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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8.8. 문형일 전도사

"바보 예수"

누가복음 23:32-43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연극의 배우들로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모든 사람의 박수를 받는 주연 배우로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때로는 바보처럼 느껴집니다.
왜 예수님은 바보의 역을 택하셨을까요?
사랑, 사랑 때문에, 바보같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도 바보가 되신 것입니다.

빈방을 혼자 지킨다는 뜻인 한자 고사성어 독수공방의 뜻은 부부가 서로 별거하여 여자가 남편 없이 혼자 지냄을 뜻합니다. 이 말을 남자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혼자 방을 지킨다는 그 뜻만으로 보면 제가 바로 이 독수 공방을 하고 있습니다. 집사람과 예쁜 두 딸이 한국에 간지도 벌써 3주가 되었습니다. 지난해 9월, 예정보다 한 달 반이나 먼저 세상에 태어난 둘째 딸 예은이도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또 한국과 미국에 오래 동안 떨어져 살게 되면서 한국에서 한국말을 하는 가족들, 할머니, 할아버지와 점점 한국말로 말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예린이를 위해 긴 여행을 준비했지만 매일 저를 도와주던 집사람, 그리고 집에 들어갈 때마다 팔을 벌리고 저를 반갑게 맞아주며 목에 매달리던 예린이, 갓 나온 두 개의 이빨로 제 손가락을 깨물던 예은이의 얼굴이 보고 싶어 살이 다 빠질 지경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한번 이상 두 아이의 사진을 보며 저 혼자 혼자말로 아이들과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결혼한지 11년, 제가 집사람과 아이들을 두고 많이 떨어져는 보았지만 제가 이렇게 홀로 남겨져보기는 처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떨어져 혼자가 되고 보니 저희 교회에 반년씩, 아니 1년 이상씩 떨어져 생활하고 계시는 기러기 가족들의 마음을 조금 이나마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1999년 이후 초.중.고 조기 유학 제한 조치가 해제되면서부터 시작된 장기 격리 가정을 기러기 가족으로, 한국에 혼자 남아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보내는 아빠를 기러기 아빠라 부릅니다. 처음에는 맹모 아빠, 외기러기 아빠, 자식 사랑이 지극한 펭귄 같다고 펭귄 아빠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저희 교우들 중에도 많은 가정들이 이 기러기 가족으로 또 기러기 엄마, 아빠로 살고 계십니다. 자녀들의 교육을 떠맡은 어머니들의 수고와 희생도 이해가 되고 치하를 드리게 되지만 제가 혼자 있어보니 매일 저녁, 불꺼진 방에 혼자 들어가야 하는 기러기 아빠의 마음은 더 쓸쓸할 것 같습니다.

혼자 있으니 모든 것이 불편하지만 특별히 힘든 것은 먹고 입는 것 보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손도 잡고 싶고 잠자는 아이들의 평화로운 숨소리도 듣고, 애기 냄새도 맞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크레딧 카드 회사의 광고처럼 내가 필요한 것은 밖에 나가서 사면되고 사서 먹으면 되지만 사랑하는 아내와의 따뜻한 포옹을, 사랑하는 자녀들의 맑은 웃음소리는 priceless,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소중한 것은 그래서 소중한 것입니다. 흔하지 않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심지어 아무런 변화 없이 지내던 부부나 자녀와의 관계도 오히려 이렇게 떨어져 있음으로 더 가깝게 느껴지게 됩니다. 더 보고 싶고 더 사랑해 주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픈 것, 그것이 독수공방, 혼자 방을 지켜본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더 깊은 사랑을 느끼도록 그리고 지금까지 부담 없이 누리던 평범하다고 생각하던 우리의 행복을 특별한 선물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떨어짐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은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며 살았는지 깨닫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병으로 사랑하는 부인을 먼저 떠나보낸 기독교 작가 C. S. Lewis는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겪는 이 고통은 이 이별의 고통은 우리가 누리는 행복 속에 포함되어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영원히 떠나보내고 나서야 깨닫는 사랑, 그것이 우리 인생의 한계인지 모릅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사랑하는 만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도 그 사랑에 대해 인정받지 못하고 버림받는 그 자리까지 가야하는 것이 사랑인지 모릅니다.

