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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9.26. 조영진 목사

"믿음은 삶입니다(15)-예, 아니오"

야고보서 5:12

왜 성경은 맹세하지 말라고 명합니까?
맹세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 아니오가 왜 중요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위해서는 예, 아니오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렸을 때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엄마가 보니까 아이가 무얼 열심히 외우고 있습니다. “무얼 그렇게 열심히 외우느냐?”고 엄마가 물으니까 아이가 대답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말을 외우고 있어요.” “그게 뭔데?” 엄마가 묻자 아이가 조심하면서 외웁니다. “뜰에 콩깍지 깐 콩깍지인가? 안 깐 콩깍지인가?” 여러분, 발음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이지요? 열심히 외우는 아이에게 엄마가 말합니다. “그게 제일 어려운 말이 아니란다.” “그럼, 뭔데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말은 ‘예, 아니오’ 바로 이 말이란다.” 아이에게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생각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말 그리고 제일 중요한 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 아니오”입니다.

I.

“믿음은 삶입니다.”라는 제목 밑에서 시작된 야고보서 연속 설교의 열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8월 한달 쉬기도 했던 이 연속 설교는 앞으로 두 번 더 드릴 예정입니다. 우리 교회 설립 53주년 되는 주일에 열일곱번째 설교를 드림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린 것처럼 야고보서는 언어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입술이, 혀가 다스려지고 진실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오늘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이나 땅이나 그 밖의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니다. 다만 ‘예’ 해야할 경우에는 오직 ‘예’라고만 하고, ‘아니오’해야할 경우에는 오직 ‘아니오’라고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여러분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이 말한 것 혹은 약속한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맹세를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말씀을 미루어 생각하면, 사람들은 하늘을 걸고, 땅을 걸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습니다. 또 맹세하는 대상에 따라서 그 맹세는 지켜야만 되기도 하고, 혹은 안 지켜도 되는 것 정도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맹세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또 본문 말씀은 맹세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말에 믿음을, 신뢰를 더하기 위해서 맹세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맹세코 지키겠다고, 맹세코 하겠다는 말은 자신의 의지나 결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그런데 다른 면으로 생각해보면, 맹세해야만 믿을 정도로 자신의 말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음을 뜻합니다. 그냥 말해서는 믿을 수 없는 인간관계, 혹은 인격을 의미합니다. 진실함이 결여되었기에 맹세해야만 믿을 수 있는 그런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또 맹세하는 사람일수록 그 맹세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진실한 사람에게는 맹세가 필요 없습니다. 하겠다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갚겠다면 갚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맹세코 하겠다, 맹세코 갚겠다는 말은 그만큼 믿음직하지 못한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 맹세가 지켜지지 않을 가능성이 그만큼 높습니다. 빈말, 진실 되지 못한 말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맹세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예”와 “아니오”로 족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해야 할 때 “예”하고, “아니오”해야 할 때 “아니오”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이말, 저말 덧붙이고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 아님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예”, “아니오”가 중요합니다. “예”, “아니오”를 바로 할 수 있을 때 우리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역사의 비극은 “예”해야 할 때 “예”하지 아니하고, “아니오”해야할 때 “아니오”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해야할 때 “아니오”하고, “아니오”해야 할 때 “예”함으로 엄청난 비극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인류의 타락은 바로 그 같은 예 아닙니까?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 앞에 담대히 “아니오” 했더라면, 하나님의 뜻 앞에 끈질기게 “예” 했더라면 낙원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3장, 아담과 하와의 타락의 이야기는 먼 옛날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 바로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불순종이란 선악과를 따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II.

“예”, “아니오”가 중요합니다. “예”와 “아니오”를 바로 해야합니다. 그렇다면 “예”와 “아니오”를 바로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어떻게 하면 “예”와 “아니오”를 바로 할 수 있습니까?

