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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7. 조영진 목사

"늘 새롭게 하소서(2)-같은 마음, 같은 생각으로"

고린도전서 1:10-17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분열의 아픔과 상처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회복하는 길은 없습니까?
본래적인 교회의 하나됨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번은 노인회에서 경로관광을 가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그만 앞에 앉으신 할머니 두분이 싸우시게 되었습니다. 큰 소리가 오고 가고 분위기가 험악해져 가자, 뒤에 앉으셨던 한 할아버지가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여봐요, 할머니들 좀 조용히 하자구. 여기가 예배당인 줄 알고 싸우는거요.”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오늘의 한인교회들이 어떤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는지 돌이켜 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일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맞아 저는 “늘 새롭게 하소서”라는 큰 제목 밑에서 연속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종교개혁의 근본 정신 가운데 하나는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Martin Luther나 John Calvin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갱신은 지금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뜻에 합당한 교회로 변화되어 가는 이 갱신은 지금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교회 갱신의 과제의 하나인 분열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I.

이 아침 우리는 고린도전서 1:10 이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써보낸 이 편지 속에서 우리는 당시 고린도 교회가 직면했던 여러 문제들을 발견합니다. 가나안 복민운동을 펼치셨던 김용기 장로님께서는 고린도 교회를 가리켜 불은 붙었는데 연기가 많이 나는 교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동서남북 무역의 중심지였던 고린도에 세워진 이 교회는 12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는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불이 붙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문제도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교회 안에는 내적인 분열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 안에는 여러 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또 그리스도파도 있었습니다. 또 6장에 가서 보면 교인간의 분쟁으로 법정에 고소까지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음행의 문제, 새로 세워진 교회인데서 오는 교인들의 신앙훈련 부족, 성령의 은사가 교회 안에서 덕스럽게 쓰여지지 않는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슈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교인들간의 갈등, 나아가서 교회의 분열은 특별히 개신교 신앙의 교회들에게서 빈번하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The Sprit of Protestantism(개신교의 정신) 이란 책을 쓴 Robert McAfee Brown 교수는 이 문제를 개신교의 Achilles' Heel(아킬레스 건)이라고 불렀습니다. 개신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동안 천주교회가 간직해온 교회의 권위를 성경으로 대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Only Scripture(오직 성서로만)”은 종교개혁 운동의 표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과 삶, 교회의 최고의 권위를 성경으로 대치하면서 생겨난 문제는 바로 성경의 해석과 강조점의 다양함에서 생겨나는 교파의 문제를 수습할 교회의 권위가 무너져 내린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교회의 하나됨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주장이나 운동을 천주교는 파문함으로 교회의 하나됨을 지켜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성서해석의 다양함과 강조점이 다른데서 생겨나는 여러 교단들을 하나로 묶어 Unity를 지켜내는 교회의 권위가 이미 무너졌기 때문에 다양한 교파가 생겨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천주교회는 한인교회로 메릴랜드에 하나, 버지니아에 하나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아마도 워싱톤 일원에 300 교회가 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느 길을 따라서 한인교회들이 가까운 거리에 계속 세워져도 그것을 통제 할 수 있는 곳도, 길도 없습니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한 건물 안에서 1층에는 장로교회 3층에는 순복음교회가 세워져도 너무하다는 이야기는 할 수 있지만, 안된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위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 성서 위에 세워진 교회들인데 누가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된다고 결정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개신 교회가 지닌 이 문제를 정직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다양한 교회들을 통해서 다양하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쪽이불을 보면 다양한 조각들이 모아져서 하나의 이불을 이루듯 다양한 교회들이 아름다움을 이룰 수있다고 말합니다. 다양한 교파, 다양한 교회들을 그렇게 긍정적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조화를 이루면 괜찮은데, 문제는 싸우고 깨어지고, 상처받고 불화하는 데 있습니다. 자기들만이 옳다는 독선적인 태도를 갖는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또 교회들 간에 화합하고 하나되는 일은 개신교회들이 실현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의 하나입니다. 개교회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일은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숙제입니다.

II.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분열의 아픔을 넘어서서 하나됨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교회의 하나됨을 향하여 한걸음 내딛을 수 있습니까? 저는 이 거창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비법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교회 역사에서 계속해서 문제가 되어온 이 과제가 하루 아침에 해결되리라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 시대에 문제가 해결 될 것이다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교회의 하나됨, 교회의 화목과 하나됨을 위해서 내딛을 수 있는 조그마한 걸음, 조그마한 생각의 변화를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 싶습니다.

