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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3. 조영진 목사
"생명의 복음(11)-이처럼 사랑하셔서
요한복음 3:16-21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면 왜 고난이 있어야 합니까?
I. 요한복음 3:16은____________________이라고 불리어 왔습니다.
생명을 회복하는 길을_____________께서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II. (1)하나님의 사랑은______________을 보내 주심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랑은____________입니다.
(2)예수님께서는____________을 얻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3)이 생명의 길은________________열려 있습니다.
(4)저를______________은 영생을 얻습니다.
III.우리는 두가지 선택 앞에 섭니다.
____________의 하나님을 믿고 영생을 믿든지 아니면 하나님
없는____________와______________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 함께 나눌 물음들
1. 요한복음 3:16에 얽힌 이야기들을 함께 나눕시다.
2.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그 사랑이 실감나십니까?
깨닫고 체험해 보셨습니까?
3. 영생은 어떤 삶을 말합니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고 누릴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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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부딪쳐 오는 많은 도전과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도전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이 세상 속에 왜 악이, 고난이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입니다. 지난 12월 동남아시아 지역을 휩쓸어 20만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낸 쓰나미 재난 속에서 우리는 또한번 이 질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세상 속에 이 엄청난 재난이 밀어 닥쳐야 하는가? 하루 아침에 사랑하는 남편, 아내, 자녀 혹은 부모를 잃은 그 생명들이 쏟는 눈물과 아픔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 재난 속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
이같은 고난과 아픔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떠나간 사람들이 역사 속에 많이 있었습니다. 어느 여성 철학자는 모순 투성이의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차라리 믿지 않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에피큐로스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없애고 싶어도 능력이 없거나, 능력이 있어도 그럴 마음이 없거나, 능력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거나 셋 중 하나리라. 원하는데 능력이 없다면 그 하나님은 무능하다. 능력은 있는데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악하다. 하나님이 능력도 있고 악을 없앨 마음도 있다면 이 세상에 악이 존재했겠는가?”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십니까? 그분은 과연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엄청난 고난과 죄악이 세상 속에 존재해야 합니까?
I.
오늘 아침 우리는 유명한 요한복음 3:16이 포함된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요한복음 3:16은 작음 복음이라고 불리우는 귀한 말씀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여러 말씀 가운데 이만큼 복음의 핵심을 정확히 표현해 주는 말씀도 많지 않습니다. 선교사님들이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면 제일 먼저 가르치고 암송하게 하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이 앞 부분에 기록된 니고데모와 예수님께서 나누신 대화의 계속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서가 증거하는 생명, 영생의 길을 분명히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아니 기독교 신앙이 외치는 기쁜 소식, 복음의 핵심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 생명에 이를 수 있는지 외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생명 회복의 길을 하나님께서는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인간이 수없이 하나님을 떠나갔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변덕을 부려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여전히 기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셨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은혜의 사건을 요한1서 4:10 이하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II.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를 먼저,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요한복음 3:16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1)하나님의 사랑은 외아들을 보내 주심으로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그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였습니다. 그 사랑 안에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행동이 있었습니다. 표현이 있었습니다. 그 표현이 무엇입니까? 독생자, 외아들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1장에서 말하는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시고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우리를 기다리시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의 심정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끈질기고 위대한지, 아버지의 품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시지 않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이 환영하고 받아들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아들을 세상은 모함하고, 반대하고, 비판하다가, 끝에는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못된 세상, 이 못된 인생들을 위하여 오히려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2)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보내 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잉태되었을 때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복음 1:21).” “예수”라는 이름은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갖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룩하시는 구원의 역사는 바로 생명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이 참 생명을 누리기를 진실로, 진실로 원하십니다. 그냥 그렇게 적당히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복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영생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죽지않고 오래 오래 사는 것을 생각합니다. 아니면 죽은 다음에 누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생의 현재성을 강조합니다.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삶을 뜻합니다. 이 영생은 현재적이며 또한 동시에 미래적입니다. 죽은 후에 누릴 뿐 아니라, 오늘 현재에서 누리고 사는 삶입니다.
요한복음서가 갖는 신학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생명이나 종말의 현재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이러한 이해를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사상은 3:18에 기록된 심판에 대한 말씀에서도 분명히 들어납니다. 사도 요한은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심판이라면 이 다음에, 죽은 다음에 받게되는 것인데,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현재에서 이 심판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심판을 받는 이유는 빛이 세상에 왔는데도 자신들의 악한 행실 때문에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 데 있습니다. 빛을 거절하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 이 삶 자체가 바로 이미 심판이 임한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생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이 영생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다음 죽어서만이 아니라, Here and Now, 지금 이 자리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3) 이 생명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차별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귀한 단어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표현해 주는 단어입니다.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누구에게나 available, 주어 질 수 있습니다. 돈있는 사람 만이 아닙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 만이 아닙니다. 성격이 좋은 사람 만이 아닙니다. 영주권이 있는 사람 만이 아닙니다. 돈없어도 좋습니다. 공부 못했어도 그 사랑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격이 좀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 받을 수 있습니다. 영주권 없어도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공평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도 넓습니다. 하나님께서 품지 못할 인생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디서든지 이 사랑은 주어집니다. 이 누구든지의 복음 때문에 중령 일가족 일곱명을 도끼로 찍어 죽인 고재봉도 영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생선 회칼로 사람을 죽이고 인육을 먹고 큰소리 쳤던 지존파 멤버들도 영생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갔던 척 콜슨도 이 누구든지의 복음 때문에 새로운 인생을 찾아 오늘날 Prison Ministry, 교도소 선교의 대표 주자로 템플톤상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누구든지 사랑은 2000년의 역사적 거리를 뛰어넘어 오늘 우리들에게도 임하였습니다. 나에게도 임하였습니다. 오늘도 이 누구든지의 복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21세기, 컴퓨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이 사랑은 임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든지의 복음, 이 기쁜 소식 안에서 우리에게도 임하였습니다.