몇 달 전 제가 대장금을 소재로 “역시 그래, 바로 그거야” 설교를 한 후, 한아름에서 교우들을 만나면 “장금이 만나러 오셨어요?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제가 드라마를 좋아하는 것을 아시고는 교우 한 분이 예배가 끝난 후 저에게 봉투하나를 주셨습니다. 묵직한 게, 뭔가 무거운 것이 들어있었습니다. 그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두심씨가 주연한 “꽃보다 아름다워” 비디오였습니다. 그 비디오를 집사람과 같이 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살고 있는 무뚝뚝하고 고집 센 남편, 이혼하고 딸 하나와 생선가게를 하며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큰 딸, 친구와 사소한 오해로 말싸움 끝에 휘두른 친구의 주먹에 죽은 큰아들, 이렇게 쓰러진 가정을 다시 회복해야하는 사명으로 온 가족의 후원을 받으며 유학까지 갔다온 둘째딸, 그 딸은 엄마와 가족의 기대를 져버리고 자기 오빠를 죽인 유부남인 사람을 사랑하고 막내아들은 억울하게 죽은 형의 원수를 갚겠다며 다니던 고등학교도 그만두고 형이 일하던 나이트 클럽에 취직해 웨이터로 되는대로 막 사는 한 문제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이 드라마가 저를 울렸습니다.

사랑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이 가족들 사이에서 묵묵히 사랑을 나누어준 엄마, 그 꽃보다 아름다운 사랑 때문에 저는 울었습니다. 남편을 빼앗아간, 자기 가정을 파괴한 그 여자의 병간호를 위해 병원에 가서 국을 끓이고 반찬을 담다가 자기가 담은 음식에 침을 뱉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속에서 자기의 행동을 후회하며 눈물 흘리는 바보. 집나간 아빠를 막 대하는 아들과 딸들에게 “너희도 아버지랑 똑같아, 아버지가 그랬다고 너희도 그러면 똑같은 사람이 아니냐”고 말하는 바보. 콩팥을 이식하지 않으면 죽게 된 자기 남편의 여자를 위해 콩팥을 주기로 한 바보. 그래서 자녀들이 “엄마 미쳤어! 어떻게 그 여자에게 엄마 콩팥을 떼어 줘, 엄마 미쳤지! 그 때 그래! 엄마 미쳤어, 달라는데 어떻게 안 줘, 나는 달라는 거 다 줄 거야. 콩팥이고 간이고 눈이고 뭐든지 달라는 거 다 줄 꺼야! 그렇게 말하는 바보.

다른 사람들에게, 가족들에게, 심지어 자기의 원수에게까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어버린 이 바보엄마는 마지막에 자기가 사는 집도 찾지 못하고 자기가 사랑했던 자식들도 못 알아보는 치매에 걸립니다. 바보처럼 남을 위해 사느라 자기는 가슴에 상처투성이로 가슴이 너무 아파 가슴이 다 죽어버린 껍데기만 남아 나이 육십이 되기도 전에 자기집도 찾아오지 못하고 자기가 그렇게 사랑했던 자식들도 못 알아보는 진짜 바보가 됩니다. 그런데 그때, 엄마를 바보라고 하던 자녀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옵니다.

아무 것도 기억 못하는 엄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거야. 꽂을 좋아하던 엄마,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자녀들로부터 한번도 꽃을 받아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희생만 하고 살았던 엄마는 이제야 자기가 원하던 기쁨과 평화를 느끼고 있는 거야. 다 주고 나서... 어쩌면 우리 자식들은 전처럼 우리에게 밥해주는 엄마, 빨래 해주는 엄마를 순간 순간 그리워하고 아픈 엄마를 다시 귀찮아 할 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한가지는 어머니, 당신이 있어서 행복한 인생이었습니다.

