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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8.1. 조영진 목사

"주님께서 오신 것은"

요한복음 10:7-10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 이란 어떤 것입니까?
나는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까?
참으로 주님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은 전교우 수양회 관계로 교우들이 VA연회 수양관과 이곳에서 나뉘어져 예배드리기 때문에 야고보서 연속설교를 잠시 쉬고 다른 본문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워싱톤 문인회 회원이시며 중앙일보에 좋은 글을 써주시는 이신혜 님께서 작년 12월 기고하신 글입니다. 글 제목이 “빌리네 가족”인데 요약해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빌리네는 필자께서 전에 사시던 아파트의 이웃 사촌이었습니다. 가장인 빌리는 손재주가 좋아서 여러 가지 고장난 것을 잘 고쳤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빌리의 손재주를 알게 되어서 집안에 수리할 일이 생기면 부탁하다가 보니 가끔 중국음식점도 같이 갈 정도로 그 가족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가깝게 지내면 지낼수록 미스터리가 있었습니다.

빌리네 가족은 빌리와 그의 아내 제시카 그리고 제시카의 전 남편에게서 태어난 두 아이로 구성된 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두사람 다 직장이 없는데도 씀씀이는 재벌 2세 못지 않았습니다. 냉장고는 철따라 각종 먹거리로 넘쳐났고 아이들은 늘 주머니에 지폐를 넣고 다녔습니다. 걸핏하면 외식이다 쇼핑이다 해서 온 식구가 밖으로 나들이를 다녔는데, 그들 중 누구도 일을 나가기 위하여 아침 일찍 파킹랏으로 걸어가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은 날이면 식구대로 응접실의 대형 TV앞에 세월없이 앉아있거나 포커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새벽같이 나가서 뛰어 다녀도 늘 빌빌거리는데(Bill 때문에) 저집은 참 재주좋은 집안이라고 생각하던 중 그 의문을 풀 기회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빌리네가 놀고 먹는 그 비법을 슬쩍 물었더니 빌리는 껄껄 웃으며 자기의 이마를 가리켰습니다. 앞머리를 들추니까 송충이 처럼 징그러운 흉터가 나타났습니다. 그 흉터는 총알이 스쳐간 자리였습니다. 수년 전 직업 군인 상사로 근무할 때 훈련 중 부하 사병의 실수로 머리 부분에 총을 맞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주 위험한 부위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아슬아슬한 수술을 성공리에 끝내고도 그 상처를 이마 꼭대기에 새기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총알이 스쳐간 곳이 뇌 부근이므로 안심할 수가 없었고, 한달에도 몇번씩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체크를 받아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그 부상의 댓가로 정부로부터 매달 넉넉히 생활비와 연금을 받고있는데, 이 연금은 지구를 떠날 때까지 유효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빌리와 그 가족의 긴 휴가가 시작되었습니다. 휴가철이면 온 식구가 대형밴에 가재도구를 싣고 장기간의 휴가를 떠나고, 외식하고, 극장가고 쇼핑하는 것이 그들 가족이 하는 일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원더플 라이프에 대해 지불하는 댓가는 심각했습니다. 온 가족이 하나같이 비만으로 무거운 몸을 펭귄처럼 뒤뚱거리면서 끌고 다녔습니다. 운동 부족이라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운동기구를 사들이고 다이어트에 관한 책자들이 집안 여기 저기 뒹굴어 다녔지만, 좀처럼 불어난 체중들은 줄지 않았습니다. 점차 정신도 황폐해졌습니다. 좀 더 화끈한 이벤트를 찾게 되었습니다. Direct Mail을 뒤적이기도 하고, 새로 나온 Video Tape을 잔뜩 쌓아 놓고 TV 화면을 혹사하기도 했습니다. 컴퓨터 게임을 정신을 빼앗긴 아이들은 공부하고는 담을 쌓았고, 이런 아이들을 향한 제시카의 악다구리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남들처럼 주말과 공휴일에 대한 기대가 없는 이 가족은 어느날 훌쩍 이사를 가버렸습니다. 이신혜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칼럼을 끝맺고 있습니다. 첫 번째의 총알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소리없이 다가온 풍요의 총탄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만 빌리와 그의 가족들, 그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귀한 삶을 소비하고 있을까? 무엇으로 그 황폐한 영혼들을 달래고 있을까?

여러분, 팔자 좋은 사람들 아닙니까? 먹을 것, 입을 것, 놀 것 보장된 인생 아닙니까?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생은 먹고, 입고, 즐기는 것 이상으로 무엇이 있습니까?

I.

오늘 요한복음서의 본문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다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외치셨습니다.

요한복음서 속에서 전체를 관통하는 Key Word를 뽑으라면 많은 성서학자들은 “생명” 혹은 “영생”을 꼽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긴히 연결되는 어휘입니다. 여러분, 생명이 무엇입니까? 살아있다는 사실은 바로 생명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 아닙니까? 이 생명 외에 또 다른 생명이 필요합니까? 그 생명은 어떤 것이고, 또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단순히 살아있는 생존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목숨이 붙어있고 숨을 쉰다고 다 생명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삶입니다. 보람과 의미, 인내와 소망으로 채워지는 풍성한 삶입니다. 인간이 쟁취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힘으로도, 능력으로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 생명을 약속하셨고, 오늘도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II.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인생의 모습이 과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입니까?

