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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8.22. 구경모 목사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빌립보서 3:12-14 / 사도행전 9:1-9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과거보다는 오늘의 믿음에 충실하며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가질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의 삶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교인, 기독교인, 또는 신앙인으로 규정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저 역시 개인적으로 늘 스스로에게 던지며 사는 기본적인 질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아침 여러분과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약 6년 전에 일간신문에서 재미난 기사 하나를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태리 음악계에서 앞으로 모든 콩쿠르를 개최할 때 한국사람들을 비롯한 동양인 참가자들을 배제시키겠다는 발표였습니다. 내용인 즉, 한국사람들을 비롯해 동양인 참가자들은 모든 음악콩쿠르에서 뛰어난 음악적인 자질과 역량을 보여 상위권에 입상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동양사람들은 입상해서 유명해지면 그 때 뿐이지 그 다음의 음악 활동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입상해서 훌륭하게 음악계에 데뷔했으면, 그 다음에 순회공연을 갖는다든지, 개인 독창회나 발표회를 갖는다든지 해야하는 것이 유럽과 미국인 참가자들의 순서인데 한국을 비롯한 동양계 참가자들은 그 다음 소식을 듣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왜 심각하게 생각하느냐 하면 음악 콩쿠르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누가 수상했느냐, 역대 수상자 가운데 누가 있었다 라는 권위와 명예를 생명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유럽 내에만 1백여 개가 넘는 정식 음악 콩쿠르가 있고, 그 콩쿠르를 준비하는 또 다른 예비 콩쿠르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콩쿠르간에 경쟁이 생기는 것이고, 그 콩쿠르가 배출한 현역 음악가가 몇 명이고, 지금 세계 음악계를 주름잡고 있는 사람이 어떤 콩쿠르 출신이냐 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관심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양계들은 입상할 때만 한 번 반짝할 뿐이지 그 다음에 나타나야 하는 개인 독창회나 연주회, 그리고 유명 오케스트라와의 협연과 같은 현재의 음악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이 분석한 동양계 참가자들의 현역 활동이 저조한 이유는 그들은 어려서부터 열심히 조기에 교육을 받아왔지만, 일단 콩쿠르에 입상한 다음에는 목적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저 고액 과외를 하는데 있어서 콩쿠르 입상했다는 과거 사실이 자랑이 되고, 프리미엄이 되기에 그럴 것이라고 기사를 적었습니다. 과거의 수상경력은 화려한데 현재활동이 미미한 동양계 음악가들에게 경종을 울린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며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심심치 않게 보여지고 있노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첫 번째 의미를 저는 항상 신앙의 현재성 속에서 찾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많은 종류의 교인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 중에는 이제 막 믿음생활의 걸음마를 시작하신 분들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오래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회 출석하며 신앙생활 해온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오래 신앙생활 하신 분들을 만나게 될 때마다 공통적으로 제가 느꼈던 사실 하나는 그런 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과거 신앙을 자랑하며 살고, "그때가 좋았었지" 하며 과거에 자신이 소유했던 믿음을 그리워하며 살고, 더 나아가 과거 신앙경력에 얽매여 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과거 지향적인 신앙과 믿음의 모습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그 순간의 감격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처음 사랑을 기억시켜주고 그러므로 다시금 나태해진 지금의 신앙을 돌이킬 수 있는 계기를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과거의 신앙에 연연하는 것만큼 지금 신앙 생활하는데 위험한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여기 가롯 유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 팔아먹은 사람으로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읽어보신 분은 이미 다 아시겠지만 이 사람, 가롯 유다는 시작부터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 그리고 제사장들이나 서기관과 같은 당시 예수님을 못 마땅해 하고, 멸시하고, 비난했던 그런 대적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은 예수님의 손에 의해 직접 선택함을 입은 영광스러운 12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12제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최 측근에서 당신과 함께 먹고 마시며, 당신을 따르게끔 직접 선택해 주신 복 받은 사람들이 12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세상에 전도하러 내 보내시며 귀신 쫓는 권세와 병 고치는 은사, 그리고 축복의 권한까지 허락해 주셨던 이들이 12제자였습니다. 바로 이 대단하고 영광스러운 12제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가롯 유다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축복 받은 자리, 능력 있는 자리, 은혜스러운 자리, 예수님을 가장 최 측근에서 모시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을 배신하고, 예수님을 팔아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가롯 유다가 그렇게 된 이유는 그가 신앙생활 하는데 매일 매일의 철저한 갱신과 새로워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가롯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과거 믿음은 훌륭했지만 현재 믿음이 무너졌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처음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해 12제자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었을 때 그는 아마 모르긴 몰라도 모든 일에 열심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일 때도 다른 제자들보다 앞자리에서 듣고자 했을 것이고, 예수님과 더불어 기도에 전념하는 삶을 살고자 했을 것이고, 예수님이 머무르실 장소를 섭외하거나 식사하실 집을 정하는데도 누구보다도 센스있게 계획했고, 추진력 있게 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만 만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골고다 언덕을 향해 준비된 길을 가시고 있는 예수님을 따르는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지혜가 없었고, 대신 과거에 비추어 보아 지금이 잘못되어 가고 있노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과거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환영과 칭찬, 영광과 축복의 자리였다면,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멸시와 비판, 희생과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옛날에 내가 어떤 제자이었었고, 왕년에 내 신앙이 이 만큼 깊었었고, 이렇게 훌륭하게 봉사와 헌신을 했노라고 자랑은 할 수 있었지만, 지금 당장 예수님의 그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갈 만한 신앙이 없었고, 믿음의 분량은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거에는 예수님의 제자였는데 지금은 예수님의 대적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나간 때는 지나간 때로 족한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로서 충분합니다. 자꾸 과거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지금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오늘, 그리고 매일매일, 그 분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며 살아가느냐 일 것입니다. 지금 당장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굳센 믿음과 건강하고 성숙한 신앙이 필요할 뿐이지, 과거의 믿음과 지난 날의 사역이 아닌 것입니다.

