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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30. 조영진 목사

"생명의 복음(5)- 당신은 누구요?"

요한복음 1:19-34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를 아는 것입니다.

I. 세례자 요한은-------------가 분명했습니다.
---------에서---------의 소리라고 밝혔습니다.

I. (1)그는----------도 아니고
------------도 아니고
------------도 아님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2)그는----------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이해했습니다.
(3)그의 사명은-----------를 소개하고
백성들로 하여금----------하고---------를 받게 했습니다.

III.우리 모두도 그리스도의----------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 나눔을 위한 물음들

(1) 나는 누구입니까? 내 자신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이해를
함께 나눕시다.
(2) 내 주변에서 그리스도를 전해준 사람들, 나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한 사람이 있으면 그분의 삶을 나누어 봅시다.
(3) 내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전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부정적인 모습이든 긍정적인 모습이든 그리스도인됨을 들어낸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여러 해 전 한국에서 교회를 섬길 때입니다. 한번은 학생들에게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주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쓰라고 했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각자 쓴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답들이 나왔겠습니까? 대부분의 대답은 “나는 ○○○이다.” “나는 ○○○에 산다.” “나의 부모님은 누구 누구시다.” “내 친구는 ○○○이다.” “나는 몇 살이다.” “나는 ○○에서 태어났다.” 대부분 이런 대답이었습니다.

이런 대답 속에서 느낀 것은 사람들은 자신을 정의할 때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가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부모님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혹은 지역, 학교와의 관계 이 모든 관계들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이름 역시 부모님이 지어준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대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I.

이 아침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2000여년전 요단강가에서 이 질문에 접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세례자 요한 입니다. 전에도 잠시 말씀 드린 것처럼 세례요한은 예수님 태어나시기 6개월 전쯤에 태어났습니다. 누가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세례요한이 임신이 되는 과정에는 특이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가랴가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기 위하여 성소에 들어가 분향할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 분향하는 제단 오른쪽에 섰습니다. 천사는 사가랴에게 “두려워말라”고 권하면서 아내 엘리사벳이 세례요한을 잉태할 것을 예고했습니다. 사가랴는 부인이 나이 많으니 어떻게 아기를 갖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천사는 자신의 이름을 가브리엘이라고 밝히면서 네가 이 기쁜 소식을 믿지 않았으므로 이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말을 못하는 언어장애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천사의 말대로 사가랴는 엘리사벳이 임신해 있는 기간동안 말을 못하게 되어 세례요한은 출생 때부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세례요한은 어려서부터 포도주와 독한 술을 입에 대지 않고 구별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커서는 광야에 나가서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면서 유다 백성들에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세례요한의 권고에 따라 회개의 표시로 요단강에 나아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요한의 사역이 점차 예루살렘에 알려지면서 유대 사람들, 곧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사람을 보내어 질문을 제기 했습니다. “당신 누구요?” 세례요한은 이 질문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왜 이 사역을 하는지 확실하게 밝혔습니다.

II.

좀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당신이 누구요?”라는 질문에 세례요한은 먼저 자신이 아닌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먼저 세례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가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당신이 엘리야요?”라고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 말라기에 보면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와서 백성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이킬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은 엘리야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예언자요?”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기전에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묵시문학에 기록된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은 예언자도 아니라고 답변했습니다.

여러분, 세례요한 이같은 대답은 자신의 정체성, identity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당시에 세례요한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요한이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보내는 찬사와 인기에 영합하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신에 대한 주제 파악이 분명했습니다. 자신이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선, boundary에 대한 이해가 분명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주연이 아니라, 조연임을 확실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제 파악에 실패하는 경우를 봅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부추기는 소리에 휩싸여 되지도 못한 사람이 된 줄로 착각합니다. 조연인 사람이 주연인 줄로 착각합니다. 섬겨야 하는 사람이 섬김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고 부끄러운 인생인데도, 부유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인 줄 착각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모습이 영양실조로 초라한데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레이건 대통령때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이 그런 실수를 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저격 당했을 때, 대통령직 승계 서열에서 한참 아래인 그가 마치 자신이 대통령직을 이어 받을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다가 결국은 국무장관 자리를 그만 둔 적이 있습니다. 주제파악을 하지 못했던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깨어나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 경계선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예언자도, 아니라는 세례요한의 응답에 사람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좀 해 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시오?” 그때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세례요한은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인류 구원의 역사의 빛에서 자신의 존재, 자신의 사명을 이해했습니다.

