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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9.19. 전수복 목사
"고난 이후에 ...."
요한복음 4:46-54
하나님은 인간이 겪는 고난을 통해서
주의 자녀들이 영적으로 성숙해 지기를 원하십니다.
고난 이후에 얻는 축복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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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바대로 ,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풍요하고 평안하게 이끌어주신다고 느껴질 때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우리의 예상이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우리가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따르지 않을때,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신앙적으로 많은 갈등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나 더 넓게는 온 세계적으로 혼돈과 무질서와 불의한 상황들을 경험하게 될때, 믿는 자들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온전하심, 인간의 삶과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떼기 있습니다. 3년 전에 겪은 9.11 참사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국제적인 테러와 전쟁의 소식들, 그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이 겪는 분열, 그리고 지난 여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한 젊은이의 희생, 이런 불의한 상황을 접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무엇일까?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I.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겪는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주의 자녀들이 어떤 모습으로 성숙하고 변화되기를 원하시는지를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우선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이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첫번째 기적 이후에 같은 갈릴리 가나에서 일어난 두번째 표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왕의 신하가 아들이 죽을 병이 걸려서 가버나움에서 갈릴리까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갈릴리에서 가버나움까지는 약 25마일정도 되는 거리인데, 그 당시의 교통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아마도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가나에서 행하신 표적에 대해 들었을 것이고, 죽을 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희망은 예수님의 기적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의 아들이 이처럼 절박한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면, 지체 높은 왕의 신하가 가난 한 목수의 아들인 예수를 찾아올 아무런 이유가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런 가능성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 조차 찾을 수 없고, 한가닥 희망의 끈조차 잇대어 볼 곳이 없어 막막하기 이를데 없는 인생의 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도 예수님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당함은 기도하게 하심이라"(야고보5:13)고 말씀합니다. 고난당할때에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왕의 신하와 그 가족이 겪는 원인과 이유에 대해 아무런 단서를 본문이 제공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왜 이런 고난을 당하게 되었는지 묻거나 질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해 몇가지 오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선 고난은 죄로 인해 당하는 결과라고 단정짓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있는 욥에게 인간의 경험과 지식과 논리로 고난에 대해 설명하고 질책하였던 친구들의 말처럼 모든 고난이 하나님에 대한 죄로 인해 당하는 것입니까?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원인은 다양해서 인간의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크게 보면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는가 하면, 개인적으로, 또는 개인이 속한 공동체의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선택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의 원인과 상관없이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짐을 함께 나누어 지기 원하시고, 우리의 아픔을 가장 잘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난에 대해 오해하는 다른 하나는, 고난의 목적이 축복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고난 당한 후에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선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큰축복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 당한 후에 받은 축복은 고난으로 인해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하고, 변화되었을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냥 고난을 참고 견디기만 했다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욥이 당한 고난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욥의 삶이 뒤틀려지기 시작하더니 견딜 수 없는 온갖 고난을 다 경험한 그가 고난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이전보다 더 큰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방의 의인이라 불리우던 욥도 폭풍 가운데 나타나셔서 창조주와 만물의 주관자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그분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후에 자신의 영적인 무지와 교만을 회개한 후에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후에 누리는 축복이 아무리 엄청나고 크다고 한들 욥과 같은 고난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다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환란을 면하게 하셔서 평안 중에 주님께 충성하고 잘 섬기는 것이 더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현재 고통 중에 있는 형제에게 고난 이후에 받을 축복을 약속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당한 이들의 그 참담함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진정으로 그들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고통이 끝난 후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간증하기는 쉽지만, 막상 고통의 한 가운데 있을 때에는 그것을 신앙으로 극복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II.
우리의 관심은 오히려 고난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가 대한 것입니다. 48절에 보니까 예수님은 왕의 신하에게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처음에 예수님을 통해서 아들의 병이 고침받는 기적에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53절 말씀을 보니까 죽을 병에 걸린 아들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고침받은 것을 알고 자기와 온 집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매우 다양합니다. 물론 축복받기 위해서, 표적과 기사를 바라고,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지음받도록 우리 삶을 주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와 그 가족들도 고난이 오히려 예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되는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의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출애굽 이후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노예살이하던 히브리 민족 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훈련시키셨던 하나님의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때 그들의 이름은 합비루, 암하렛츠였습니다. 그 뜻은 땅의 사람들인데, 노예라는 그들의 신분을 잘 말해주는 이름입니다. 출애굽의 역사 초기에, 그들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하고, 그들의 힘든 현실을 불평하며, 더 나아가서는 그들이 종살이 했던 애굽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기 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태도 일뿐만 아니라, 오랜세월 애굽의 종살이 하며 몸에 배어 있는 노예근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출애굽기 13장 17절 이하에 보니까, 블레셋 사람의 땅을 지나가는 길이 비록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이지만, 백성들이 전쟁을 보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할 것을 아시고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40년동안 광야의 모래바람속에서 숱한 시련과 고통의 날들을 지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직접 삶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의 고난은 하나님의 위엄을 증거하는 선택받은 백성들로 히브리 민족을 훈련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이었습니다. 애굽의 종이였던 그들이 히브리 민족으로, 하나님의 선민으로 신분이 변화된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은 광야에서의 긴 고난을 이겨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이 변화된 것이 고난 후에 얻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모래바람을 뒤집어쓰면서 언제 끝날 지 모르는 광야생활 40년동안 그들이 천막을 치고 잠시 정착할 때에도 , 또 다시 천막을 걷어 가나안을 향해 전진해 나갈때에도 그들이 바라본 것은 성막 위에 드리워진 구름의 움직임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구름의 움직임을 따라 그들이 길을 떠나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도록 하나님은 명령하셨을까요? 오랜 종살이 하던 그들이 바라보던 것은 땅이었습니다. 땅을 바라보며 하루살이처럼 의미없이 살던 땅의 사람들, 노예였던 그들이 이제 긴 광야생활을 거치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백성으로 그들의 체질을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방법 또한 고난이었습니다. 긴긴 고난의 세월이 끝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살때에 그들이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들로,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시키신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도 그렇게 훈련시키는 것을 오히려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번 주어진 인생살이 항상 땅의 것만 바라보며 살기 쉬운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땅만 바라보고 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라고,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고 살라고 그래서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가 되라고 우리를 고통 가운데 놓아 두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고난이라는 연장을 들어 우리를 다듬으시기도 하고 새로 지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해 아래의 삶이 아니라 해 위의 영원한 것을 소망하며 살아갈 때에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와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하나님 자녀로서의 신분을 늘 잊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III.