(1)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의 존재와 그 은혜에 대하여 “예, Yes”해야 합니다. 이 “예”야 말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룩하신 생명의 길에 대한 Yes는 단순한 선택이 아닙니다.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Yes 할 수도 있고, No 할 수도 있는 그런 선택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예”와 “아니오”가 갖는 의미를 충분히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저 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내리는 선택의 하나 정도로 생각합니다. 이민자로 이 땅은 살아가는 문화생활의 한 방법 정도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이 구원의 역사에 대한 “예”만큼 우리 인생에 영향력을 주는 “Yes”는 없습니다. 이 “예”는 내 인생이 바로 서느냐, 못 서느냐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와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존재와 은혜 앞에 “예”하게되면 우리 인생의 목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길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치관이, 소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Yes”는 영원한 생명인가, 영원한 멸망인가를 결정짓습니다. 그러기에 이 “Yes”가 중요합니다. 이 “Yes”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은혜의 역사, 곧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예”하지 않는 것은 그냥 또 하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예”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그 은혜의 역사에 “No”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 주신 그 풍성하신 은혜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No”는 심각합니다. 정말 생각해야 합니다. 영원히 멸망해도 좋다는 결심이 서지 않는 한 “No”해서는 안됩니다. 정말 자신을 사랑한다면 이 “No”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난 8월15일 세례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가신 임승태 교우께서는 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은혜에 “예”하면서 이런 고백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성경 말씀은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한한 복종을 강요하고 애들 이야기책에나 나옴직 하는 유치한 천당과 지옥 이야기로 믿음을 압박하는 서양 논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가장 오랫동안 높은 수익성을 유지해 왔던 종교사업을 하는 곳이라 느껴졌습니다. 더욱이 예수는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영향력 있던 훌륭한 정치지도자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것은 잘 짜여진 각본 하에 이루어진 연극에 지나지 않았고 부활은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한 반전의 기교에 불과하다고 우기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성경의 논리적 모순을 찾아내고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교리를 비웃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저의 그런 생각과 행동은 그야말로 치기어린 것들에 지나지 않았고 성경말씀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그를 부정해 보려는 자기 합리화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어찌하였거나 지금 저는 성경 말씀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제가 결국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교회에 나가기까지 또 이렇게 세례를 받게 되기까지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경공부 자체에는 관심을 가졌지만 교회에 나가 어느 집단의 구속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은 저를 아주 늦게까지 망설이게 하였습니다. 문봉주 공사님마저도 이제 교회에 나갈 때가 되었을 텐데 이렇듯 머뭇거리고 있다고 걱정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문득 새벽녘에 깨어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몹시도 시달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가족들과 같이 나가면 마음이 좀 평안해 질수도 있겠구나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가라 앉혔습니다마는, 이는 저에게는 참으로 느닷없는 경험이었습니다. 비록 이러한 불안감이 저를 교회로 인도했습니다마는, 목사님의 조용하면서도 힘이 있는 그리고 가슴을 파고드는 설교 말씀은 저로 하여금 한 주도 교회를 거를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언제이고 세례를 받는다면 이왕이면 제가 존경하는 마음이 드는 그리고 제 신앙생활의 모태가 되었던 와싱톤한인교회에서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앞으로 제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영유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 일겁니다. 저는 사실 믿음도 부족하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미련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주님의 사람으로서 떳떳한 믿음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더 많은 용기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옆에 계신 분들의 도움이 절실히 요구되기도 하구요. 지금으로서는 십년 후의 제 신앙이 얼마나 자라있을 지 감히 예단하기도 두렵습니다. 하지만 애써 노력하겠습니다. 남들로부터 존경받는 신앙인은 못될지언정 부끄러운 신앙인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기도해 주십시오.

(2) 둘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사랑 앞에 “예”한다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아닌 것에 대하여 “아니오, No”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Yes, 예”하는 삶은 세상 속에서 다른 인생, 구별된 삶의 길을 걸어갈 것을 요청합니다. 이 길을 우리는 거룩함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다르다, 구별되다”는 뜻을 갖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성결하게 되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3).” 이 길은 바로 하나님의 뜻 때문에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른 인생, 구별된 삶을 살아감을 뜻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걸어가는 삶의 길에 “No, 아니오”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넓게 열린 고속도로 처럼 그렇게 달려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은 좁고 찾는 사람이 적은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넓은 길에 대해 No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에 대하여 No, 아니오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보다 정직하고 보다 진실하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Yes, 예” 때문에 재정적으로 손해 볼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로 부터 따돌림 받을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깨우치시는 양심의 소리를 따라가기 때문에 외롭고 힘들지 모릅니다. 심한 경우에는 실패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아니오, No 하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이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내일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Yes, 예 해주시는 그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고통 속에 그대로 두시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Yes 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대하여 No 하셨습니다. 그 대가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마지막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예, Yes"하셨습니다. 하나님의 Yes 가 무엇입니까? 빈무덤입니다. 부활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죄악된 세상에 대하여 No하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 우리도 주님처럼 하나님께서 ”Yes, 예” 해 주시는 영광의 그날을 맞을 것입니다.

