 출석할 때 였습니다. 부인이 반주를 하고 차인홍 교수가 성가대 지휘를 했지만, 그 수입으로 가족이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때 교우 가운데서 한 분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매월 $1,000을 이 차인홍 교수 가정을 도와주었습니다. 이렇게 생활고의 숨통을 넘어서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83:1의 경쟁을 뚫고 Wright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새날을 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차교수님은 그 책에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나는 사실 인생에 대한 성실성과 최선, 꿈을 향해 질주하는 노력을 성공의 주요인 이라고 단정지어보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에 대해 당연히 가져야 하는 기본자세이지,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꿈을 이루고 싶으면 당연히 최선과 성실함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당연한 대가 위에 보이게 보이지 않게 밀어주고 끌어준 이들의 사랑과 은혜가 깃들어서 꿈은 성취되는 것이다. 가을 나무 열매를 보라.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가꿔 준 농부의 수고가 있었고, 비와 햇빛을 내려 준 하늘의 은총이 있었고, 뿌리를 받쳐 준 대지의 기운이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잊지 않는게 중요하다고 본다. 꿈의 거울이 되어 준 이들을 잊지 않는 마음, 그것이 있을 때 우리 인생은 더 풍요롭고 따뜻해 질 것이다. 내가 잘나서 이만큼 살게 되었다고 자랑하기에 바쁜 인생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주연인가 조연인가가 아닙니다. 정상인가 밑바닥인가도 아닙니다. 어떤 위치에서든지 사명을 깨닫고, 때와 한계를 분별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성공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성공은 크기로 재지 않습니다. 높이로 재지도 않습니다. 많고 적음으로 재지도 않습니다. 무엇이 되든지 최선의 것이 되는데 있습니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최선의 것이 되면 됩니다. 세례 요한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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