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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4. 조영진 목사

"늘 새롭게 하소서(3)-세상 속의 교회"

마태복음 5:13-16

교회는 세상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오늘 우리는 끼리끼리 모여 편안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연 세상을 위한 교회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지난 10월 마지막 주일부터 저는 “늘 새롭게 하소서”라는 제목 밑에서 연속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개신교의 근본 정신 가운데 하나는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Martin Luther나 John Calvin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이 개혁 운동은 지금도 계속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우리들도 갱신되어야 합니다. 갱신이 요청되는 과제들로 저는 먼저 진정한 개혁은 먼저 교회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의 뜻, 그리스도의 비전을 분별함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말씀 드렸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개신교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분열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하나됨을 향해 요청되는 우리의 생각, 마음가짐의 변화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어떻게 하면 세상 속에서 신실한 교회, 책임 있는 교회로 자라갈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명한 기독교 윤리학자였던 H. Richard Niebuhr 교수가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라는 훌륭한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Niebuhr 교수는 그리스도와 문화와의 관계를 다섯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 문화가 서로 대립적인 관계 속에 있는 Christ against Culture,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고, 둘째는 그리스도와 문화가 하나라는 일치의 관계로 보는 Christ of Culture, 문화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와 문화사이에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Christ above Culture, 문화 위에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고, 넷째는 그리스도와 문화를 이중적인 관계 속에서 보면서 그리스도와 문화 모두의 권위와 차이를 받아들이는 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역설적인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문화의 유형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그리스도를 문화의 변혁자로 보는 Christ, Transformer of Culture 타입이 있습니다.

상당히 복합적인 이야기입니다만, 그리스도와 문화와의 관계를 우리는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입시켜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을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서 볼 수도 있고, 세상 속에 묻혀버리는 세상의 교회 타입도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질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볼 수도 있는가 하면, 교회와 세상이 각각 다른 영역 속에 있음을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또 교회를, 세상을 변혁시키는 사명 속에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하여 다양한 논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주장들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회와 세상은 어떤 관계 속에 있습니까? 아니 교회와 세상은 어떤 관계 속에 있어야 합니까?

I.

오늘 우리는 산상수훈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즉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하여 중요한 메시지를 듣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습니다. 소금은 소금끼리 있으면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소금은 부패하는 곳에 들어가야 제 기능을 발휘합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밝은 가운데서 빛은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둠에 휩싸이면 빛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납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냅니다. 우리로 하여금 볼 것을 보게 합니다. 소금과 빛은 바로 부패해 가는 세상, 어둠이 가득한 세상 속에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떠난 교회는 물고기가 물을 떠난 것과도 같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죄악된 세상이라고 정죄하고 돌아서서는 안됩니다. 그런 세상, 부패하고 어두운 세상이기에 그만큼 교회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뿌리를 든든히 내리고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변혁시키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소금이 부패함을 방지하듯이 교회는 세상의 부패를 가로막아야 합니다.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듯이 세상의 어두움, 세상의 죄악을 보게 하고 가야할 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린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밖에 버려져서 밟힐 것이라고. 요즈음 한국의 교회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부패를 막아야 할 소금의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스스로를 정화시킬 수 있는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합니다. 교회가 소금의 맛을 잃어가니까 결국 짓밟힘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매스컴에서 얻어 맞는 비난의 대상에 오르내리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일전에 한국의 KBS에서 한국교회를 주제로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이 프로그램의 방영계획이 알려지자, 상당수 교인들이 KBS 앞에 가서 반대 데모를 했습니다. 저는 참 안타까웠습니다. 비판받을 일이 있으면 비판받고 깨어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사실이 아닌 것을 가지고 꾸며서 말한다면 문제입니다만, 있는 모습을 가지고 말한다면 듣고 각성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방송이 그렇게 두려우면 비판받을 일 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혹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데모를 했기 때문에 비판의 수위가 좀 낮아진 것 같다고 말합니다만, 그것 좋아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소금의 맛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짓밟히고 있지 않은지 돌이켜 보아야합니다. 세상을 염려하고 고쳐야 할 교회가 세상의 염려의 대상이 된다면 이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정말 우리 모두 정신 차려야 할 일입니다. 이것은 정말 우리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II.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 받은 오늘 우리들, 주님의 교회가 어떻게 하면 소금과 빛의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혁을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1)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이 세상은 죄악된 것, 세속적이고 악한 것이므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무책임한 생각의 틀을 넘어서야 합니다.