(1)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하나됨의 의미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교회들이 하나된다는 것은 모든 교회들이 합쳐서 하나의 교단을 이루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이같은 기대는 아직까지는 비현실적인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된 다는 것은 Uniformity, 획일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하나됨은 Unity, 특별히 Unity in Diversity(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뜻합니다. 우리가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가슴 뜨거운 신앙을 지닌 사람은 그런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이지적이고 조용한 믿음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그렇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성격이 다양하듯 믿음의 표현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조그만 머리 안에 갇히시는 그런 작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 광대한 우주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 처럼 우리의 교회들도 다양함 속에서 하나됨을 갖는 것이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하나됨입니다.

(2) 그러므로 이 다양함 속에서의 하나됨을 추구해 갈 때 꼭 요청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양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폭입니다.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독선이나 흑백논리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파벌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 편이다’ 하고, 어떤 사람은 ‘나는 아볼로 편이다’ 합니다.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한 일꾼들이며, 주님께서 각각 맡겨주신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3:4-6).” 여러분,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각각 다양한 사역을 했을 뿐이라는 말씀 아닙니까? 어느 누구도 절대화 될 수 없다는 말씀 아닙니까?

특별히 우리 한인교회가 많은 분열의 아픔을 겪는 이면에는 흑백논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은 아닙니다. 물론 다른 것이 틀릴 수도 있지만, 언제나 그렇게 단정하는 태도는 주님 앞에서 합당치 못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언제나 100% 옳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서로 부족한 사람들 아닙니까? 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독선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Killen, Texas에 있는 성누가 교회에서 보내온 Newsletter에 이런 글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내가하면 잘하고
남이하면 불안하고

내가하면 창조적인 권고이고
남이하면 거짓말이고

내가 침묵하면 생각이 깊은거고
남이 침묵하면 생각이 없는거고

내가 늦으면 사정 때문이고
남이 늦으면 시간 관념이 없는거고

내가 실수하면 성공의 어머니고
남이 실수하면 능력이 없는거고

내가 봉사 할 때는 겸손한거고
남이 봉사 할 때는 당연한거고

내가 화를 내면 소신이 뚜렷한거고
남이 화를 내면 원래 그릇이 적은 때문이고

내가 아프면 일을 많이해서 쉬어야 하고
남이 아프면 너무 편안해서 체력이 없는거고

내가 약속을 어기면 사람이 그럴수도 있는거고
남이 약속을 어기면 사람이 그럴수는 없는거고

내가 기도하면 은혜가 충만하여 하는거고
남이 기도하면 일이 안되서 하는거고

내가 자리를 비우면 바쁜만큼 유능한거고
남이 자리를 비우면 근무태만이고

내가 모은 재물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남이 모은 재물은 일만악의 뿌리이고

내가 예배에 빠지면 형편상이고
남이 예배에 빠지면 믿음이 없는거고...

신앙생활에서 확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확신은 언제나 열려있는 확신이어야 합니다. 닫혀있는 확신은 독선에 빠지기 쉽고, 고인물 처럼 썩기 쉽습니다. 이조 초기의 명재상이었던 황희 정승에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종들이 서로 싸우다가 황희 정승에게 왔습니다. 한 종이 상대방을 한참 헐뜯으니까 황희 정승은 듣고나서 “자네 말이 옳구나”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종이 “정승님, 그게 아닙니다” 하고 자기 편의 이야기를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황희 정승이 듣고는 “자네 말도 옳구나” 했습니다. 이를 들은 정승의 부인이 “아니 여보, 두사람 이야기를 들었으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분간해 주어야지 둘 다 옳다면 어떻게 됩니까?” 했더니 정승이 말했습니다. “당신 말도 옳구려” 여러분, 줏대없는 사람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다양함을 끌어안는 넓은 폭을 말해주는 이야기입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100% 옳은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부족한 인생들이 모인 교회이기에 우리의 생각이 모자라고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비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만이, 우리 교단만이 옳다는 독선적인 생각은 넘어서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한 교회 혹은 한 교단의 전유물이 되실 수 있습니까? 역사를 보면 우리는 교회가 저질렀던 과오들을 보게될 때가 있습니다. 자신들만이 그리스도를 독점한 것 처럼 말하고 행동한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잊지않는 겸손함은 똑같은 실수의 반복을 막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무렇게나 해도 교회라는 이름만 있으면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는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의 핵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핵심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는 다양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 만이 옳다는 독선, 나와 같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라는 흑백의 논리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폭넓은 가슴 안에서 이해되어지고,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3)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열의 극복을 위하여 한가지 우리 모두가 조심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결정에 이르는 과정, 그 자체도 정당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한인교회 분열의 경우를 보면, 근본적인 신앙이나 믿는 내용의 다름에서 갈라지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과정상의 문제들, 지엽적인 문제들 때문에 상처를 받고 아픔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료 목사님들에게 말할 때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좀 더디더라도 교회법이나 규칙에 정해진 과정을 충실히 따르도록 하라고. 결정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결정하는 과정도 바로 해야된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저도 간혹 과오를 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많은 교회가 이 문제 때문에 아픔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과정이 적절하지 못하니까 회의석상에서 “법이요”가 난무하고, 회의 하다가 상처받고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들을 봅니다.

