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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9. 조영진 목사

"생명의 복음(2)- 말씀이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1-5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요한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과연 내게서 누구십니까?
그분은 오늘 이 세상 역사 속에서 누구십니까?

지난 주일부터 저는 요한복음 연속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생명의 복음”이라는 큰 제목 밑에서 계속 될 금번 연속설교의 첫 시간에 저는 요한복음서가 기록된 목적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에 관한 많은 이야기와 전승들 가운데서 선택된 이야기들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복음서의 목적은 예수님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의 전달을 넘어서서 예수께서 바로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함으로 사람들이 믿고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선교적인 목적에 있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가?를 밝히는 몇가지 접근 방법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from behind(과거로부터)” 예수님의 모습을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이미 구약성서 속에 나타난 메시야, 구원자에 대한 많은 예고와 약속의 빛에서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치심을 봅니다. 예수님은 바로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마태복음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태복음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마리아의 수태도, 베들레헴에서의 탄생도, 에집트로의 도피도, 각색 병자를 고치신 일도 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이 성취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둘째는 “from below(아래에서 부터)”의 접근입니다. 이것은 땅 위에서 남겨주신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치심을 열린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연구해 보니까 과연 그분은 우리의 그리스도, 구원자가 되신다고 이해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셋째는 “from above(위로 부터)”의 이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우리의 구원자시라는 관점에서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치심을 조명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은 어디에 속할 것 같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요한복음서는 세 번째의 접근 방법으로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기록했습니다.

I.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요한복음 1:1-18을 prologue, 서언으로 부르면서 이 부분의 중요한 특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설(Pre-Existence)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하신다는 주장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같은 이해를 전해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기록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말씀, 희랍어로는 logos라고 하는 이 단어는 요한복음서가 예수님을 묘사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이 말은 희랍 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Logos, 즉 말씀은 온 세상 만물에 질서를 주고 통제하는 하나님의 이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성은 인간도 아니고 신도 아닌 제2의 신적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중보자 같은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희랍적인 말씀 이해는 신약성경의 말씀 이해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희랍 사람들은 인간의 육체나, 물질을 부정하게 보아서 Logos가 인간의 몸으로 우리 가운데 임했다는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한 이 배경에는 유대교 신앙의 깊은 영향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말이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그 안에 능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지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 말씀이 갖는 더욱 중요한 의미는 말은 존재를 보여주는 자기 계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 독특한 모습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환상이나 꿈을 매개로 이야기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찍부터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예언자들의 멧세지는 하나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배경에서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자신의 계시로 표현했습니다.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초기 교회 교부 중 한사람이었던 Origen은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고, 종교개혁 운동을 이끈 지도자였던 John Calvin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하신 뜻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II.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표현하면서, 이 말씀이 갖는 몇가지 본질을 말합니다.

(1) 첫째는 이 말씀이 태초에 계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태초는 창세기에 말하는 태초와는 의미가 다릅니다. 창세기의 태초는 역사의 시작, 우주와 인간 역사의 시작의 때를 말하지만, 요한복음서에서의 태초는 창세기의 태초 이전,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의 처음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 처음부터 계셨습니다. 아니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2) 이 말씀은 또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이 이해되기가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이시라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 될 수 있습니다. 또 이런 구절은 하나님이 한분이시라는 유일신 신앙과 대치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함께 계셨다는 의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교제를 나누어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요한복음서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스승으로 이해하고 그를 따르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분이 지니셨던 믿음을 우리도 배워가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믿고, 그분을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는 일은 특별히 오늘과 같이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시대에서는 극복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또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이 과연 성서적인지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그분은 위대한 우리의 스승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분명히 밝혀졌다고 말합니다. 의심쟁이였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만일 부활이 없는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믿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그분이 바로 누구신지를 깨닫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또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삼위일체를 말하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한가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말하는 근거가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단지 위대한 스승, 인간에 불과하다면 그분 역시 우리 인간과 같은 죄인인데 그분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보다 좀 나은 분일지는 모르지만 그분 역시 죄인임을 벗어버릴 길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같은 인간이 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실 수 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인간 구원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처음 교회의 중요한 고백이었습니다. 어쨋든 오늘 본문 말씀은 선언합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라고.