물론 이 세상은 하나님 앞에 죄악된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일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 세상에 동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을 포기하고 이 세상에 무관심 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다고.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는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구속하시려는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가슴으로 이 세상을 염려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주님을 배반하고 방황하는 이 세상이지만, 이 세상의 주인은 바로 우리 주님이시며,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만큼 이 세상을, 인생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을, 인생들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도피할 수 없습니다. 망할 세상이라고 정죄하고 관심을 깨버릴 수 없습니다. 비록 어둡고 방황해도 이 세상을 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가슴, 주님의 심장으로 부둥켜안아야 합니다. 못된 세상이라고 욕만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이 세상을 바로 세워 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관심은 입술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하여, 생명과 역사를 살리는 일을 위하여 존재한다면, 이 고백은 교회의 재정에서도 고백되어야 합니다. 진정 이 땅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교회의 예산은 과감히 쓰여져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비난을 받는 중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그 귀한 헌금들이 교회 안에서 대부분 쓰여지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물론 교회가 약할 때는 지체의 존립을 위하여 많은 부분이 쓰여집니다. 그러나 교회가 좀 자랐다면 세상을 위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이 땅의 아픔을 싸매어 주고, 절망 속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일에 과감히 쓰여져야 합니다. 멀리만 가지 말고 가까이서, 우리의 이웃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는데 투자해야 합니다. 현재 저희 교회는 전체 예산의 25%가 좀 넘는 부분이 이를 위해 쓰여지고 있는데, 좀 더 늘려가야 합니다. 워싱턴 일원에도 많은 교회들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워싱턴 한인 봉사 센터나 가정 상담소 같은 기관들을 돕는 일에 너무 미약한 것을 발견할 때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우리가 직접 못한다면 그런 기관이라도 도와야 할 것 아닙니까?

(2) 이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바로 세워 가는 가장 중요한 길, 그것은 복음을 함께 나누는데 있습니다. 복음으로 인생과 세상을 변혁시켜 가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나타내는 성경의 이미지 가운데 노아의 방주를 종종 생각하게 됩니다. 노아의 방주 안에 들어갔던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노아의 방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 울타리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주의 이미지가 갖는 치명적인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책임입니다. 세상을 복음으로 고쳐 가는 사명입니다. 방주 밖으로 나아가서 생명과 세상을 건져내야 하는 우리의 사명을 이 방주이미지는 분명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인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 세상, 교회 밖을 향한 사명을 안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복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변혁시켜가야 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교회 주차장이 복잡해도 복음 전하는 일 해야합니다. 더 이상 수용할 공간이 없다고 해도 복음 전하는 일을 중단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교회는 전교인이 열심히 전도하지 않아도 꾸준히, 조금씩 교회가 자라다가 보니까 전도의 중요성을 점차 잊어 가는 것 같습니다. 복음으로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변혁시켜 가는 사명에 점차 둔감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신문에 실린 김진홍 목사님의 설교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인용하시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날마다 일어나는 세가지 기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를 믿는다면서 성경 말씀을 거들떠보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기적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도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기적은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갑지 않은 기적들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해야 될 첫 번째 과제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생명이 거듭나게 하는 일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을 참으로 염려한다면, 사랑한다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 속에 진정한 교회가 어떤 곳인지 보여주어야 합니다. Cincinnati에 있는 빈야드 교회는 “2/20운동”이라는 뜻깊은 전도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2/20”운동이란 전도를 위하여 한달에 두시간, 그리고 20불을 사용하는 운동입니다.

