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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3. 조영진 목사
"생명의 복음(6)- 처음 제자들"
요한복음 1:35-5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에서 를 양성함에 큰 비중을
두셨습니다.
I.세례 요한은 두 제자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안드레는 자기 형-------을, 빌립은--------을 각 각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II. 예수님께서는 세 과정을 통하여 제자를 양성해 내셨습니다.
(1)-------------------------
(2)-------------------------
(3)-------------------------
III.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함께 나눌 물음들
(1) 나는 어떻게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까?
내 삶 속에 어떻게 주님의 부르심이 임했는지 함께 나눕시다.
(2) 나는 오늘 더 깊이 주님을 배우고 있습니까?
성숙한 주님의 제자로 자라가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3) 나는 오늘 복음의 증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가장 뜻깊었던 복음증거의 경험을 나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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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오르셨을 때입니다. 천사들이 예수님께 여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땅 위에서 인류의 구원의 역사를 다 이루고 오셨나요?” 예수님께서는 아직 다 이루지 못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천사들은 “그러면 어떻게 하고 오셨나요?”라고 여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남겨놓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사들은 걱정어린 표정으로 예수님께 다시 여쭈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실패하면 어떡하시렵니까? 그들은 모두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다고 합니다. “They will never fail(그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보리떡 같이 보잘 것 없고 변변치 못한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은 승리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고난과 핍박을 극복했습니다. 예수님께로 부터 훈련받은 제자들 답게 땅끝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헌신, 그들의 땀과 눈물이 밑거름이 되어 이 복음은 은둔자의 나라였던 한국 땅에도 전해졌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 복음 안에서 길을 찾았습니다. 생명을 찾아 누리며 21세기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펼쳐진 예수님의 사역에서 중요한 부분은 제자들을 부르셔서 양성해 내신 일입니다. 만일 제자들을 기르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당대로서 막을 내렸을 것입니다. 땅 끝은 커녕 유다와 사마리아도 못가서 끝났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여기 모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생과 역사를 살리는 예수님의 사역이 오늘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제자를 길러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도운동을 이어갈 제자들을 양성해 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일찍부터 사람을 길러내는 사역, 제자 양성의 중요성을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초기 전도활동의 모습을 살펴보면 제자들을 부르시고 택하신 기록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처음 제자들을 부르시고 만나주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I.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먼저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 두사람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두 제자가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 가운데 한사람이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기로 약속한 “메시야” 곧 구원자이심을 깨닫고 형 시몬을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는 바위 혹은 반석의 뜻을 가진 계바(혹은 베드로)라고 부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게 되었습니다.
1:43 이하의 말씀은 또 다른 제자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빌립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시려고 할 때 빌립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벳세다 출신으로 베드로, 안드레 형제와 같은 고향 출신인 빌립은 예수님을 만난 후, 그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서 약속하신 구원자, 바로 메시야임을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빌립은 이 놀랍고도 기쁜 소식을 접하고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자기가 만난 메시야, 구원자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처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예수님을 만나본 후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1:49).”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나다나엘을 본적이 있음을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이것보다 더 큰일도 볼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II.
오늘 본문 말씀, 그리고 성경 속에 나타난 처음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삼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셨을 뿐만 아니라, 대개 세단계를 거쳐서 제자들을 길러내셨습니다.
(1) 첫째는 부르심의 단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다양한 채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이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소개한 이 일을 통해서 제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증거, 이미 믿는 사람들, 혹은 설교자의 증거를 통해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또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를 통하여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다나엘은 친구 빌립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립은 직접 예수님을 만나면서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의 부르심의 통로는 다양합니다. 어려서부터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신 여러분들, 하나님께서는 부모님을 통하여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오늘도 “와 보라”는 친구의 권유를 통하여 제자의 길에 나오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또 어떤 때는 풍요함이 주는 삶의 무의미함과 공허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채널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더 이상 갈곳이 없는 고난의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 그 고난, 그 아픔이 채널이 되어서 주님 앞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여기, 이렇게 모이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이 삶 속에 임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내가 믿게 된 것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고집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이 가능케 된 것은 먼저 우리 주님께서 다양한 채널로, 이 길, 저 길을 통하여 여러분을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부르심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은혜를 깨닫게 되면 우리 인생은 달라집니다. 내 존재가 하나님의 아신 바 되고, 부르신 바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 앞에서 인생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열등감과 자신감 없는 인생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가슴을 펴고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2) 두 번째 단계는 양육 혹은 성숙의 과정입니다. 부르심은 첫 단계입니다. 부르심 받은 우리는 제자로서 자라가야 합니다. 훈련받아야 합니다.