바보 같이 다 주는 사랑, 그 사랑이 변화를 일으킵니다. 바보 같은 사랑만이 사람을 살립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이 바보 같은 사랑에 사람들이 목숨을 걸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받기 위해 그리고 그런 사랑을 하기 위해 우리는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께 고용 씨를 소개합니다. 고용씨는 2002년부터 저희교회에 출석하셨습니다. 한국에서 국무총리실 국장으로 일하셨고 이곳 버지니아에 오셔서는 World Bank에 근무하시다 이번에 다시 국무총리실에 발령을 받으셔서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시게 됩니다. 지금 위스컨신 대에 재학중인 아들 길현군과 나누신 사랑의 경험을 나누어주시겠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 97년 당신을 영접한 후에도 저의 마음속에는 겉과 속 사람이 같이 있어 더욱 심한 고통과 방황의 시간들이었습니다. 특히, 세상의 아버지들처럼 저도 우리 아이들을 제 생명처럼 여겼음에도 당신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만의 사랑, 아니 실제로는 나의 기준에 맞춘 판단과 욕심으로 그 소중한 아이들을 깊은 상처투성이로 만들어 버린 채, 사랑의 열매는 맺히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저는 더욱 열심히 일에 매달려도 보았고 그래서 세상에서 좋은 평가와 인정도 받아보았지만 제 삶은 더욱 공허하고 텅 빈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세상이 보는 기준으로 저의 겉 사람은 여전히 제 자신을 괜찮은 사람, Something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작년 2002년 그 추운 겨울 주님을 직접 만나고 싶어서 먼저 유학 와 있던 상처투성이 아들 곁으로 왔습니다. 여전히 그저 쉽게, 주님 부활하신 후 주님이 다시 사신 것을 의심하던 도마의 심정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려고 말입니다.

1년이 지났지만 주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저의 마음과는 달리 주님은 저를 만나주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어하면 할수록 주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아이들과의 관계와 일로부터 오는 공허함, 열매가 없는 생활 때문에 저의 고통은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 보다 더 심해졌습니다. 마침내 위스컨신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 길현이와 보름정도 소식이 완전히 끊기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저에게는 말 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이 아이에게 반신반의하면서 자동차를 주어 보냈던 터라 오직 주님께만 온전히 의지하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되어서야 “나를 닮아야만 하는 내 아들,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성적을 내서 빨리 좋은 법대를 들어가게 해야지”하는 나의 겉 사람의 바램은 온데간데 없어지게 되었고 오히려 주님, 우리 아들, 살아있게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저의 생명처럼 아끼는 아들에게 단 한가지 바라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공부 잘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법대에 가는 것도 아니었으며 단지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그 하나인 것을 그 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지금까지도 저의 가장 귀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야 당신께서는 “너는 나를 몰라, 너는 나를 모른다고” 하시면서 불쌍한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예상치 못한 말씀이었고 오히려 제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 때문에 더욱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제게 그 이후 길현이를 직접 만나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기다림의 고통 속에서 주님께서 저희 길현이를 보호하시다가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발 살아 있게만 해달라는 저의 기도는 들어주셨지만 이미 엉켜버린 아들과의 관계는 하나도 좋아지지 않았고 저와의 만남은 아무 진전도 없이 오히려 지난 시간 아픔과 고통으로 자기의 속마음을 내놓지 않고 등을 돌리고 떠나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저는 2004년 사순절을 텅 빈 가슴으로 맞게 되었습니다.

조 목사님의 권면으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게 되었고 사순절 기간동안 새벽기도, 그리고 수요 나눔, sharing을 통해 당신은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사순절이 30일정도 지났을 때 책과 말씀을 통해 내가 이제 보니 아무 것도 아니구나(I'm nothing) 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겉만을 바라보던 제 마음속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아무 것도 아닌 제가 저의 생명과도 같은 길현이와 어떻게 하면 관계를 회복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하고 반 항의 조로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저에게 섬기라고 (serve)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2003년에 너는 나를 모른다는 그 말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엉뚱한 주님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섬기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외에는 이미 주님께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I'm nothing) 고백하고 인정한 저에게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의 근무가 2005년 끝나고 다시 한국 정부로 돌아가도록 예정되어있었기 때문에 사순절 이후 남은 기간 중 기회가 되는대로, 아니 만사를 제쳐놓고 살아있는 제 아들이 그저 보고 싶고 이야기가 듣고 싶어 아들이 살고 있는 위스컨신으로 달려갔습니다.