이 운동에 동참하는 이 교회 교인들은 팀을 이루어 지역의 상가나 공원의 공중화장실을 찾아가 2시간 동안 화장실 청소를 하거나 여러 사람이 한 팀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차를 무료로 세차해주고 음료수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꽃을 사서 무료한 오후에 사무실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어떤 교인들은 도서관 카운터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책 연체 벌금을 대신 내주기도 합니다. 선물 가게 앞에 서 있다가 무료로 선물을 포장해주기도 하고, 옆구리에 두툼한 종이 타월을 끼고 둘씩 짝을 지어 나가 쇼핑센터 등에 세워져 있는 차들의 더러운 유리를 깨끗이 닦아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20불을 전부 동전으로 바꾸어 공중전화 박스 옆에 서 있다가 동전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어떤 교인들은 Parking Meter가 끝나 가면 동전을 넣어 주기도 합니다. 이들은 선을 행한 후에 가지고 다니는 교회 카드를 직접 전해 주거나 닦아준 차 앞 유리에 꽂아 놓는 방법으로 복음을 증언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든, 저런 모습으로든 우리는 세상을 위하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3) 또한 이 증인의 삶은 이 세상의 불의한 구조나 체제를 바로 잡아가는 일에도 이어져야 합니다.

유명한 신학자였던 Karl Barth는 설교자들에게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설교자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현실, 이 세상의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늘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위에도, 이 세상에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교회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합니다.

사회의 변혁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이 늘 주장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고 보살피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이상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강도를 제거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거기 강도가 있는 한 계속 빼앗기고 다치는 사람이 생겨날 것이기에 강도가 나타나지 않게 해야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라의 정책이, 체제가 바로 시행되게 하는 일 역시 우리가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합니다. 이일에 우리 모두 기도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이일 역시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새롭게 변혁시켜 가는 일에 동참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III.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 속에 묻히거나 동화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이 세상을 변혁시켜 가야합니다. 망할 세상, 죄악된 세상이라고 포기하고 돌아서는 것은 교회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이 세상을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우리는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내 개인뿐 아니라 이 세상, 이 역사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으로 변혁시켜 가는 일에 우리 모두 참여해야 합니다.

여러분, 시작은 미미해도 괜찮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나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나부터 복음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나부터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역사의 변혁은 거창하게 시작된 적이 별로 없습니다. 미미해 보여도, 시원치 않아 보여도 주님의 뜻을 붙들고 세상을 염려해 일어선 그리스도의 사람들에 의하여 언제나 새날은 동터 왔습니다.

바야싯은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혁명가였고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기도는 이것이 모두였다: “주여, 내게 세상을 개혁할 힘을 주소서”

중년에 이르러 한 사람의 영혼도 고쳐 놓지 못한 채 내 반생이 흘렀음을 깨닫자, 내 기도는 이렇게 달라졌다: “주여, 나와 접촉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킬 은총을 주소서. 그저 가족과 친지들만 개종시켜도 만족하겠나이다”

이제 노인이 되어 죽을 날도 오늘 내일 하게 되고 보니 이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알게 되었다 이제 나의 유일한 기도는 이것이다: “주여, 나 자신을 고칠 은총을 주소서.” 처음부터 이렇게 기도했던들 일생을 허비하지 않았을 것을.

테레사 수녀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난 결코 많은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사람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번에 한사람씩.

프랑스의 한 시인은 자기 집 마당을 쓸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우리 집 마당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이 지구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교회들이, 우리들이 이 지구의 한 모퉁이를 쓸 수 있다면, 이 지구는, 이 세상은 그만큼 깨끗해 질 수 있습니다. 나부터, 나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한다면, 이 세상은 훨씬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끼리 안락하게 앉아있을 때가 아닙니다. 눈을 들어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썩은 세상 건져내고, 어두운 세상 밝혀내야 합니다. 보다 책임 있게, 보다 신실한 그리스도의 교회로 이 시대를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