여러분, 이 점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붙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입니까? 이 물음에 대하여 우리는 여러 관계들 속에서 대답할 수 있습니다. 누구의 자녀이고, 누구의 친구이며, 어디에 살고, 이름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 identity를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다면,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리 인생, 나 자신을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미국 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서 정체성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이 땅에 살아도 여전히 Korean이라고 믿으면서 이 정체성을 굳게 붙들고 살아갑니다. 어느 분은 잘 때 머리도 대한민국을 향하도록 하고 잔답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이제는 미국에 왔으니 미국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면서 바나나 예찬론을 말합니다. 겉은 노랗지만 속이 흰 바나나처럼 우리의 겉모습은 한국인 그대로지만, 속은 미국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 일리가 있고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정립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이 사실보다 더 중요한 정체성은 없습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한인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땅, 미국에 세워진 교회들로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국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미국교회도 바라보고 그들 속에서 영향을 주는 교회로 자라가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이 땅에 한인교회를 세우실 때 우리끼리 담쌓고 살아가라고만 하셨겠습니까? 이 땅 미국을 향하여, 그리고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없으시겠습니까?

오늘 세움을 받으시는 권사님, 장로님 여러분께서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직분을 이해하고 받으시기 바랍니다. 천거위원들이, 혹은 교회에서 주는 직분이라는 이해를 넘어서시기 바랍니다. 이 직분은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직분이며, 더 많이 낮아지고, 더 많이 섬기라고 주시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맡겨 주시는 그 은혜, 그 사랑을 기억하시며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3)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자신의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도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백성들에게 소개했습니다. 1:26을 보면 “나는 물로 세례를 주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한 분 서 계시오.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만한 자격도 없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1:29이하의 말씀에서도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가 물로 세례를 주는 것도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려는 것임을 밝히면서(1:31), 그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깨달은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는 증거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이 예수님을 맞이하는 가장 중요한 준비는 바로 회개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외침에 응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난날을 돌이키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들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아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은 충성스럽게 주님의 오실 길을 준비했습니다. 신실하게 주님의 길을 곧게 하였습니다. 오시는 예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서두르게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6이하의 말씀은 세례요한의 사역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 사람은 그 빛을 증언하러 왔으며,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오늘 세움을 받으시는 권사님, 장로님들, 여러분들도 빛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빛이 아닙니다. 다만 빛에 대하여 증언하는 사명에로 부름 받으셨습니다. 빛이 되려는 유혹을 뿌리치시고, 빛에 대한 증인의 자리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보여지고 그리스도께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배 드리시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빛의 증인들로 부름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입술, 여러분의 얼굴,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증거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이 시대를 세례요한 같은 사명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얼굴의 밝은 미소 하나가 그리스도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한 부인이 역 앞에서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례합니다, 부인! 사실은 당신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감사의 말씀이라고요?”
그 여인은 놀라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인! 저는 오랫동안 런던 역에서 승객들의 표를 조사하던 역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표를 건네주고 갈 때마다 밝고 명랑한 웃음으로 아침 인사를 대신 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의 그 미소가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후 어느 날 아침이었죠. 나는 당신의 손에 조그마한 성경책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나도 그 성경책을 사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 책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III.

오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누구인지를 잊고 사는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바쁘게 여기 저기 다니지만 왜, 무엇을 위하여 사는 인생인지를 잊어버린 채, 생각도 하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세례 요한에게 던진 질문은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질문입니다. “당신은 누구요?”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어디에서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까?

해답은 우리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께로 돌아가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이 내가 누구인지, 내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증인들입니다. 세례 요한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이 시대 속에서 빛되신 주님을 전하는 증인들입니다.

여러분, 나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사명을 찾아야 합니다.

독일의 나치 치하에서 히틀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주인 되심을 외치다가 사형을 당한 고백교회의 본회퍼 목사님은 감옥에서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태연하게, 명랑하게, 확고하게,
영주가 자기의 성에서 나오는 것처럼,
감방에서 내가 나온다고 사람들은 자주 내게 말하지만,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자유롭게, 다정하게, 맑게,
명령하는 것이 나인 것처럼,
간수들과 내가 대화한다고 사람들은 자주 내게 말한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침착하게, 미소하며, 자랑스럽게,
승리에 익숙한 자와 같이,
불행한 나날을 내가 참고 있다고 사람들은 내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사람일까?
그렇지 않으면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 사람일까?
새장 속의 새와 같이 불안하게 그리워하다 병들었고,
목을 졸렸을 때와 같이 숨을 쉬려고 몸부림치고,
색채와 꽃과 새소리를 갈구하고,
부드러운 말과 인간적인 친근을 그리워하고,
자의와 사소한 모욕에도 분노에 몸이 떨리고,
대사건에의 기대에 사로잡히고,
저 멀리있는 친구를 그리워하다 낙심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창작하는데 지쳐서 허탈에 빠지고,
의기소침하여 모든 것에 이별을 고하려고 한다.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오늘은 이런 사람이고 내일은 다른 사람일까?
양자가 동시에 나일까?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기 자신 앞에서는 경멸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약자일까?
혹은 아직 내 속에 있는 것은,
이미 승패가 난 싸움에서,
흩어져 퇴각하는 패잔의 군대와 같은 것일까?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누구이건
오 하나님, 당신은 나를 아시옵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주님은 아십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소유, 주님의 증인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