(1) 무엇보다도 먼저 생명은 삶을 알고 살아갑니다.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와 같은 삶의 궁극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안고 살아갑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배워야 할 것,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근원적이고 중요한 것은 인생을 아는 것입니다. 내 삶을 아는 것입니다. 왜 사는 지도 모르는 인생 과연 생명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음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생명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혹 여러분께서는 그런 질문은 쉽게 해답을 찾기 어렵다고 말씀하실 지 모릅니다. 어쩌면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라고 말씀하실 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해답을 갖고 살아갑니다. 모른다면 모른다는 것이 그 사람에게는 해답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궁극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이 바로 신앙입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해답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보다 내가 어떤 해답, 어떤 믿음을 선택하고, 믿고, 살아가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해답을 아셨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안고 살아 가셨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으신다면 불가지론, 알 수 없다는 해답으로 족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면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해답을 찾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믿지 못하거나, 믿기를 싫어하는데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불후의 영성서적을 쓴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주여, 내가 알아야 할 것을 알게 하시고
내가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시며
당신을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을 찬양하게 하시고
당신이 보시기에 값진 것을 가치있게 생각하게 하시고
당신께 거슬리는 일을 미워하게 하소서

내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게 하지 않게 하시고
무지한 인간의 귀에 들리는 대로 말하지 말게 하시고
눈에 보이는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서 참된 판단을
분별있게 내리도록 하시며
무엇보다도 항상 당신의 뜻에 무엇이 정말로 즐거운 것인가를 묻게 하소서

(2) 둘째로 생명은 혼자서만 누리는 삶이 아닙니다. 이웃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삶의 폭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영광을 누리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근본 하나님과 같은 본체를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영광을 버리고 주님은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의 허물, 우리의 연약함,우리의 배반을 온 가슴으로 품으셨습니다. 진정한 생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참 생명은 이웃을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혼자만을 위한 인생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한자에서 사람을 뜻하는 “人”자는 한 획이 아닙니다. 두 획이 서로 기대므로 “人”자를 이루었습니다. 인생은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웃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사람다운 삶입니다. 이기주의 감옥에서 탈출하지 않는 한 우리는 참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후, 이어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이웃을 가슴에 품습니다. 이웃의 눈물, 이웃의 아픔, 이웃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그 사랑, 그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이 추운 겨울날 길에서 떨고있는 한 걸인 소녀를 보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고 답답함을 느낀 이분은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하나님, 왜 이같은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이같이 어려운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뭣하고 계십니까?”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그 걸인 소녀를 돕기 위해서 분명히 행동하였느니라. 내가 너를 지었느니라.”

(3) 셋째로 생명은 죽음을 정복합니다. 죽음의 사슬을 끊고 영원을 살아갑니다. 죽음이 가져다 주는 불안과 공포를 넘어섭니다.

우리 생명의 가장 큰 대적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속수무책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는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 너머의 세계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가지 않고, 땅 위에서 삶을 연장해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피한다고 정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피하면 어느 순간에 다시 찾아와 우리와 맞서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길은 피하고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영원 속에 묻어 버리는데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서면 죽음은 사라져 버립니다. 더 이상 죽음에 대한 불안, 두려움에 매이지 않습니다. 죽음은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관문일 뿐입니다. 죽음의 사슬은 꺾이고, 우리는 생명이 안겨주는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생명, 죽음을 정복하는 이 풍성한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를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지만, 다시 사심으로 죄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죽음에 매여 끝난 인생이 아니라, 죽음을 정복한 승리의 생명을 보여 주셨고, 이 생명의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이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생명이십니다. 오늘도 참 생명이십니다. 이 부활에 담겨진 생명의 승리를 체험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5 이하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는냐? ...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III.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해 내는 열매가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오늘도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모습에 주저앉아 있는 한 우리는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방향을 돌이켜,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올 때 생명의 세계는 열려집니다.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생 속에 모셔들일 때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길을 찾아서 살아갑니다. 이웃을 가슴에 품는 폭을 지니고 살아가게 됩니다. 영원에 동참하는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생명의 길은 21세기, 이곳 워싱턴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드리면 우리도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길 되신 주님, 생명 되신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새날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고백을 소개해 드리며 제 설교를 줄입니다.

“좋다! 나는 지금 정부의 국채를 6000주나 가졌고, 300필의 말을 갖고 있다.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서 공부시키는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모두가 백성들의 번영을 말하고 있는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내가 만일 Gogel이나 Pushkin, Shakespeare 같은 작가들 아니 그들보다 더 유명해 진다고 한들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무엇을 하던 나의 행동은 어느 땐가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요, 나의 날의 조각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분주하게 살려고 뛰어 다닐 필요는 없지 않는가?

왜 나는 살아야 하는가? 내가 바랄 것은 무엇이며, 또 바랄 필요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매일 움직일 필요는 어디 있는가? 인생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불가피한 죽음으로부터 모면할 그 무엇이 있는가?" 삶의 깊은 회의 속에서 톨스토이는 자살을 생각했지만, 그것마저 겸행할 수 없는 유약한 자신임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허무 속에서 방황하던 톨스토이는 이성으로 진단한 이런 삶의 현실에서 신앙의 세계로 걸음을 옮겨 놓습니다. 그는 “신앙이란 인생의 의미에 관한 지식으로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지 않고 살게 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이 신앙 안에서 인생의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결론을 발견하고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못할 때, 나는 사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하나님을 찾으려는 희미한 소망이 없었던들 나는 벌써 오래 전에 내 자신을 없애 버렸을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탐구할 때에만 우리는 참으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