우리가 고난당한 이후에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성숙하고 변화되기를 기대하시는 것일까요? 고난의 또 다른 목적은 우리의 순종입니다. 순종이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삼아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결정을 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47절에,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간청하기를" 제발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셔서,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 49절에 다시 간청하기를 " 선생님 ,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주십시오." 내려 오셔서 아들을 고쳐달라는 왕의 신하의 간청은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려 가시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 말씀 한마디로 그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50절에 보니까 왕의 신하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내 방법과 주님의 방법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선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바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고난 이후에 우리가 순종하는 주의 자녀로 변화되고 영적으로 성숙해서 온전한 주님의 백성으로 변화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8,9절에 보면, "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이 되셨습니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위인들이 모두 다 처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고집과 자신의 지식과 경험, 생각들을 가지고 행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질적인 약점때문에 때로는 낭패보는 경험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를 쓰시고자 하여 부르실때 "제발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소서." "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하며, 하나님의 제의를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급한 성질 때문에 이집트인을 살해하기도 했고, 십계명이 쓰여진 돌판을 깨버리기도 하고, 말 안듣는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대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랜 세월 광야를 돌며 배운 것은 바로 "순종"이었고, 덧붙혀 얻은 칭찬은 민수기 12장 3절에 기록된 것처럼 " 지구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이렇게 우리를 변화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출애굽기 마지막 부분을 보면 모세가 그의 고난을 통해 훈련받은 결과가 바로 순종인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회막을 만들도록 아주 상세하게 지시하십니다. 자신이 배운 최고의 학문, 자신이 겪은 최고의 군사 경험, 심지어는 자신이 통과해 온 극심한 고난의 경험들 까지도 하나님의 뚯을 이루어 가는데는 별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9.40장에 여러번 나오는 말씀이 바로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충동적이고 의지가 약해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방법대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던 아브라함도 자신의 본토 아비집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는 힘든 여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 11절에 아브라함을 "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내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보다 더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더욱 선하고 완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 보다 훨씬 완전한 계획과 방법으로 인생을 주관하십니다. 지금 당장에 눈으로 보기에는 내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이 방법이 불합리해 보이고, 결과가 속히 보이지 않아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곧바로 로마에 보내주시지 않고 , 오히려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순종하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전도했는데, 가이사랴에서 2년동안 감옥살이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의 시간동안에도 심문 받는 과정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방법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전략을 우리가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습니까?
시간이 자나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갑니다. 죄수의 몸이니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했지만, 돈 한푼 들이지 않고 바울을 죽이지 않고서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40명의 보호병들을 방패삼아 로마로 후송됩니다. 가다가 만난 유라굴라 광풍으로 인해 도착한 멜레데 섬에서 3개월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 전한 것으로 지중해 지역을 끼고 잘 닦여진 로마의 군사도로를 통해 복음이 전세계로 전하여지도록 계획하신 것도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이렇게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만큼 완전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 분이 하시는 일의 처음과 끝을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고난 당할 때 우리는 권능자의 손을 의지하게 되고, 기도하게 됩니다. 내 의지와 방법을 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고난 중에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고난 가운데서도 이길 힘을 주시고, 피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시련의 불 가운데에서 연단하시고 건져내셔서 도울 힘이 없는 인생들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온전한 믿음의 자녀로 우리를 성장시켜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뉴잉글랜드 항구에서 여러 척의 배가 고기를 잡으려고 떠났는데, 풍랑이 일기 시작하더니 밤에 배가 한 척도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풍랑은 잠잠해 지지 않고, 오히려 바람은 더욱 거세어져 갔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한 집에 불이 났습니다. 이 불이 큰 바람을 타고 온 마을을 뒤덮었습니다. 불이 바람때문에 더욱 활활 타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하다가 낙심해서 주저 앉았습니다. 주님을 원망하며 애원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풍랑이 잔잔해 지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바람도 거세어지고 불까지 났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풍랑도 잔잔해 지고 날이 밝아 오는데 멀리에서 고기 잡이 나간 사람들을 태우고 배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기뻐서 환호하며 달려갔지만, 돌아온 남편들에게 다 타버린 집을 보여주는 그들의 심정은 참담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남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난 밤에 칠흑같은 밤바다에서 갈 길을 몰라 헤매고 있을때, 멀리서 보이는 불빛때문에 표류하지 않고 이 항구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모든 일이 서로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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