(3) 그러기에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주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언제 Yes하고 언제 No 할 것인지 분별하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하여 Yes하고 무엇에 대하여 No할 것인지 분별하는 것입니다.

Wesley Duel은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싶거든 이란 책 속에 하나님의 뜻을 두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지시적인 뜻이고, 둘째는 선택을 허용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지시적인 뜻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으로 이 뜻 앞에서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이 뜻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필수적입니다. 반면에 선택이 가능한 두 번째 뜻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주님을 향한 효과적인 봉사와 섬김의 삶에 필수적입니다. 이 두 번째 뜻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그만큼 우리는 건강하고, 지혜롭게, 또 능력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비즈니스를 해야 되는지, 어떤 배우자를 선택해야 하는지, 무엇을 공부하고 어떤 직장을 택할 것인지 등은 모두가 주님의 뜻을 분별함이 요청됩니다. 이런 분별의 삶을 위하여는 몇가지 분별하는데 참고해야 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둘째는 기도, 셋째는 현재 부딪치고있는 상황, 그리고 넷째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조언 등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 속에서 바른 분별의 삶을 위하여 저희 교회가 열고있는 클래스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교우 여러분들의 깊은 관심과 참여를 적극 권장해 드립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앞에서 “예”와 “아니오”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많은 선택들 앞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길은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를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의 약하심은 인간의 강함 보다 낫습니다. 여러분, 바로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예”와 “아니오”를 바로 하시는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III.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고귀하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귀하게 지음받은 우리들이기에 바로 “예” 와 “아니오”를 할 수 있습니다.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바로 선택해야 합니다. 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예” 와 “아니오” 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예”와 “아니오”를 바로 하지 못하면 우리 인생은 망합니다. 무너집니다. 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오늘 설교를 줄이겠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널리 알려진 설교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Fred Craddock 교수를 들 수 있습니다. Craddock 교수는 Philips 신학대학원과 Emory 대학교의 Candler 신학대학원에서 설교학 교수로 또 신약학교수로 명성을 떨치셨던 분입니다. Craddock 교수의 어머니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셔서 늘 자녀들을 데리고 주일예배와 주일학교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교회를 나가지 않았습니다. 주일 날이면 저녁식사가 늦어진다고 교회에서 돌아오는 어머니께 늘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버지는 교회가 자신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비난하면서 교회가 원하는 것은 단지 Another name, Another pledge, 새교인이 생겨서 헌금 더 거두는 것이라고 늘 말했습니다. 간혹 목사님이 전화를 걸어서 권고해도 아버지의 대답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Another name, Another pledge, 교인 수를 늘려 헌금 더 거두려고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이같은 이야기를 천번 이상은 들었을 것이라고 Craddock 교수는 회고했습니다. 부흥집회가 열려 강사가 찾아와도 아버지의 대답은 늘 같았습니다. 주방에서 일하는 어머니는 오신 분들의 마음이 상할까봐 걱정이 되어서 늘 가슴을 조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 말씀을 안 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후두암이 발견되어서 수술을 받으셨는데 너무 늦어서 의사들은 희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입에 튜브를 꽂고 방사선 치료의 고통을 견디어 내고 계셨습니다. 체중은 74파운드까지 떨어졌습니다. Craddock 교수는 재향군인 병원으로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병실에는 곳곳에 화분과 꽃이 놓여있었고 아버지 병상 주변에는 20인치 될 정도로 카드가 높이 쌓여 있었습니다. 모든 꽃, 모든 카드는 어머니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말을 할 수 없으신 아버지는 크리넥스 휴지통을 달라고 하시고는 뒷면에 몇자를 쓰셨습니다. Shakespeare의 글의 한 줄이었는데 “ 이 험한 세상에서 내 이야기를 좀 할 수 있도록 숨을 좀 가다듬어라” 였습니다. Craddock 교수님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무슨 이야기 하실거예요?” 아버지는 말없이 크리넥스 박스 위에 쓰셨습니다. “I was wrong. 내가 틀렸단다.”

여러분, 더 늦기 전에 우리 주님께 “Yes, 예”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에 대해서 “No, 아니오”하시기 바랍니다. “예”와 “아니오” 사이에서 바로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바르게 선택하고 바르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뜰에 콩깍지 깐 콩깍지 인가 안 깐 콩깍지 인가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정말 어려운 말은 “예” “아니오”입니다. “예”, “아니오”가 중요합니다. 정말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