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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8. 문형일 전도사
"작게, 낮게, 그리고 느리게"
로마서 13:11- 14
바쁘시지요?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습니까?
만일 주님은 우리가 크고, 많고, 위대한 열매들을 맺기보다
오히려 “작고 낮게 그리고 느리게 살기를” 바라고 계신다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Advent, 강림절 첫 주일, 작고 낮게 그리고 오래 참으시며 우리를
사랑해 주시기 위해 오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주님 물으실 한가지 질문에 대답하는 인생 되기 원합니다.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네가 한 일이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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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늘 기분이 어떠십니까? How are you today? 행복하십니까? Are you happy? 지난 주 Thanksgiving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만나지 못했던 가족, 자녀들을 만나는 기쁨도 있었지만 오히려 오랜만의 어색한 만남 때문에 만나지 말았더라면 후회하시는 분은 없으십니까? 아마 그래서 하나님은 추수 감사절 다음에 한 달 간 서로에게 반성할 시간을 주시느라, 아니면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라고 우리들에게 12월 달에 성탄절을 만드셨는지 모릅니다.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아직 우리에게는 정확하게 27일이라는 Grace Period, 유예기간이 남아있습니다. 만일 이 기간 동안 여러분이 추수감사절 때, 아니면 일년간 진 빚을 다 갚는다면, 여러분의 크레딧 카드회사처럼 여러분은 이자 (Interest)를 물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감안하시고 아직 다 갚지는 않았지만, 희망을 가지고 우리가 병원에 가면 하는 것처럼 한번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병원에 가면 아픈 정도에 따라 10단계로 표현하는 pain numbering 이 있습니다. 번호가 클수록 아픈 것입니다. 가장 아픈 게 10입니다. 예를 들면 사촌이 집을 산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그 집 값이 1년 사이에 10배로 뛰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느끼는 내 배의 통증은 10입니다. 그러면 0은 누구입니까? 그런 사촌이 전혀 없으신 분들입니다. 거의 우리들에게 불가능한 수치입니다. 마찬가지로 행복 지수를 말씀드립니다. 지금 여러분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10은 가장 행복한 숫자입니다. 이것은 조금 전의 사촌이 바로 납니다. 내가 집을 샀는데 그 땅 값이 1년만이 10배가 뛴 사람이 느끼는 행복 지수, 요즘 이 버지니아에서 집을 사신 모든 분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러면 0은 누구입니까? 맞습니다, 집을 사지 못하신 분들입니다. 자 손을 한번 들어주시겠습니까? 행복 지수가 10이라고 생각되는 분? 손들어 주십시오. 0 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분은 그냥 가만히 계시기 바랍니다.
80년대 대학을 다닐 때 버스비만 달랑 가지고 학교를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날씨가 굳은 날, 비가 오거나 찌푸린 날, 다른 사람들이 기뻐하는 게 싫어서 그런지 그런 날 더 신이 났고 또 항상 우울하게 학교를 다녔습니다. 피아노 연습 실에서 하루 종일 연습을 해도 기쁘고 빠른 노래보다는 우울하게 살았던 독일의 음악가들, 특히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나 평생 우울증으로 고생했던 슈만이 작곡한 실연 당한 젊은 이의 노래 시인의 사랑, 친구를 원수로 만드는데 특별한 은사를(!)타고난 브라암스가 작곡한 엄숙한 노래를 더 좋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가끔 씩 예수님이라도 말을 못 붙여 볼 정 정도로 우울하고, 가끔씩 상처받고 가끔씩 고집을 부리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만일 오늘 여러분들께 한 것처럼 제 매일 매일의 생활을 행복지수로 매긴다면 0에서 5정도였습니다. 0에서 5의 수준으로 살던, 그래서 노래가 아니었다면, 미래에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없었다면 아마 저는 0으로 끝난 인생이 되고 말았을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 제 인생의 in between을 살고 있습니다. 제 나이 때문에 40십대 인생의 중반이라는 의미로가 아니고 제가 태어난 시작점에서 이제 인생의 끝이 날 그 시간의 중간을 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계시는 모든 분들은 바로 이 중간 점, 오늘 현재를 살고 계십니다. 쉽게 생각해 보실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가장 간단하고 정확하게 보여주는 장소가 묘지입니다. 그리고 묘비는 우리 인생을 단 두 개의 숫자로 말해줍니다. 첫 번째 숫자는? 네, 우리가 태어난 해입니다, 그리고 두 번 째 숫자는 우리의 마지막 해를 표시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숫자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맞습니다. 선이 하나 그어져 있습니다. 태어난 해와 마지막 해를 잇는 한 줄의 선, 영어로 Dash라고 부르는 선, 그것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리고 그 Dash, 오늘이라는 선은 숫자도 글자도 없는 선에 불과하지만 그 선으로 사람들은 우리를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 각자가 태어난 그 때 우리는 서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때에도 죽음을 맞은 그 사람은 산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없습니다. 다만 태어난 해와 마친 해의 중간 이 낀 세월 속에 일어났던 모든 것들로 우리를 기억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한번 뿐 이라고, 값진 것이라고, 세월을 아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목회자로 그 동안 여러 장례식에 참석해 보았지만 그 짧은 Dash 속에 우리가 살면서 가지고 있던 자랑, 명예, 학위를 넣는 사람을 저는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작가 마크 트웨인 은 “우리가 죽었을 때 장의사도 애도할 만한 그런 인생을 살자”라고 했는지 모릅니다.