과거가 중요하다면 현재는 더욱 중요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좋은 은사와 복된 은혜를 누렸더라도 지금 내가 그것들을 유지하지 못하고, 더욱 발전시키지 못하고, 더욱 깊이 있게 성숙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가롯유다처럼 예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을 팔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는 지도 모릅니다. 가롯유다처럼 과거에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었는데 지금은 예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자의 모습으로 전락될 수도 있는 것이 우리의 약한 신앙의 모습인 것입니다. 과거에 좋았었다면 그 일을 오늘 더욱 열심히 감당해야 옳은 신앙일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결단코 현재진행형입니다. 내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어떤 모습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느냐가 하나님 앞에 선 우리에게 중요할 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리 성자로서 과거에 살았을 지라도 지금 그렇지 못한 사람과 과거에는 어둠의 자식으로 살았을지라도 회개하고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어떤 이를 더 기뻐하시겠습니까? 가롯유다는 제자였었지만 천국에 가지 못한데 반해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같이 매달렸던 한 강도는 강도로 살아왔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고 하시며 우리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제나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고, 바로 오늘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를 잊고 신앙생활 하십시다. 또 과거를 묻지 말고 신앙생활 하십시다. 오늘 믿음생활에 더욱 충실해지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순간들을 놓치지 말고 예수님과 동행하십시다. 과거를 잊고 하나님 앞에서 오늘을 열심히 사는 신앙인이 되어 보십시다.

두 번째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철저히 개인적, 체험적이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김남준 목사님의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 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호랑이를 연구하는 모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첫 번째 발표자가 등단했습니다. 그 사람은 다년간 호랑이에 대해 연구하고, 관찰했던 동물학자였습니다. 그는 호랑이의 습성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고, 호랑이의 숫자에 대해서 정확한 통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호랑이를 보호하기 위해 기금을 조성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발표를 듣는데 지루해 했습니다.

다음 발표자가 등단했는데 그는 호랑이 사냥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고, 호랑이에게 습격을 당해 몸에 상처를 가진 사냥꾼이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회상가운데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때는 1953년 8월 16일, 동해안 지역에서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던 저는 다급한 전령의 임무를 띄고 홀로 태백산을 넘어야 했습니다. 달빛도 없는 캄캄한 산길을, 동행하는 사람도 없이 구보를 하며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산모퉁이를 막 돌아서려는 순간, 바로 그 때에...." 아직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며, 침을 꼴깍 꼴깍 삼키며 그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두 발표자 사이에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슨 차이가 있었길래 호랑이 전문가가 나와서 발표를 할 때는 지루해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사냥꾼의 목소리에는 긴장하며 이야기에 빠져들어 갈 수 있었겠습니까? 한 사람은 호랑이에 대해서 그토록 통계와 수치를 들이대며 장황하게 이야기했는데도 사람들의 공감이나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다른 한 사람은 아직 호랑이의 "호"자도 이야기 꺼내지 않았는데 듣는 사람들이 1953년 그 사냥꾼과 함께 태백산맥을 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 차이는 간단합니다. 앞의 사람은 호랑이에 대해서 연구하고, 호랑이에 관해서 이야기 한 사람이었지만, 뒤에 사람은 호랑이를 직접 체험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체험을 해야 완전히 아는 것이고, 경험을 해야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내 생활의 주인으로 매 순간 체험하며 사는 신앙인들입니까? 아니면 그저 단순히 예수님이 훌륭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훌륭하신 말씀에 대해 알고, 사회생활의 일부로서 교회에 습관처럼 다니며 종교 활동하는 교인들입니까?