영락교회를 섬기셨던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당회에서 안건이 논의될 때 투표를 하면 충분히 다수의 표로 결정할 수가 있을 때도, 좀 미루면서 더 많은 합의의 도출을 기다리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결국은 목사님의 제안대로 채택이 되지만, 충분한 논의의 과정을 통해서 다함께 동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한번 존경의 마음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다.

(4) 한가지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의 반복일 지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교회들 역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며 우리의 형제와 자매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한국 교회가 극복해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는 개교회주의라고 말합니다. 다른 교회야 어찌되든 내 교회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개교회주의야 말로 우리 모두가 극복해야 될 숙제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작은 교회라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입니다. 내 교회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우리 함께 잘 되야 한다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다른 교회가 잘 되도록 돕고 지원하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저희 교회가 속한 연합감리교회의 모습 가운데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각 교회들이 연회본부에 내는 선교분담금 가운데 Equitable Salary Fund 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기금은 우리 연회에 속한 교회들 가운데 목회자들에 대한 사례를 충분히 지원하지 못하는 약한 교회들을 돕는 기금입니다. 연합감리교회 목회자들에게는 연회별로 Minimum Salary, 최저 사례액이 결정되어 있는데 이 미니멈을 감당하지 못하는 교회들은 이 기금에서 그 부족분을 채워서 목회자들을 지원합니다. 개교회주의가 아니라 교회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Connectionalism, 연대주의의 좋은 예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의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서울 강남에 있는 모교회가 10억원을 들여서 파이프 올겐을 설치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목사님께서는 가만히 계실 수가 없어서 그 교회 장로님을 만나셨다고 합니다. 수많은 개척교회 목회자들이 고생하고, 또 한국 땅에도 배고픈 사람들이 많은데 10억원 짜리 올겐은 너무합니다. 2억이나 3억 정도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말씀드렸더니 장로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목사님, 왜 남의 교회 일에 참견하십니까?” 그때 목사님께서는 “아니 장로님, 나이롱 뽕하셔서 장로 따셨는가 봅니다. 남의 교회가 무슨 남의 교회입니까? 예수님의 교회 아닙니까?” 하시면서 만일 그 교회가 10억원짜리 파이프 올겐을 설치하면 교인들하고 같이 가서 도끼로 찍어버리겠다고 경고하셨다고 합니다. 그 교회 올겐이 도끼로 부서졌다는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금액을 낮추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남의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함께 자라가고, 함께 아파하는 이 마음이 필요합니다. 저는 지난 번 새빛교회를 세울 때도 그랬습니다만, 우리 교회가 이만큼 자랐으니까 이제는 교우들 가운데서 주님의 몸되신 다른 교회들을 세우고 돕기 위해 가겠다는 분 계시면 물론 섭섭하기도 하겠지만, 기쁜 마음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저희 교회가 많은 주님의 교회들을 세워가는데 쓰임 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III.

교회는 하나되어야 합니다. 교회끼리 싸우고 헐뜻는 모습은 정말로 주님께 죄송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됨은 획일성, Uniformity가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의 하나됨, Unity in Diversity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흑백논리나 나만 옳다는 독선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다른 교회도 주님의 교회임을 깨닫고, 돕고 사랑하는 이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지난 1996년 연합감리교회 총회의 표어가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잘알려져 온 이 표어는 “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and in All Things, Charity(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사랑을”)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에는 다양함이 인정되는 자유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신 후 드린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기도 속에서 이렇게 간구하셨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여러분,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들이 하나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하나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생각을 열고 함께 손잡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서로를 귀히 여기고,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