(4) 여러분, 이제 마지막 과제입니다. 어떻게 이 놀라운 사랑에 동참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랑을 누릴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외칩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단순하고 평이한 길을 통하여 우리에게 임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길은 간단하고도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을 내 삶 속에 모셔들이면 됩니다. 그분께 내 삶의 주권을 내어 드리면 됩니다. 예수님, 내 삶 속에 오시면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 내 삶의 주인이 되시면, 생명이 회복됩니다. 예수님, 우리 가정에 믿음으로 모셔드리면 우리 가정이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권력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명예로도, 인기로도 살 수 없습니다. 이 생명을 돈으로 산다면, 우리 가운데 희망이 없는 분들 많습니다. 고위직에 올라야 영생을 누린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희망이 없습니다. 윤리적으로 깨끗해야만 영생을 누린다면, 이 또한 우리를 괴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감사한 일입니다. 이처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감사할 뿐입니다.
III.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 성경은 이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주신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그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역사의 한 때를 살아가셨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역사적인 인물이십니다. 세종대왕이나 아브라함 링컨이 역사적인 인물인 것처럼 그분도 역사적인 인물이십니다. 그분은 오셔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의 멧세지 다른 한편에는 또 다른 선택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시는가? 그 숱한 재앙과 고난을 보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하나님은 모순 투성이가 아닌가? 그런 사랑의 하나님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오늘도 가슴 아픈 고난과 재난이 일어나고 있는가?
결국 인간은 이 두가지 선택 앞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영생을 얻든지, 아니면 하나님 없는 허무와 부조리 속에서 살아가든지 둘 둥에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의 입장도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입장은 결국 사랑의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허무와 부조리의 짐을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저 역시 이 선택 앞에 섰던 적이 있습니다. 1967년 10월4일 저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폐수술을 받았습니다. 오른쪽 폐의 상엽을 잘라내는 수술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다락방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새롭게 체험한 저는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찬송을 부르면서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수술의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수술을 끝낸 후 다시 출혈이 시작되어 저는 그 자리에서 재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출혈이 계속되어 저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어야 했습니다. 잠시 깨어났을 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십자가만을 붙들고 주님께 나아가겠다는 마지막 기도를 드려보기도 했습니다. 의식을 잃고 헤매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다음날 점심 때였습니다. 간신히 출혈이 줄어들어 회복실로 돌아왔지만, 회복의 과정 역시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고열로 고생하기도 했고, 수술한 부위에 염증이 생겨 매일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마침내는 폐 안에도 염증이 생겨 밖에서 튜브를 꽂는 수술을 하고 매일 닦아내야 했습니다. 피부에 이상이 생겨 피부과에 가기도 했고, 목에 이상이 생겨 이비인후과를 가기도 했습니다.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은 복용하는 약의 부작용에서 오는 구토 증세였습니다. 음식만 보면 시작되는 구토 증세를 어떻게 컨트롤 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날도 심한 구토 증세로 견디다 못해 먹던 밥도 치워놓고 침대 쉬트를 뒤집어 썼습니다. 솟아나는 눈물을 주체 못하면서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어쩌실겁니까? 제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로 작정하신 것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왜 제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병원에 와서 수술을 받은지 벌써 두달이 넘었는데, 언제까지 여기 두실 겁니까? 정말 하나님께서는 저를 사랑하시는겁니까? 이 고통 속에서 어떻게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습니까? 예수 안믿는 사람은 수술이 잘 되어서 예정한 날자에 퇴원하는데 저는 이게 뭡니까?” 눈물을 쏟으며 부르짖었을 때 제 가슴 속에 주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그해 봄 요양원에서 각혈하면서 고통 속에 있을 때 들려주셨던 마태복음 10:29 이하의 바로 그 말씀이었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놓고 계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고난을 알고 계신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침묵하시면서 이 고통을 내게 허락해 주셨다. 내 상황은 도저히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없는 형편이지만, 이 상황에서 눈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분명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 고통을 허락하신다면 분명히 뜻이 있으실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좀 더 참고 기다리자.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믿게 되자 희망이 솟아났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나를 이 고통 속에서 풀어 살리실 것이다. 퇴원케 하실 것이다. 석달 만에 세브란스 병원에서 퇴원했습니다. 그러나 이 퇴원이 투병의 마침표는 아니었습니다. 일년 후 저는 또한번 폐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이후도 평탄치는 않았습니다. 저는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서 건강 때문에 가장 많이 어려움을 겪은 사람 가운데 한사람 일 수 있습니다. 제게도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사랑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고통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될 때, 모순 투성이 처럼 보이는 하나님을 떠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해결은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마저 안계시다면 절망이었습니다. 무너져 내림이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다고.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붙들면 살 수 있습니다. 일어설 수 있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나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을, 나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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