파킹장 이야기 1편
한 남자가 러시모어산 rushmore)부근 블랙힐스(Blackhills)에서 차를 몰고 가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한 눈보라를 만났다. 반향 감각을 잃은 그는 얼마간 헤매다가 다행히 눈을 치우고 있는 제설차를 만났다. 마음이 놓인 그는 제설차 뒤를 바싹 따라갔고,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그때서야 앞서가던 제설차가 멈추더니 가사가 내려와서 물었다. “어디를 가시우?” 남자가 대답했다. “몬타나(Montana)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자 제설차 기사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나만 따라 다니면 어느 세월에 몬타나까지 가겠소?” 난 이 주차장에서 눈을 치우는 중이라오!“ I'am cleaning up this parking lot!
만일 이것이 생각 없이 바쁘게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웃을 수 없습니다. 특히 저처럼 길을 잘 잃어버리는 남자 분들은 웃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남자가 길을 잃어버린 장소가 어딘지 아십니까? 이 남자가 길을 잃은 곳의 이름이 Rushmore, 제가 우리말로 번역을 빨리빨리 산으로 했습니다. 빨리빨리, 마찬가지로 저 같이 성격 급한 남자 분들만 길을 잃어버리는 빨리빨리 산 부근의, 어디라고 했습니까? Blackhills 어둠의 언덕 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이 사람은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눈 쌓인 주차장에서 벗어나 몬타나로 갈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파킹장 이야기 2탄이 있습니다.
어느 날 밤 짙은 안개 속에서 한 여성이 운전을 하고 있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녀는 앞에 가는 차를 바짝 뒤따라가기로 했다. 몇 마일이나 같을까? 앞서가던 차가 갑자기 정지하는 바람에 그녀는 앞차의 꽁무니를 들이받고 말았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앞 차 운전자에게 화를 내면서 말했다. “아니 그렇게 갑자기 차를 멈추면 어떻해요?” 그 운전자가 대답했다. “이봐요, 여긴 내 차고네요.”
이 이야기가 남들이 가는 대로, 남들이 사는 대로,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사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우리는 웃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알면서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함께 읽은 로마서 13장 11절에서 14절의 말씀은 우리가 다 잘 아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설교하려는 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다 알 수 있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오히려 저의 설명이 뱀의 다리를 붙이는, 사족이 될 정도입니다.