요한의 증거를 듣고 안드레와 또 다른 제자가 따라 나섰을 때,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두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랍비님, 어디에 묶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와서 보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가서 그날을 주님과 함께 보내었습니다. 빌립의 권유를 받고 나아온 나다나엘도 자신의 모습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 앞에서 그분이 누구신지를 깨달았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라는 비관적인 생각, 부정적인 사고가 깨어지고,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 되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훈련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3년 가까운 세월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함께 걷고, 함께 지내는 합숙훈련을 받았습니다. 때로는 따르는 무리들을 뒤로하고 주님께로부터 과외 교습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 둘씩 둘씩 짝을 지어 파송을 받아 전도 실습 훈련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훈련을 통하여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릇들로 다듬어져 갔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부름 받아서 교회에 나오시게 된 것,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일 예배 한번 드리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빨리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제자로 자라가야 합니다. 부지런히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나누고 말씀을 실천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No Discipline, No Disciple(훈련이 없이는 제자가 될 수 없다)”입니다. 안드레와 또 한 제자가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가 깊은 대화를 나눈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나아와 깊은 대화를 나누며 배워야 합니다. 제자로서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과연 우리의 구원자이신지 아닌지도 모른 채 그냥 왔다 갔다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저희 교회는 제자로 훈련받는 길을 3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앙교육 과정입니다. #101 “생명의 길”부터 시작해서 필수과목, 선택과목들을 열고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의 믿음을 삶으로 고백하는 평신도 사역입니다. 여러 사역팀들을 통하여 섬김의 삶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셋째는 속회입니다. 속회는 함께 제자로 자라 가는 나눔의 공동체입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위해서 기도하면서 함께 배우고 자라 가는 훈련의 장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같은 제자로 자라 가는 성숙의 과정에 더 많은 교우들이 참여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막하는 말로 여러분, 배워서 남 줍니까? 제자훈련을 받아서 남 주십니까? 누가 득을 봅니까? 부부 사랑 축제도 일일이 전화 걸고 부탁을 드렸는데, 여러분, 가셔서 부부관계가 회복되어서 남 줍니까? 부부가 행복을 되찾으면 우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두 분이 새날을 살아가실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참석하실 분들을 구하기가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우리 부부의 문제가 노출되는 것이 두려운 것 이해되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제자로서 자라가는 훈련에 무관심하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런 생각에서 제일 손해보고, 제일 밑지는 것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셋째는 훈련받고 제자가 되어 보내심을 받는 것입니다.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도 이 사실은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계신 곳을 찾아왔던 안드레,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이심을 깨달았을 때, 그대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형 시몬을 만나 메시아를 만났음을 밝히고 형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빌립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이 성경이 약속한 메시아이심을 깨달았을 때, 그는 친구 나다나엘을 만나서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 라고 부정적인 반응에 부딪쳤지만, 그는 “와서 보시오”하면서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은 바로 제자로, 증인으로 부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교회는 2002년 채택한 선교 선언문에서 이 사명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와싱톤 한인교회는 땅끝까지 이르러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사명을 받아 가까이서 그리고 나아가서, 입술로 그리고 사랑의 손길로, 우리 교회 자체로 또는 다른 교회와 연대하여, 구원의 복음을 세상 속에 증거 하는 균형 있는 선교를 펼쳐나간다.” 여러분 여기에서 와싱톤 한인교회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여러분과 저입니다. 우리 모두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입니다. 나가서 입술로 혹은 삶으로 증인의 삶을 살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성숙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No Mission, No Disciple(선교가 없으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제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양성해 내신 원조 제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오늘 21세기 워싱턴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요청되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III.
오늘 한국의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이 삶에 중요한 도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이 둔화되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것은 교회의 이미지가 세상 속에 점차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전 한국에서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울 때, 어떤 기관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70.3%는 찾아갈 곳이 있다고 대답했고, 나머지 중에서 12.8%는 시민단체, 사회단체를 찾겠다고 했고, 8.4%는 불교, 7%는 천주교 성당을 찾아가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찾겠다는 사람은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0.7%에 불과 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말 걱정스러운 현실입니다. 참으로 가슴아픈 현실입니다.
오늘 미국의 한인동포사회는 어떻습니까? 한인교회는 어떻겠습니까? 한국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기대해 봅니다만, 우리도 정신 차려야 됩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부르심의 은총에 응답해서 제대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제자로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조연경님이 쓰신 썬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여자라는 꽁트집에 실린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제 설교를 줄입니다.
청년은 죽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부모형제 없는 홀홀 단신에다가 배움도 짧았고 거기다 천식 때문에 환절기에는 늘 콜록거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폐병환자로 오인 받아 자동차 수리 센터에서 세차하는 일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를 사람 대접 해 준 숙이와도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숙이는 자동차 수리센터 앞에 있는 꽃집에서 일하는 청년 또래의 예쁜 아가씨였습니다.
