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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9.12. 조영진 목사
"믿음은 삶입니다(14)-참고 견디십시오"
야고보서 5:7-11
믿음의 삶은 인내를 요청합니다.
참음이 없이는 성숙한 믿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나는 삶 속에서 참음의 깊이를 갖고 있습니까?
한계를 넘는 인내로 믿음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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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한 젊은이가 벼슬자리를 얻어 임지로 떠나는데 전송 나온 친구가 같이 걸어가면서 충고를 했습니다. “벼슬자리에서 일하려면 무엇이건 참아야 하네”하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암, 참아야지...”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가더니 그 친구가 또 하는 말이 “벼슬자리에서 일하려면 무엇이건 참아야 하네, 명심하게”하고 또 충고를 했습니다. 그때 그 젊은 벼슬하는 친구는 “참고 말고... 참아야지”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더니 또 세 번째로 “몇 번이라도 참아야 하네... 참는 것 잊어서는 안되네...”하고 충고를 했습니다. 세 번째 충고에도 그 벼슬하는 친구는 “암, 참고 말고...”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가다가 네 번째로 참아야 한다고 충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칭찬도 세 번하면 듣기 싫다고 한다더니 네 번씩이나 충고를 하니 벼슬하는 친구가 화가 났습니다. “아, 이 사람아, 한 두번 말했으면 됐지 네 번씩이나 누구를 조롱하는 것인가...”하고 화를 불끈 냈습니다. 그때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친구여, 보게나 네 번 말했다고 화를 내면 쓰겠나... 인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이네...”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I.
야고보서 연속설교의 열네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사도 야고보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중요한 모습으로 참음, 인내의 삶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사도 야고보는 인내, 참음과 같은 단어들을 여러 차례 사용하고 있습니다. 5:7에서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라고 시작한 야고보 사도는 5:8에서 “여러분도 참으십시오,” 5:10에서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또 5:11에서는 “보십시오 참고 견딘 사람은 복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등 참고 견디는 삶의 중요성을 되풀이 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야고보서 외에도 여러 곳에서 인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분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수없는 반역에 불구하고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셔서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는 하나님의 인내와 기다리심을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이렇게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기에 우리도 참음의 삶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참음입니다.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이 사랑을 말할 때,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합니다. 또한 사랑의 마지막도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라고 끝을 맺습니다. 사랑의 시작과 마지막을 각각 참음으로 정의합니다.
참음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참음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말할 수 없습니다. 참음은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매입니다.
II.
조금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어느 때에 참음이 필요합니까? 참음이 요청되는 구체적인 상황은 어떤 것입니까?
(1) 무엇보다도 먼저 참음은 인간 관계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여러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한한 인내를 요청합니다. 참음이 없다면 세상의 모든 인간 관계는 깨어지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참음이 있기에 우리는 질서를 지키며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폭행, 다툼, 살인의 많은 경우는 조금 더 참지 못하는데서 생겨납니다.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인간 관계에서 오는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경우가 허다합니다.
저는 틴에이저 아들과 함께 살면서 자신의 인내를 테스트해 본 적이 많았습니다. 견디다 못해 야단을 치고, 목소리를 높이면, 아들은 언제나 왜 소리 지르느냐고 반박해왔습니다. 원인은 자신이 제공해 놓고도 목소리 높인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 목적이 여러 가지임을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들과 씨름하면서 많이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인내는 부부 관계에서도 요청됩니다. 부부란 가장 편한 사이이다 보니 참지 못하고 쉽게 쏟아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쏟아 놓으면서 우리는 집안에서 배우자에게 쏟아 놓지 않으면 어디서 쏟아 놓느냐고 자신을 정당화 시켜 보기도 합니다. 이런 참음의 부족은 부부 사이에서 상처와 아픔을 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부부 싸움을 하더라도 규칙을 지키며 싸우시기 바랍니다. 참음이라는 break을 잊지 마시고 싸우시기 바랍니다. 참음없는 무한대의 싸움은 정말 비극입니다. 고통과 아픔을 남겨주는 산실이 될 수 있습니다.
(2) 인내는 인간 관계 뿐 아니라 삶의 현실, 고통의 문제 앞에서 요청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인생 여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습니다. 예고없는 고난과 시련은 어느 때에라도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인생길은 바로 고난의 바다를 헤쳐가는 싸움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은 우리에게 무한한 인내를 요청합니다. 참음이 없는 인생은 깨어지고 파선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내는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고 세워 줍니다. 고난을 이기는 원동력이 됩니다. 고난은 인내를 가르치는 위대한 스승입니다.
특별히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 많은 인내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만,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 가려면 손해보기도 하고 참아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예수님 안믿는다면 성질대로 확 쏘아주고, 멋대로 하고 싶지만, 예수님 때문에 참아야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정직하게 살려하다 보면 믿지고 손해보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른 거룩한 길을 추구하다가 보면 소외되고 비난받을 수도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미국에서 살아도 그러한데, 기독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는 나라에서는 더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도 지구촌 구석구석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한가지 때문에 많은 박해와 고난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고난과 소외를 참고 견디면서 믿음의 길을 걷는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믿음 때문에 더 많은 고난과 역경을 맛보며 인내로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본문 5:11 이하의 말씀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을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보십시오. 참고 견딘 사람은 복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욥이 어떻게 참고 견디었는지를 들었고, 또 주님께서 나중에 그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가여워 하는 마음이 넘치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크십니다.”