(3) 이어서 1:3 말씀은 말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으며 그분이 없이는 창조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일반적으로 창조의 역사는 하나님 아버지, 성부 하나님의 역사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냥 팔짱끼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밝힙니다. 말씀되시는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창조의 역사에 참여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15이하의 말씀도 이같은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나신 분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4) 이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의 역사는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4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 안에서 생명을 회복하는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이어가고 계십니다. 이 생명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 처럼 그냥 살아있는 것, 숨쉬고 먹고 하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생명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입니다. 풍성한 인생입니다. 더 잘 먹고,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자동차 굴리면서 사는 그런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로 계시는 장영희 교수의 칼럼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한때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레이철 레멘의 '부뚜막 지혜'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심리치료 전문의사인 작가는 자신이 상담했던 환자들에 대해 적고 있는데, 2년 전 전립선암에 걸리고 나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존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죤은 성공한 실업가로서 늘 바쁜 일정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암이 걸리기 전 자신이 추구했던 행복의 조건은 "과자가 있는 삶"이었다고 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과자를 원하듯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늘 무언가를 원했습니다. 그 과자란 때론 돈이고, 때론 권력이고, 또 때론 새로 사들인 자동차요, 큰 사업 계약, 호화주택가의 주소 등 이었습니다.

존은 말했습니다. "내 아이에게 과자를 주면 아이는 행복해 합니다. 그렇지만 그 과자가 부서지거나 내가 그것을 치워버리면 아이는 화내고 슬퍼합니다. 저도 늘 그런 식으로 과자를 원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획득하면 기쁘고 그렇지 않으면 화가 나고 슬펐지요. 이제는 그 과자가 진정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아이는 세살이고 나는 마흔세살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데 40년이 걸린 셈이지요. 과자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걱정하느라, 더 많은 과자를 뒤로 감추느라 바빴습니다. 그런데 2년 전 암이 내게 물었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과자인가 삶인가?'이제는 알고 있지요. 삶 자체가 과자라는 것을…."

여러분, 계속 과자를 찾는 삶은 생명일 수 없습니다. 삶 자체가 과자여야 합니다. 삶 자체가 뜻있고 아름답고 즐거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어디에서 그 길을 찾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선언합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씀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고 외칩니다.

III.

이어서 오늘 본문 말씀은 말합니다. 이 생명의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다고. 그런데도 어둠이, 인생들이 이 빛, 이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이 생명의 빛은 오늘 우리에게도 비추고 있습니다. 이 빛은 오늘 우리의 인생도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 빛으로 다 나아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생명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알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세고 계실 때
나는 돈을 세었고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것을 세고 계실 때
나는 얻은 것을 세었다
내가 곳간에 쌓아둔 물건들의 값어치를 세고 있을 때
하나님께선 나의 상처를 감싸주셨고
내가 지위를 구하고 명예에 눈이 어두웠을 때에
하나님께선 나의 무릎 위에 놓인 시간들을 세며 눈물 지으셨다
어느날 무덤가에 서기까지
그토록 얻으려고 했던 것들이
모두 헛된 것임을 알지 못하였고
내 모든 사랑하는 것들이 날아가 버릴 때까지
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이
가장 부유한 것임을 알지 못하였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오늘 나의 모습은 아닙니까?

빛되신 주님은 오늘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생명에로 나아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찬송가 95장, P.P.Bliss는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온 세상이 어두워 캄캄하나 이 세상의 빛은 예수
주 예수의 영광이 햇빛 같아 이 세상의 빛은 예수

주 예수를 믿으면 어둠 없네 이 세상의 빛은 예수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리 이 세상의 빛은 예수

죄 가운데 눈멀어 사는 자여 이 세상의 빛은 예수
주 이름을 믿으면 눈 밝으리 이 세상의 빛은 예수

저 천국엔 햇빛이 쓸데 없네 저 세상의 빛도 예수
그 높으신 곳에도 빛이시라 저 세상의 빛도 예수

이 빛으로 다 나아오라 밝은 그빛 날 비춰주어
어둡던 눈 곧 밝았도다 이 세상의 빛은 예수

제가 문전도사님께 이 찬송을 부탁드렸습니다. 찬송을 들으시면서 한번 오늘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말씀이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말씀이십니다. 빛되시는 말씀이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부르고 계십니다. 나오라고. 빛 가운데로 나오라고.

오늘 우리는 빛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나는 빛 가운데서 생명을 찾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