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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1. 조영진 목사
"늘 새롭게 하소서(4)-공동체성의 회복"
사도행전 2:43-47
예수는 함께, 더불어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교회가 공동체성을 잃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공동체성의 회복을 어떻게 이루어 갈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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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 5번가(Fifth Avenue)에 있는 성 바돌로매 교회에서 막 주일예배가 시작되려고 할 때였습니다. 맨 앞좌석에 큰 모자를 쓴 한 남자교인이 앉아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안내위원이 급히 가서 예배가 시작되니 모자를 벗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 교인은 자기는 모자를 벗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안내사역팀장이 가서 모자를 벗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분은 여전히 벗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마침 교구 여성회 회장이 왔기에 그분이 가서 권했는데도 그 교인은 여전히 거절했습니다. 예배 시작 시간이 2분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우리 교회로 말하면 합동임원회장 쯤 되는 분이 가서 그 남자 교인에게 가서 모자를 벗기려고 했지만 그 분이 모자를 꼭 붙잡고 있는 바람에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어서 성가대와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입례 찬송을 부르면서 들어오자 그 사람은 모자를 벗고 예배시간 내내 다시는 쓰지 않았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모자를 벗으라고 권했던 네 사람이 뒤에서 이 남자 교인을 기다렸다가 만났습니다. 임원회장 쯤 되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우리 성공회는 예배시간에 모자를 쓰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 교인이 대답했습니다: “저도 잘 압니다. 저는 평생토록 성공회 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교회에 나온지 2년이 넘었는데도 한사람도 저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제가 모자를 쓰는 덕분에 네 사람이나 저를 찾아주셨습니다. 안내위원, 안내사역팀장, 여성회 회장, 임원회장들이 찾아 오셨으니 감사합니다.” 오죽했으면 그분이 예배 시작 전에 모자를 썻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이런 이유 때문에 모자를 쓰시는 분이 아직 안계셔서 감사합니다만, 우리 교회도 2주, 3주 아니 두달, 석달 나와도 어느 한사람 먼저 인사하고 말을 건네는 분이 없는 그런 경험을 하시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래도 됩니까?
지난 10월31일 종교개혁기념 주일부터 “늘 새롭게 하소서” 라는 주제 밑에 시작한 연속 설교의 네 번째 주일입니다. 그동안 저는 교회 갱신의 근원이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말씀드리고, 개신교 안에 있는 분열과 다양한 교파를 넘어서서 하나되기 위한 길을 살펴 보았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교회가 지닌 사명,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책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교회가 지닌 공동체성을 이 시대 속에서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I.
오늘 이 시대의 교회들이 갖는 고민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하면 교회가 갖는 진정한 공동체성을 되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단순하게 그냥 모인 집합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서로 간의 교제와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향해 자라가는 공동체입니다. 모래 처럼 그냥 모인 곳이 아니라 찰밥처럼 서로 모여서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봉독한 사도행전 27:43 이하의 말씀은 교회가 어떤 곳인가를 보여줍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시작된 처음 교회는 사도들의 능력있는 설교와 사역을 통하여 큰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분이 바로 우리의 메시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 되심을 증거했을 때, 3000여명이 믿고 세례를 받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은 소유의 벽을 넘어섰습니다.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내려놓고,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모였고, 또 집집으로 모였습니다. 모여서 빵을 떼고, 음식을 함께 나누며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 사도행전의 기록은 처음 교회가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전해줍니다. 또 오늘날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교회는 진정한 공동체였습니다. 성령 안에서 가진 소유를 함께 나누는 진실한 공동체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이같은 공동체의 모습은 머지않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처음 교회가 새로운 생산의 수단이 없이 바친 것들을 그냥 나누기만 했기 때문에 얼마가지 못해서 그 재산이나 나눌 수 있는 물품이 동이 났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어쨋든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함께 모이고, 또 흩어져서 모이면서 인간이 갖고있는 가장 집요한 욕망, 소유에 대한 집착을 넘어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나눔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들이 이 공동체성을 잃어가는 이면에는 두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교회가 점차 커져가면서 한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도 보면, 서로 만나서 와싱톤한인교회를 나간다고 하면 이어서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몇부 예배에 나가십니까?” 한교회를 섬기지만, 서로 모르는 얼굴들이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은 교회가 자라가면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일들입니다.