(3) 인내는 우리의 인간 관계 속에서 또 고난과의 싸움 속에서 요청됩니다. 그러나 인내는 결국 내 자신 안에서의 싸움 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참는 힘은 내 인격의 깊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는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대로 반응하지 않고 자신을 다스림을 의미합니다. 참지 못하는 사람의 인격은 그만큼 깊이가 없습니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힘이 약합니다. 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은 인간관계나 고난과의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5:3 이하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 이 시대는 참는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과학기술 문명이 제공하는 편리한 삶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불편함을 못견딥니다. 청소년들의 경우는 “Boring, 무료함”을 못견뎌 합니다. 인내의 덕을 잃어가기에 이 시대의 인격은 그만큼 얄팍해져 가고, 즉각적이고 피상적인 만족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어려움과 고난을 견디어내는 힘이 그만큼 약해지고 있습니다. 요즈음 많이 듣는 이야기가 ”Anger Management(분노조절)” 이란 어휘입니다. 여러분 Anger와 Danger는 낱말 하나 차이입니다. Anger에 D자가 붙으면 Danger, 위험해집니다. 그러기에 Danger 해지기 전에 Anger Management가 필요합니다. 이 말은 그만큼 이 시대는 자아를 다스리는 힘, 인격의 깊이를 잃어가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참음을 배워야 합니다. 견디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옛 믿음의 선배들, 예언자들, 욥, 예수님과 사도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참음, 내 스스로를 다스리는 힘을 길러가야 합니다.
III.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권면합니다. 참고 견디라고. 참음의 힘을 길러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참음과 연관된 몇가지 멧세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1) 첫째로 오늘 본문 말씀은 끝까지 참을 것을 권고합니다.
여러분, 끝까지 참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처음 얼마 참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내는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문제가 극복될 때까지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내의 본질을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 오실 때까지 참아야 합니다. 어떤 고난, 어떤 역경, 어떤 손해가 다가와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반드시 극복될 때가 있습니다. 내 생전, 땅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요단강 건너가서 주님 앞에 설 때 극복 될 것입니다. 주님 오시면 해결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실 때까지 참아야 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끝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2) 둘째로 그리스도의 인내는 단순히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산이 무너져도 희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허리케인 같은 고난이 밀려와도 쓰러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힘만 믿으면 견디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지혜만 의지하면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사람들과 다릅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 자신 안에 있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끊어지지 않는 사랑에 있습니다. 그분의 넓고 크신 사랑 안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환란과 역경 속에서도 기댈 언덕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견딜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여전히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견딜 수 있는 힘, 참을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을 알고 있습니다. 그 능력이 흘러나오는 파이프와 연결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때에라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에라도 우리는 견딜 수 있습니다. 참을 수 있습니다. 농부가 오래 참으며 땅의 소출을 기다리는 듯 우리도 참을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 예언자들이 견딘 것 처럼 우리도 견딜 수 있습니다. 욥이 참고 견딘 것 처럼 우리도 견딜 수 있습니다.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가르치시는 김득중 교수께서 무엇이 삶을 아름답게 하는가 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그 책 속에 실린 한 여인의 고백입니다.
1968년 11월, 그 어느 맑은 알라스카의 오후였습니다. 나는 23살, 아기를 가진 지 5개월! 공군병원에 근무할 시간이 되어 출근을 하던 길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2시30분, 나에게는 비통한 운명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학교 통학버스를 추월한 대형 트럭이 나의 차 앞으로 산더미처럼 달려들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트럭은 나를 덮쳐 눌렀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는 내 차 옆 유리를 뚫고 밖으로 내 동댕이쳐졌다고 합니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죽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저 시체가 움직여! 저것은 아직 죽지 않았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저것”이라는 시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앰블런스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근무하는 공군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뼈는 여러 곳이 부러지고 얼굴은 비참하게 찢어졌습니다. 나를 본 의사들은 너무 놀랬는지 얼마동안은 수술은커녕 당황한 채 서 있기만 했습니다.
드디어 군의관 소령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정형외과 전문의사였습니다.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진통이 계속되었습니다. 치아가 부러지고 잇몸에 온통 상처를 입었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견디어 보시오! 당신만 결심하면 당신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사가 나간 사이 나는 나의 얼굴을 거울로 보는 순간, ‘하나님, 이 꼴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하고 원망의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소식을 들은 남편이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나의 얼굴을 보는 동안 표현한 슬픔과 고통 속에서, 나는 남편마저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없이 떠나간 남편! 그후 1년이 넘자 이혼을 제기하여 왔습니다. 5개월 된 뱃속의 애기와 남편을 나는 순식간에 잃었습니다.
나는 산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기 전에 나는 나의 처참한 운명을 저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이 비통한 과정을 지켜본 이는 바로 군의관 소령이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지금 지옥을 헤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남은 것은 이 주어진 생명을 우리가 가꾸는 일입니다. 2년에서 3년의 기간만 주십시오.”
그후 7년 동안 나는 35번의 정형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나는 지금 거의 완쾌되었습니다. 그 의사는 7년이나 나의 회복에 전념한 셈입니다. 어느 날 그 의사는 나에게 결혼을 신청해 왔습니다. 또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지금 나는 매일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하필이면 왜 나입니까?’라는 원망스러웠던 물음 앞에 하나님은 나에게 새로운 해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권고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 여러분도 참으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 참고 견디는 사람은 복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참고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은 승리할 것입니다. 인내는 씁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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