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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27. Rev. Steve R. Jones

"What's in a name(이름 안에 담긴 것)"

이사야서 43:1-7

여러분 가운데는 미국에서 저의 성(Last Name) Jones가 앵글로나 코케시얀들 가운데 가장 흔한 성인 것을 아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Anglo 사람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Last Name)은 Jones, Smith 그리고 Johnson입니다. 아마도 이 세 성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어떤 성을 가진 사람보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삶을 통해서 경험한 것은 미국 사람들 가운데 제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미국에 사시면서 여러분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사람들을 만나신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Jones 같은 이름은 잘 기억하리라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 성이 너무 흔하다 보니까 다른 흔한 성들과 혼동을 해서 사람들이 저를 Steve Smith 혹은 Steve Johnson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은 제가 흔한 성을 갖고있다는 것은 알지만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또 어떤 때는 성은 바로 부르지만, 제 first name을 기억 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Bill 혹은 Ed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그들은 Bill Jones라는 사람을 알기 때문 일 것입니다.

제가 Warrenton에서 목회할 때 Sam Jones라는 침례교회 목사님이 계셔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침례교회와 연합감리교회는 Warrenton에서 제일 큰 교회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든지 안다니든지 두 목사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목사가 Sam 이고 어느 목사가 Steve인지는 분명히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나는대로 부르다 보니까, 제가 Sam으로 불리기도 했고, 침례교회 목사님이 Steve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서 이런 일이 한국에 있는 한국인들이나 한인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미국사람들이 여러분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는데, 한국에서도 그 성씨가 너무 흔하다보니까 그 성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아침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것은 성경에 있는 많은 말씀들 가운데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에 대한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자 이사야가 외친 말씀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자 그대로 이방나라에 의해서 강제로 바벨론 땅에 옮겨져서 사랑하는 동족들과 조상들을 떠나 살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서 당신의 신실하심을 외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 속에서 결코 유대백성들을 잊지 않으셨으며 이 백성은 여전히 하나님께 귀한 존재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43:1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의 것이다.” 다시 한번 되풀이 해서 읽어 보십시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수 있는 분이심을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이름을 혼동하시거나 제맘대로 부르시거나 잊어버리는 일이 없으십니다. 결코 그런 일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십니다. Jones와 Smith가 다름을 아시고, Sam Jones가 아니라 Steve Jones임을 정확히 아십니다. 김씨와 박씨가 다른 것도 아시며, Gonzales와 Rodriguezes가 다른 것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한 위대한 사랑을 확인해 주십니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오늘 저는 이름을 바르게 부르거나 이름을 혼동해 부르는 것들을 큰 문제로 지적할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름을 좀 잘못 불러도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을 바로 부르는 것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또한 문제가 되는 가르침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학자들이나 성서학자들은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시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개인적인 관계의 중요성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하고 광대하시며 모든 우주 만물을 지으신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한계가 있고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들을 아십니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아십니다.

저는 이 사실이야말로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 성서의 이야기들은 바로 이러한 개념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르신다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가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가 죄를 짓든 말든 하나님께 무슨 문제가 됩니까?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야말로 다른 모든 것들을 세워 나가는 기초석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기본적인 개념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사람들에게 문제나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돌보신다는 이야기는 논리적이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무한하고 영원하신 천지만물의 창조자께서 이렇게 유한하고, 제한된, 잠깐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돌보신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이 되지를 않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뒷마당 흙속에 있는 두가지 미생물을 돌볼 것을 기대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두 미생물의 존재라는 것을 알기도 어렵지만, 그들에 대해 염려하거나 그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하나님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돌보신다는 사실이 문제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논리적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받아들이기 쉽든지 어렵든지, 이 인격성이야말로 성경이 말해주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언제나 선포하는 것이며 우리 모두 체험하는 사실입니다. 항상은 아닐지 모르지만, 종종 이 사실을 체험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귀중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저는 여러해 전 Lynchburg에서 교회를 섬길 때의 경험을 잊지 못합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에 Johnny Johnson이란 분이 계셨는데, 암의 진단을 받으시고 1년 가까이 병원을 드나드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저는 병원으로 혹은 그분 집으로 종종 심방을 갔습니다. 하루는 출타 중 다른 곳에 갔었는데, 갑자기 Johnny의 집에 가서 안부를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를 몰고 가서 그 집 앞에서 bell을 누르는 순간, 바로 문이 열리면서 Johnny의 며느리가 나타났습니다. 이 며느리는 Johnny가 집에 있을 때 종종 그를 방문했습니다. 문이 열리면서 저를 보는 순간 그 며느리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서 들어오셔서 저를 도와주십시오. 시아버님이 침대에서 떨어지셨는데, 제가 침대에 다시 올려 드릴 수가 없습니다.” Johnny도 침대로 돌아가려고 노력했지만,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Johnny는 큰 체구였는데 비해 며느리는 아주 조그만 여인이었습니다. 그녀 혼자서는 도저히 Johnny를 침대로 올려 놓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두사람은 힘을 모아서 Johnny를 다시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리빙룸에 와서 저는 말했습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힘들었을텐데, 제가 와서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며느리가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시아버님이 떨어지셨을 때 소리를 듣고 그 방에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없어 도움의 손길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했습니다. 그 일 밖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시아버님 사랑하는 것 아시지요. 또 시아버님이 얼마나 아프신지도 아시고, 제 힘으로는 침대에 올려드릴 수가 없음도 아시지요. 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보내주십시오.’ 제가 이 기도를 드리는 순간, 도어벨이 울려서 나가 보니 목사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솔직히 제 마음 한구석에는 하나님께서 며느리의 기도를 들으셔서 그날 제가 그곳에 갔다는 사실을 수긍하지 않으려는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생각에 하나님께서 언제나 이렇게 역사하신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할 일이 너무 많으시기에 연노한 한 환자에게 까지 관심을 기울이실 지 모르겠습니다. 늘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기도에 이렇게 응답하시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은 길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러나 간단한 진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날 한 여인이 기도했고, 제가 계획에 없었던 Johnny의 집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같은 경험을 합니다. 언제나는 아니지만 간혹 이런 경험들을 합니다. 우리가 이런 경험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본성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독특하고 귀한 존재로 붙들어 주십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고 돌보십니다.

이 위대한 사랑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스스로를 일깨우며 이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우리 모두가 선포해야 하는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여러분께서 이 사랑을 표현하기를 원하신다면 저 처럼 이렇게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아십니다. 우리의 정확한 이름을.” 아니면 이사야 49장의 말씀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보아라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