또 다른 원인은 이 시대를 휩쓰는 개인주의의 물결입니다. 한 생명, 한 생명의 존엄함을 강조하는 것은 백번 타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개인주의는 이런 차원을 넘어서서 자신을 점차 자아의 감옥 안에 가두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웃과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점차 약해지면서, 자기 자신, 자신의 가족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시대에 느끼는 외로움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자신을 털어놓고, 가슴을 열고, 사귈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데서 오는 고독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개인주의의 영향은 깊이 파고 들고 있습니다. 본래 예수는 함께, 더불어 믿는 것인데, 신앙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묶어두는 모습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큰 교회를 택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많은 교인들 속에 묻혀서 bother당하지 않는 것, 무명의 존재로 머무는 것이 좋기에 나온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물론 안나오는 분들보다는 낫겠지만, 진정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성경적인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깊이 살펴 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진정한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모래알 처럼 그냥 모인 교회가 아니라, 찰밥처럼 어우러져서 함께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습니까?
II.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멧세지를 전해 줍니다. 처음 교회 성도들은 성전에 모였습니다. 성전은 넓은 공간이 있었으므로 아마도 많은 사람이 함께 모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함께 모일 뿐 아니라,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모였습니다. Small Group, 소수의 인원이 집에서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빵을 떼면서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이것을 우리 감리교회에서는 속회라고 부르고, 다른 교단들은 구역, 다락방, 셀, 혹은 목장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속회는 감리교회 운동을 시작한 John Wesley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사실은 이미 사도행전에 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적은 인원이 모여서 진정한 나눔, 진정한 교제의 삶을 함께 살아갔습니다. 속회 혹은 Cell Church는 결코 하나의 유행이 아닙니다. 진정한 교회의 모습, 공동체성의 회복을 이룩해 가는 길입니다.
(1) 속회를 통해서 우리는 교회의 성장을 계속해 가면서도 공동체성을 회복해 갈 수 있습니다. 이 원리를 Florida에 있는 Christ UMC를 섬기셨던 Dick Wills 목사님은 “Growing Larger by Growing Smaller(더 작아짐으로 더욱 커져가는 길)”로 표현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자라면서 같은 교회를 섬기면서도 서로 얼굴을 모르는 현상들이 생겨납니다. 공동체성이 흔들리는 어려움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성장을 의도적으로 멈출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어떤 교회는 한해의 목표를 100명 넘지 않기로 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구룹사역은 공동체성의 회복을 가져오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모든 교인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속회와 같은 소구룹을 통하여 깊이 있는 사귐, 깊이 있는 만남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함께 예수를 믿는 맛을, 보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 또한 속회와 같은 소구룹은 진정한 만남을 경험하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만남은 피상적일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말로는 잘 구분이 안되지만, 영어로 meeting과 encounter는 구분됩니다. meeting은 그냥 만나는 것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만남입니다. 그러나 encounter는 진실된 만남, 깊이있는 만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이에 모시고 만나는 만남입니다. meeting, 피상적인 만남에서 나누는 대화는 역시 피상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어내지 않습니다. 그저 좋은 것이 좋을 따름입니다. 취미생활 이나 시사문제들을 가지고 나누는 것 정도에 머무를 따름입니다. 그러나 encounter, 진실한 만남은 다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어내면서 만나는 것입니다. 나의 강점, 자랑스러운 모습 뿐 아니라, 나의 부족함, 약점까지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같은 만남 속에서는 변화(Transformation)가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들어내고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이해의 폭이 넓어지며,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이런 만남이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계급장 많이 달고, 자신을 가리우는 옷을 겹겹이 껴입고 만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를 용납하는 자유함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수식과 체면치레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왜 교회가 필요합니까?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3) 진실된 공동체는 만남에서 나눔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진실한 사랑을 practice,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 만남을 통해서 뭐하자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서로의 것을 함께 나누면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입술만의 사랑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향한 복음증거의 사명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또 하나의 목적은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삶을 맛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험한 세상 헤쳐가는 인생들이 사로 돕고, 서로 격려하면서 살라고 교회를 세워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실한 사랑을 나누며 살라고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부터 맛보고 실천하며 살라고 교회를 주셨습니다.