숙이가 시집을 가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 가던 날 함박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숙이는 천식에 좋다는 약 한 병을 청년의 손에 꼬옥 쥐어주고 말없이 돌아섰습니다. 청년은 눈사람이 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이제 다시 숙이를 못 보겠구나) 청년은 외로움 때문에 가슴 한 귀퉁이가 저려왔습니다. 지독한 외로움은 두려움이기도 했습니다. 청년은 서서히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습니다.(어디로 가나?)
자신이 자란 고아원이 생각났지만,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청년은 전봇대에 붙은 ‘사람을 구함’이라는 종이를 보고 몇 군데 찾아가 보았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습니다. 신원을 보증해 줄 사람이나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은 몹시 배가 고팠습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백원 짜리 동전 네 개가 잡혔습니다. 그 돈으로 백원 짜리 붕어빵을 세 개 사먹고 나머지 백 원은 비상금으로 두었습니다. 급할 때 어디 전화라도 걸 돈, 그러나 청년은 자신이 전화를 걸 수 있는 곳은 이 세상에 단 한군데도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청년은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춥고 너무 배고프고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외로웠습니다.(그래, 죽으면 아무 것도 못 느끼니까 좋을거야. 평온해지겠지.)
청년은 죽기로 마음먹고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교회 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소리나는 쪽을 보니 빨간 벽돌로 지은 아담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청년은 갑자기 콧등이 시큰거렸습니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 때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교회에 간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산 행복한 시간은 5년이었습니다. 청년이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이 널 돌봐주실거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청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발걸음을 교회로 옮겼습니다. 죽기 전에 예배실 안에 마련되어 있는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살그머니 문을 열고 예배실 안으로 들어가니 노신사 한 분이 구석자리에 앉아 기도를 올리고 있을 뿐 예배실은 조용했습니다. 청년은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중앙에 그려진 십자가를 보니 왠지 눈물이 주르륵 흐르면서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남들은 다 행복한데 나만 왜 이렇게 찬밥 신세인가?)
청년은 죽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때 기도를 마친 노신사가 몸을 돌려 청년 쪽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윤이 흐르는 새까만 털코트와 금테안경이 잘 어울리는 노신사였습니다. 청년은 자기의 차림새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겨울인데도 홑겹의 봄잠바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교회 앞에 세워진 은회색 승용차가 노신사 것인 듯했습니다. 청년은 노신사한테 공연히 화가 났습니다. 못 가진 자의 슬픔이 그런 식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청년은 자기를 향해 온화하게 웃고 있는 노신사를 무시하고 문 쪽으로 향했습니다.
“나 좀 봐요.”
노신사가 불러 세웠습니다. 청년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습니다.
“나하고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노신사는 청년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대로 돌아가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노신사는 청년 곁으로 다가오더니 청년의 손을 잡았습니다. 말할 수 없이 따뜻한 손이었습니다. 노신사와 청년은 나란히 앉았습니다.
“기도했어요?”
노신사가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전 기도 같은 거 안해요. 하나님은 절 좋아하시지 않으시니까요. 그러니까 저한테 나쁜 일만 생기지요. 전 결국 죽을 결심을 했어요. 사는게 너무 힘들어요.” 청년은 처음보는 노신사 앞에서 너무도 쉽게 마음을 털어 놓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노신사의 온화한 미소와 따뜻한 손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어요.” 노신사가 말했습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선생님은 가진게 많으시니까요.” 청년은 심통을 부리듯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맞아요. 난 가진게 많아요.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아주 평온하게 살아왔어요. 뿐만아니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나는 그 말을 믿기 때문에 지금도 평온해요. 난 앞으로 3개월 밖에 살 수 없는 암환자랍니다.”
“네?” 청년은 놀라서 노신사를 바라보았다. 아니 죽을 병에 걸렸는데도 ‘감사합니다’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갖고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세요. 죽는건 그렇게 급하지 않아요.”
노신사는 청년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리고 털코트를 벗어 청년의 몸에 걸쳐주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저어.” 청년은 다급하게 노신사를 불렀지만 노신사는 그대로 떠났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들?) 청년은 그것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아직 젊고 천식이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건강한 편이다. 바둑도 잘두고 얘기도 잘한다. 양반집 규수처럼 바느질도 잘하고 음식도 잘만든다. 자동차를 남들보다 빠른 시간에 깨끗하게 닦을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요즘은 자동차가 어디 고장이 났는지 본넷만 열면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아, 그렇다. 그 노신사분이 주고간 이 털코트도 이젠 내것이구나. 청년은 죽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보리라. 그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황급히 다시 앉았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열심히 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의 메시야,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 복음 안에서 제자로 자라가야 합니다.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노신사 처럼 말입니다. 좌절과 낙심 속에 희망을 심기 위해서 말입니다.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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