예수님 당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눈엣 가시처럼 여기고, 그런 사람들을 잡아 족치고,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던 사울 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사울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다메섹이라는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업상 갔던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를 따르는 자는 누구라도 가만히 두지 않겠노라는 대제사장의 공문을 전해주기 위해 의기양양해서 가던 길이었는데 그 길 위에서 그는 참으로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멀쩡하던 하늘에서부터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빛이 갑자기 그의 눈을 비추었고, 깜짝 놀란 사울은 그 자리에 엎드려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의 귀에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정신을 차린 사울은 꿈인지 생시인지 혼란스러웠지만 하나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갑자기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경험한 그 순간에 저를 놀라게 했던 것은 사울이 강렬한 빛을 보았다거나,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거나 하는 경험이 아니라 오늘 본문의 7절의 말씀입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하는 장면입니다. 그 시간과 공간 속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유독 사울 에게만 나타나셨고, 사울 만이 홀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그 순간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그저 이상한 소리정도로만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귀가 없어서 못 듣고, 음성이 작아서 못 들었겠습니까? 나머지 사람들이 시력이 약하고, 눈이 어두워서 예수님을 못 보았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울 에게만 찾아가셨던 것이고, 그래서 그의 귀에만 들려진 것이고, 그에게만 경험되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체험하고, 만나는 순간은 철저히 개인적이고 체험적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똑같은 장소, 똑 같은 시간 속에 있었을 지라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철저히 개인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함께 한 교회에서 오래 신앙생활 했을 지라도, 예수님의 찾아오심을 영접한 사람만이 그 은혜의 참 맛을 알 수 있고, 예수님 경험을 한 사람만이 그 체험의 소중함을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들은 무어라 해도, 헛것을 보았노라고 놀려도, 그 분을 만난 사람은 그 분이 나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 이심을 고백하고, 증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94년 교외에 허름한 농가를 사서, 살인공장을 차려놓고 돈 많은 부자들만을 골라서 납치해 술을 먹인 후 비닐로 질식해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시체를 절단하고 아궁이에 소각해 온, 나라를 공포에 떨게 했던 지존파 사건의 주범 가운데 김현양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교화하고, 전도해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만든 오네시모 선교회의 박상구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처음에는 눈에 살기가 등등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던 김현양씨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한 유언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참회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신비를 온 천하에 전하고 싶습니다. 하늘나라 갈 것을 확신합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과 545장 "하늘 가는 밝은 길이"를 부르며 그 사람은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는 예수를 교도소 안에서 체험하고 난 후 사형 집행일을 기다리며 매일 규칙적으로 찬송을 일곱 곡 이상씩 불렀고, 열 구절 이상의 성경을 기록하며 암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전도한 사람이 무려 2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박 목사님에 의하면 예수를 체험하고 난 후 그는 살인공장이었던 자신의 이전 인생을 바꾸어 은혜공장, 말씀공장, 찬송공장, 기도공장, 전도공장을 운영하다가 부름을 받고 하나님나라에 갔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를 체험하며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사울처럼, 예수를 알기 전의 모습과 알고 난 후의 모습 속에서 변화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체험하고 난 후에 우리 삶 가운데 바뀌어진 것이 있습니까? 아니 바뀌어진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통째로 180도 거꾸로 변화된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체험한 후에 우리의 삶과 우리의 언행심사에 바뀌어짐과 변화됨이 없다면 그것은 많이 잘못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체험한 사람을 예전 모습 그대로 두시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체험한 후에 우리가 이전에 살아왔던 삶과는 달라지기를 원하시고, 달라지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사람, 전혀 정반대의 인격으로 거듭나기를 바라고, 새로운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시고,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희생하고, 손해보며 살아가시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예수 체험을 했다면 우리 삶에 분명한 변화와 바뀜이 있어져야 합니다.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감추고 감추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기쁨과 감사가 우리 삶에 보여지게 됩니다. 굳이 드러내놓지 않아도 은은하게 풍겨나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우리의 삶 가운데 가득차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체험했을 때 아무리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면 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아무리 하기 싫은 일일지라도 예수님이 좋아하신다면 기꺼이 기쁨으로 그 일을 자진해서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예수를 체험한 다음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그의 삶의 목표요, 그의 인생의 의미요 기쁨이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세상 어느 곳에든지 복음을 들고 나가는 전도자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욕먹고, 매맞고, 옥에 갇힐 각오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쁜 마음으로 자기 몸 어떻게 되는 것쯤은 초월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껏 신앙생활 해 오며 예수님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경험이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신앙인이 되고자 한다면 당연히 우리의 목표는 예수를 체험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고 예수님을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이 우리 인생 최대의 목표와 기쁨, 가치와 의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와싱턴 한인교회 교우 모두가 각자의 심령 속에서, 각각의 가정 속에서, 각 개인이 속한 직장과 일터에서 기어이 예수님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과거신앙에 연연하지 않으며 우리의 오늘 삶 가운데 예수체험이 넘쳐나는 우리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