오늘 제가 주보에 쓴 글에서도 밝혔습니다만, 지난 화요일 구역회 시간에 간증을 해 주신 이두성 집사님, 오충근 집사님, 최상옥 집사님의 말씀은 참으로 우리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특별히 최상옥 집사님께서는 지난 9월6일 노동절 아침에 테니스를 치다가 쓰러지셔서 돌아가신 이종우 집사님의 소천이후, 어려운 상황 속에서 속원들이 베풀어준 사랑과 격려를 차분하게 전해 주셨습니다. 저 자신도 장례를 준비하고 집례하면서, 속원들이 나눈 아름다운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았었습니다. 그 소회의 이름이 “크레센도”인데, 이 “크레센도”라는 말은 “점점 크게”라는 뜻을 가진 음악용어입니다. 정말 크레센도 속원들의 사랑과 나눔은 고난 속에서 점점 커졌습니다. 왜 속회가 필요한지 진정한 속회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최 집사님과 함께 있으면서, 음식도 준비해 주고, 자녀들에게 대해 관심을 쏟으며, 장례식을 준비해 가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는 크레센도 속회는 주님께서 왜 교회를 세우셨는지, 또 진정한 공동체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공동체성의 회복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만남에서 나눔으로, 진실된 사랑의 나눔을 되찾음으로 참 교회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III.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금년 한해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리는 주일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일 매일이 감사의 날입니다. 그렇지만 이 절기를 맞아한해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음은 참으로 뜻깊은 일입니다.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 우리 가정에 내려주신 복, 우리 모두 세어보며 감사하십니다.
그러나 금번 감사절에 저는 와싱톤한인교회라는 이 믿음의 공동체에 대한 감사도 되새겼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험한 인생 길에서 함께 손잡고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게 된 믿음의 친구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아무개 교우를 만나게 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아무개 속원을 통하여 믿음 생활에 도전과 진보를 주시는 것 감사합니다.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는 위로와 사랑보다는 아픔과 상처만 받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계십니까?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서 죄송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그 아픔이 있었기에 사람 보지않고 예수님 바라보며 믿음생활 하게 된 것 감사합니다. 또 내게 상처주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감사드립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모신 공동체입니다. 오늘 이 시대 속에서 요청되는 교회의 갱신은 바로 공동체성의 회복입니다. 진정한 만남, 진정한 나눔의 회복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회복입니다. 지난 5월 호 좋은 생각 이란 잡지에 차은정님이 기고하신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 설교를 줄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극장을 운영하시던 아버지 사업이 잘못되어 우리 집은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생선장사를 시작하셨고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비린내를 풍기며 들어오셨습니다. 난생처음 해보는 장사에 무척 힘들어하셨기에 청소, 빨래 등 집안 일은 언니와 내가 도맡았습니다. 그 시절 내 도시락 반찬은 언제나 푹 시어 버린 무김치였습니다. 지금 같은 배짱이라면 당당하게 친구들 앞에 꺼내 놓고 먹겠지만, 그때는 어찌나 창피하던지 하루 중 점심시간이 제일 싫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점심시간, 어제와 똑같이 무김치가 전부이겠지만 그날 따라 마음이 더 무거웠습니다. 머뭇거리던 나는 잠깐 물 좀 먹고 오겠다며 교실 뒤편으로 가 넘어가지 않는 물을 억지로 한 컵 들이켰습니다. 자리로 돌아오자 그때까지 기다리던 친구들이 어서 밥 먹자며 재촉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뚜껑을 열었는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팍 시어 버린 무김치가 온데간데없고 달걀말이에 햄 같은 먹음직한 반찬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어리둥절하여 친구들을 바라보니 모두들 시치미를 뚝 떼고 내 무김치를 맛있다는 듯 베어먹고 있었습니다. 순간 나는 다시 고개를 떨구고 말았습니다. 눈물이 핑 돌고 목이 메어 왔습니다. 그날 점심은 어떻게 먹었는지...
그날 이후 나는 도시락을 더 이상 창피해 하지 않고 떳떳하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내 사정을 알아주고 창피한 마음을 모른 척해 주었던 고마운 친구들. 6학년 때 전학을 가는 바람에 얼굴과 이름은 다 기억나지 않지만, 모두에게 고맙습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다들 그때 그 따스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사랑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이 아름다운 사랑, 이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가슴을 열고 참으로 만나고 있습니까? 참으로 진실한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까? 주님께 감사드릴 수 밖에 없는 진정한 교회,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해 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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