초기 청교도 중 퀘이커 교(The Quaker)의 사람들은 당신 삶이 말하게 하라(Let Your Life Speak) 라는 말을 썼습니다. Vocation, 소명이라고도 하는, 현재, 이 낀 세월을 행복지수 number 10의 인생 자체로 살라는 의미입니다. 이 소명, 직업이라는 의미의 Vocation은 그 어원이 소리, Voice에서 나왔습니다. 즉 우리의 소명, 직업, 이 땅에서의 삶은 우리 내면에서 들리는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사람답게, 사람으로 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면서도 이 내 속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며 삽니다. 돈 때문에, 명예를 위해, 성공을 위해, 욕심을 위해, 즐거움을 위해. 내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기보다는 내 몸이 원하는 것을 위해, 아니 내 몸이 원하는 것이 워낙 소리가 커서 내 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헤드폰 Headphone을 끼고 오랫동안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면 우리의 청각이 망가지는 그래서 작은 소리는 듣지 못하게 되는 현상과 같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대강절의 첫 번째 불을 켰습니다. 이번 주부터 크리스마스 전날 Christmas Eve까지 계속될, 대림절의 작은 불을 켰습니다. 영어 Advent는 오심, Coming, 도착하심, Arrival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서 Adventure, 모험이란 단어가 나왔습니다. 우리 인생이 바로 이 Advent입니다, 또한 Adventure입니다. 2000년 전, 우리의 과거에 오신 예수를 믿는 믿음, 그리고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실 미래를 기대하며 살고 있는 우리는 작고 세미한 하나님 소리만을 듣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의 사이에 끼인 중간, 이 Advent, 현재의 인생을 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이 중간, 현재의 삶을 살아야하는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생의 끝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는 것 과 행동하는 것, 듣는 것과 들은 대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할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는 알기는 하고 듣기는 듣는데 파킹장을 (Parking Lot)빙빙 도는 시간을 낭비하는 인생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 듣고 잘못 알고 있으면 마지막에 남의 집 주차장에 가 있는 헛수고의 인생이 될 수도,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으로 결정 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스마일스는
“생각을 뿌리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뿌리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뿌리면 인격을 거두고 인격을 뿌리면 미래가 열린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에다 심는 사람은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에다 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예수회 사제이며 심리학자로 예일대학 교수로 일하던 헨리 나우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고 얻기 원하는 예일대학 교수직을 떠나 정신 박약 장애인 공동체인 방주라는 뜻의 라르쉬(L'Arche) 의 캐나다 공동체, 여명이라는 뜻의 데이 브레이크(Daybreak)에서 사역을 하다가 1996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가 생전에 남긴 글을 모아 “희망의 씨앗”이란 제목으로 출판된 이 책 속에 재림, Second Coming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십니다. 천지간에 울려퍼질 질문은 우리가 어제나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하는 그 질문이 될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을 보면 사람들은 결코 질문받지 않을 질문을 예상하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마치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려고 사는 것 같습니다. “사는 동안 얼마만큼 벌었습니까/” 친구를 몇 명이나 사귀었습니까?“ ”직장에서 어디까지 승진했습니까?“ ”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습니까?“ ” 책을 몇 권이나 썼습니까?“ ”몇 명이나 회심시켰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 이런 질문을 하신다면 아주 자신 있게 심판대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질문 중 어느 하나도 듣지 못 할 것입니다. 정작 그 때 직면할 문제는 우리가 답변할 준비를 거의 하지 않고 있는 질문입니다. ”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일이 무엇이냐?“ 이는 평화를 이루는 것과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은 결코 분리 할 수 없는 것임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공정한 재판관의 질문입니다. 어떤 방식이나 형태로 있든 우리보다 못한 사람이 있는 한, 그 질문은 마지막 심판 때 우리에게 던져 질 것입니다. 나그네가 있는 한,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사람이 있는 한 감옥에 갇힌 사람이나, 망명자나 노예가 있는 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혹은 정서적으로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 일자리가 없거나 집이 없거나 땅 한 평 없는 사람들이 있는 한, 심판의 보좌에서 결코 떠나지 않을 질문이 있습니다.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일이 무엇이냐? “What have you done for the least of mine?" 이 질문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재림은 언제나 존재하는 사건이 됩니다.
이 질문으로 인해 우리는, 전쟁과 전쟁에 관한 소문으로 고통받는 우리 세상을 보도록 도전을 받고, 평화와 정의는 분리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는 않았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음식이며 일자리며 땅이 충분히 있다면 왜 전쟁이 있겠습니까? 세상이 많이 가진 사람, 아주 넉넉하게 가진 사람, 충분히 가진 사람, 조금 모자라는 사람, 가장 적게 가진 사람으로 구분되는 일이 없다면 총이며 탱크, 핵미사일 탄두, 잠수함, 그밖에 가공할 파괴 무기들이 그처럼 많이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남아프리카와 중앙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족들 간의 고통스런 투쟁을 보며,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인지 분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남아메리카의 수많은 나라에서는 아주 많이 가진 사람은 극히 소수이고 너무 적게 가진 사람이 제일 많으며, 중간 부류는 거의 없습니다. 이같이 소수가 다수에게 압제와 착취를 가하는 악명 높은 불의는 국민 대다수가 아주 많이 가졌고, 너무 적게 가진 사람은 극소수인 나라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지극히 중요한 우리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것“ "Protecting our vital interests" 는 민족과 국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유지하는 기준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계속 증가되는 힘이야말로 이 세상이 붕괴해서 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책이라는 착각 위에, 국제적으로 군사적 다중 조직망을 구성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수많은 사람이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데도, 이런 죽음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자유세계의 우대한 정신적 가치 기준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한다고 확신하는 불합리한 세상이 됩니다.