제가 아들의 입장이 되었더라도 저 같은 아버지가 싫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비행기를 타고 갈 때는 혹시 이 애가 공항에 안나오면 어떻게 하나... 차를 운전해서 갈 때는 이 녀석이 아빠 보기 싫다고 자기 아파트에서 나오지 않거나 다른데 가있으면 어쩌나, 그렇게 멀리 가서 보고 싶은 얼굴도 못보고 오면 어쩌나 가슴을 졸이고 걱정을 하며 갔습니다. 그러나 길현이는 아빠의 의심하는 마음과는 정 반대로 언제나 공항에 나왔고 언제나 아파트에 있어주어 의심 많은 도마 같은 저를 한없이 부끄럽게, 그리고 한없이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기쁘게 만나면서 조금씩 상처받은 아들의 마음은 열려갔지만 돌아오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뒤를 보면 아들은 그저 잘 가세요 하는 몸짓으로 돌아섰습니다. 제가, 아빠가 이렇게 또 혼자 돌아가는 것에 대해 아들은 그다지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제 마음 한 구석에는 섭섭한 심정으로 “ 녀석, 저는 뭐 잘 한 게 있다고!”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섬기라, 하신 주님의 말씀 속에는 이처럼 저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고통도 함께 들어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고도 가끔씩 전혀 소식을 주지 않는 아들 때문에 애가 탔지만 아들을 믿고 기도 할 수밖에 다른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7월초에 한국정부로부터 8월에 조기 복귀하라는 예상치 못한 소식을 받았습니다. 이 일도 저는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한창 섬머 학기(summer-term)중인 아들을 보고 귀국하고 싶어서 7월 하순에 위스컨신으로 갔었고 그때 아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아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날 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물위로 걷는 것을 본 베드로가 자기도 물위로 걷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구절이었습니다. 물 속으로 빠져 가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책망하셨습니다. 아들과의 관계는 이미 주님께 맡겼고 아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벌써 고백했음에도 계속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의심한 저에게 주님은 다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심하지 말고 나를 믿어라. 그 날 돌아서는 저의 등뒤로 울고 있는 제 아들의 눈을 처음으로 보게되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기대하고 소망하던 내 사랑하는 아들이 내가 한국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이제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 기약이 없는 이 이별 앞에 눈물을 흘리며 저를 보내주었습니다.

주님께서 “너는 나를 모른다”고 하신 말씀을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네가 알 수 없을 만큼 이해 할 수 없는 수준인 것을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제가 제 아들을 사랑하는 것 보다 더 길현이를 사랑하고 계셨고 또 저보다 더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제 아이 이곳에, 주님께 맡기고 갑니다, 오히려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믿음이 없는 이 불쌍한 저를 용서하시고 당신 앞에 끝까지 성실하게 설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제 시작되는 저의 앞 길이 힘들고 험해도 주님만 따라가겠습니다. 아멘.

낮 12시, 뜨거운 한 낮, 지중해의 태양 빛을 받으며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등에 지고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한 사람이 골고다(Golgotha), 해골산을 향해 올라갑니다. 타는 갈증으로 이 사람의 목은 이미 혀까지 달라붙을 정도였지만 맞은 채찍의 고통 속에 머리에 씌어진 가시관 때문에 더욱 타들어 갔지만 그와 함께 소리를 지르며 가고있는 사람들은 이제 잠시 후에 벌어질 이 사람의 처형장면을 보게 될 흥분으로 이 사람이 느끼는 목마름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온 몸의 피가 서서히 빠져나가면서 숨을 못 쉬게 되고 마침내 숨이 막혀 죽게되는, 로마사람들이 반란자를 처형 할 때 쓰던 이 십자가. 이 십자가 처형의 끝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그 시체를 나무에 그대로 방치함으로 공중의 새와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는 사체 훼손에 더 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밑에는 개들이 모여들었고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의 몸은 이 땅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는 가장 처참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이 사람을 향해 외쳤습니다. 바보 예수! 남 살리는 것 그만두고 이제 네 목숨이나 구해봐! 네가 왕이라며... 어서,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런데 이 소리가 2000년 전 골고다 해골산에서만 들린 것이 아니고, 그때 그 군중들이 외쳤던 소리가 우리의 입을 통해서도 때때로 들을 수있는 것을 다 알면서도 바보 예수는 바보가 되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때로 거짓말하고 속이는 것을 다 알면서도 모른 척 속아넘어가 주고 믿어 주게 될 때 아빠 엄마는 바보라고 생각하게 되는 그 때까지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화가 나고 억울한 마음이 들어도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 품에 있는 아이들을 살리려고 우리들도 노력하지 않습니까?