예수님이 에언 하셨듯이, 많은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죽음의 파멸이 증가함에 따라 어떤 이유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설명 할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적어집니다. 이렇게 세상은 갈수록 불합리하게 되어-문자 그대로 하자면 전혀 듣지 않아(deep deafness)-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질문을 갈수록 못 듣게 됩니다. “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일이 무엇이냐?” “쪼묘 have you done for the least of mine?"
"America"라는 잡지에 실린 이 글은 1984년 4월 21일 “미국에서의 그리스도”“Christ of the America"로 발표 한 글입니다. 지금부터 20년 전에 쓰여진 글이라고 볼 수 없게 우리가 살고있고 경험하고 있는 오늘의 미국의 상황, 그리고 오늘의 세계 상황을 놀랍게도 정확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헨리 나우웬이 예언한 대로 우리 모두는 주님이 물으시는 한 가지 질문을 아직도 들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일이 무엇이냐?“
호사한 연회와 술 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가 예수님의 형제 중 가장 작은 자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닌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오늘 읽은 로마서 13장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오히려 바울 사도는 14절에서 이렇게 살라고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지금이 어느 때라고 자고 있습니까”?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번역한 성경 The message는 간단히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슴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그 들은 대로 살지 못하는 곤고한 사람들입니다. 누가 우리를 이 듣고도 행하지 못하는 고생가운데서 구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님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 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사야 11장 1절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In-between, 과거와 미래의 사이, 짧은 중간, 낀 삶을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놀라운 비밀이 이 짧은 구절 안에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세 단어입니다. 작게, 낮게, 느리게입니다.
어떻게 하면 들은 대로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본 대로 살 수 있습니까?
먼저 작은 싹으로 살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싹은 숲이 되기 위한 가장 작은 시작입니다. 이 세상을 덮고 있는 수많은 나무들의 시작은 하나의 작은 싹이 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싹을 나게 한 힘은 밑으로 낮게 깔린 뿌리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 뿌리를 내리는 것과 싹을 내고 열매를 맺는 것은 느리게 , 시간을 두고, 그리고 하나님이 정한 순서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변함없이 일정한 과정, Process를 거쳐서 이루어집니다.
크게, 높게, 그리고 빨리 빨리 살기 원하는 우리들의 삶 속으로 아무 힘도 없는 아기, 그것도 결혼식도 하지 않고 임신한 시골 처녀의 몸에서 구원의 싹이 났습니다. 시골 어촌, 갈릴리에 뿌리를 내리고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의 손에 33년을 자라나십니다. 그리고 그 짧은 33년을 오직 죄인들의 친구로만 살기로 결정하십니다. 가장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가장 비참한 십자가에서 인생을 마감하기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작게, 낮게, 느리게... 우리가 이 예수님의 비밀을 알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강한 세상을 이기는 가장 강한 이 비밀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지금부터 3000년 전에 예언한 모든 비밀이 우리 모두에게 사실로 나타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2000년전 바울의 편지를 받았던 로마 사람들보다 그 사실을 지금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와 여러분은 사도 요한이 써서 보낸, 오지 않은 미래에 오실 심판자 메시아의 기록인 요한 계시록의 모든 일들이 이루어 질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작게, 낮게, 느리게 사셨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해 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이 이해가 됩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 보다 더 가까워 졌습니다.”
크게, 높게, 빨리빨리 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작게 낮게 느리게 사신 에수님만이 우리의 희망이 됩니다. 크게, 높게, 빨리 빨리 하라고 부추기는 모든 정욕의, 육신의, 악의 세력과 당당히 맞서야합니다. 크게, 높게, 빨리빨리 살도록 우리를 부추기는 모든 일을 지금, 용감히 멈추어야합니다. 그리고 작게, 낮게 느리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우리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의 말씀처럼 우리를 장차 예수님의 우편에 앉게 하실,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과 열심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우리에게 남겨진 단 한 가지 질문,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일이 무엇이냐?” “What have you done for the least of mine?" 이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하는 인생이 되는 것밖에 우리에게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결정하십시오. 지금 결정하십시오. 크게되려다가 나중에 작게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작게 되기로 결심하고 살다가 나중에 주님 앞에서 큰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높게 되기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낮게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살 것입니까? 아니면 남이 나의 시중드는 것을 위해 애쓰며 사시겠습니까?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섬기는가 그것이 성공이 되지만 우리가 죽은 후에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겼는가가 성공이 되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또한 마귀는 바쁘고 분주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느리게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좀 늦더라도 기다리며 살 때 열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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