부모가 바보가 되어야 자녀를 진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 살아만 있어다오...우리의 생각이나 계획이나 우리의 뜻이 아닌 자녀들이 진정 행복해 질 수있는 길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바보가 되기로 작정해야합니다. 그때, 아이들은 아빠가, 엄마가 바보가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때 자녀들은 부모가 바보가 된 것을 알게 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바보가 되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랑이 우리를 바보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바보가 되신 예수님, 예수님의 사랑은 바로 그런 바보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 23장 34절이 바로 기러기 가족 되신 아니, 기러기 아빠 되신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찾으시는 십자가 위에서 찾으시는 , 불꺼진 우리 마음의 방에 찾아오신 주님의 마음입니다.

“너는 나를 모른다 너희들은 나를 아직 몰라.” “내가 얼마나 너희를 사랑하는지 너희는 몰라.”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보가 되는 만큼 그 사랑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똑똑함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바보가 되기로 결정하는 만큼 알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이 바보가 되어야했는지 압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 우리 인생들이 바보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빠의 사랑도 몰라보는, 아니 오히려 자기 엄마, 아빠의 사랑이 귀찮다고,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는, 그러면서도 우리의 생각이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바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보처럼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보가 되기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흙으로 만드신,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말씀으로 이 세상을 지금도 붙들고 계신 능력의 하나님, 보리떡 다섯개과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시고 볼 수 없는 사람을 보게 하시고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전혀 바보가 아니고 온전한 정신이신 하나님이 바보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능력 많은 하나님을 더 좋아합니다. 우리 인생의 많은 문제의 홍해를 가르고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힘센 하나님을 더 좋아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언제나, 즉시 응답하시는 마음씨 좋고 인정 많으신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처럼 비참하게 온 몸이 다 드러난 채로 다른 사람들의 조롱과 모욕을 받으며 힘없이 죽어간 그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에 드시려고 바보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박수를 받으려고 바보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정을 받으려고 바보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죽어야 알기 때문에,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바보가 되셨습니다. 죽어야 삽니다. 살려고 하면 죽습니다. 바보가 되어야합니다.

왜 날 사랑하나 라는 제목의 찬송이 있습니다.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손과 발 날 위해 찢기셨네 왜 날 사랑하나?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왜 그러셨습니까? 왜 주님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까? 왜 주님은 손과 발을 찢기며 고통을 당하며 십자가에서 바보가 되셔야 했습니까?

분명한 한가지는 예수님, 당신이 있어서 우리의 인생 행복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바보 사랑이 저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바보사랑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 사랑을 이해하십니까? 여러분 뭐라고 주님께 말하겠습니까? 언제까지 왜 그러셨냐고 물어보시겠습니까. 사랑하니까 그러셨지요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살리려고 그러셨지요. 이제 집으로 돌아와 이제는 바보가 되신 주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자녀들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을 이 시간 십자가 앞으로 초대합니다. 특별히 부모님들을, 부부들을 초대합니다. 바보처럼 사랑하는 것 밖에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없는 것을 우리의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로 실천하기로 작정하시는 분들, 자녀를 그렇게 사랑하기로 작정하시는 분들을 주의 제단으로 초대합니다. 나도 우리의 가정에서 사랑의 바보가 되겠습니다. 나도 우리 교회에서 사랑의 바보가 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손해보더라도 주님의 사랑을 전하겠습니다. 마음에 감동되시는 분들을 주의 제단으로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