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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7.18. 믿음은 삶입니다(11)-조영진 목사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야고보서 4:11-12
성경은 교회안에서 서로 헐뜯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서로 헐뜯는 삶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아픔을 주고 주님의 명령을 져버림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감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말 속에 과연 주님께서 살아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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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청년들을 지도할 때입니다. 두 그룹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앉아서 게임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게임은 한사람의 귀에 몇 마디 이야기를 한 후, 그대로 다음 사람의 귀에다 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절대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듣지 못하게 속삭여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철수가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을 길에서 만나서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너무 기분 좋았다.” 이 이야기를 옆에 사람에게 전해 주는 게임이었습니다. 승패는 어느 그룹이 빨리 또 정확하게 메시지를 전했느냐로 판가름 되었습니다.그런데 이 이야기가 여러 사람의 귀를 거쳐서 마지막 사람에 이르게 되니까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원래의 이야기에서 빠진 부분도 있고 또 보태진 부분도 생겨났습니다. 짧은 이야기인데도 사람들이 자기 주관, 자기 이해에 따라 듣다 보니까 많이 달라져 있음을 발견하면서, 바로 전하는 일의 어려움을 느껴 본 적이 있습니다.
믿음은 삶임을 강조하는 야고보서 연속설교의 열한번째 주일입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사는 인생, 믿음을 구체적으로 생활 속에 적용하는 인생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주제 역시 언어 생활과 연관된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을 하나님 앞에서 바로 다스려 가는 삶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I.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사도 야고보는 흩어져 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합니다. 아니 21세기 워싱턴에서 사는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자기 형제 자매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율법을 심판하는 것입니다(4:11a)."
여러분,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각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또 교회의 모습도 초대교회나 오늘 현대 교회나 변함없이 보여지는 문제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우들간의 질투와 시기 그리고 서를 헐뜯고 비방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야고보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때 교회는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았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있는 역사들이 여기 저기서 힘있게 나타날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안에서는 서로 비방하고 헐뜯는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야고보가 이런 편지를 쓰지 않았겠습니까? 서로 헐뜯고 심판하지 말라고 권고하지 않았겠습니까? 헐뜯음의 역사란 참으로 끈질깁니다. 참으로 요지부동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헐뜯다”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역 성경은 “비방”이란 단어를 썼고, 저희들이 사용하는 표준새번역 개정판은 “헐뜯다”라는 말로 옮겨 놓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본인이 그 자리에 없어서 자기 변호를 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 성경은 “slander” 혹은 “speak evil against”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욕하는 것입니다. 비방하고 중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같은 비방, 헐뜯음을 심각히 다루고 있습니다. 시편 101:5은 “숨어서 이웃을 헐뜯는 자는 침묵하게 만들고 눈이 높고 마음이 오만한 자는 그대로 두지 않으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침묵하게 만들고”란 부분은 “내가 멸하여 버리고” 혹은 “내가 없애 버리고”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또 로마서 1:30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죄악된 모습의 하나로 수군거리고 중상하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서로를 중상하고 모함하고 헐뜯는 일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일 정도로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운 교회 안에서 이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하고 다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왜 이 문제가 심각합니까? 왜 서로가 헐뜯는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까?
II.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물음에 대하여 대답하고 있습니다. 서로 헐뜯는 이일이 왜 문제가 되는지, 왜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는 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1) 먼저 서로 헐뜯는 일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안겨줍니다.
유대인들의 지혜를 모은 탈무드를 보면 남을 헐뜯는 것은 살인보다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살인은 한사람만 죽이지만 중상은 반드시 세 사람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 사람은 바로 남을 헐뜯는 사람 자신과, 헐뜯는 대상이 된 사람, 그리고 이 중상을 듣는 사람입니다. 또 탈무드는 중상하는 사람은 무기를 사용해서 상처를 입히는 사람보다 죄가 더 무겁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무기는 가까이 있는 사람을 다치게 하지만, 헐뜯는 것은 멀리에 있는 사람에게도 상처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Pierre Van Paassen이 쓴 우리의 날(The Day of Our Years)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마을에 Ugolin과 Solange이란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술주정뱅이었고 아버지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오빠가 병으로 고생하자 약값을 마련할 길이 없는 누이동생은 결국 몸을 팔아서 오빠의 약값을 대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동네 사람들은 수군대며 험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견디다 못해서 오빠는 물에 빠져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오빠의 자살 소식을 들은 여동생은 결국은 총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남매의 장례식이 있는 날 조그만 교회는 동네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목사님은 장례예배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생과 사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께서 심판의 날 제게 양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제게 양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역시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세 번째로 양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주님 그들은 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늑대들이었습니다.” 형제와 자매를 헐뜯는 사람들이 양인지 늑대인지는 여러분께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2) 둘째로 상대방을 헐뜯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는 것이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4:11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자기 형제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율법을 심판하면 그대는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인간관계에 대하여 분명히 주신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은 바로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레위기 19:8, 마태복음 22:39). 그런데 사랑하지 않는 것, 아니 사랑하기는커녕 이웃을 비방하고 헐뜯는 이 일은 주님께서 주신 이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일은 하나님의 법을 위반할 뿐 아니라 한걸음 나아가 율법을 헐뜯고 심판한다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이 율법을 우습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법보다 헐뜯는 자신의 행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분명하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지 모릅니다. 헐뜯으면서도 마음 한쪽으로는 가책과 부담을 느낄 지 모릅니다. 그러나 헐뜯는 일은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10계명의 아홉번째 계명, 또 예수님께서 주신 가장 큰 계명을 범하는 것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럴수도 있지 하면서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사람 살면서 gassip 할 수도 있지 할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자신이 판단하고 어기는 것이라고. 물론 명시적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헐뜯는 일의 밑바닥에 내려가 보면 분명히 하나님의 법을 우습게 여기고 그 법을 자신이 판단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언론의 자유를 제약하는 일이 아닙니다. 입이 있는 것은 아무렇게나 사용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이 덕을 세우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여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사도 야고보는 혀를 바로 쓰는 일, 진실한 언어 생활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3) 한가지 더 본문 말씀이 지적하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 헐뜯는 일은 하나님의 법을 우습게 여기고 판단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4:12을 보십시다: “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심판하시는 분은 한분이십니다. 그는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합니까?”
여러분, 무슨 말씀입니까? 형제나 자매를 헐뜯고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정하고 심판하는 일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또 사람을 심판하는 일도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사람을 judge, 심판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헐뜯는 일은 사람을 심판하는 일입니다. 이 행위는 바로 인생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일을 인간이 가로채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을 “도대체 그대가 누구기에 이웃을 심판합니까?”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다른 말을 덧붙이면, 당신이 하나님이란 말입니까? 당신이 무슨 권위로 형제와 자매를 판단하고 헐뜯습니까?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 가운데는 그럼 건강한 비판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질문을 갖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건강한 비판을 금하지 않습니다. 다만 judge, 심판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헐뜯는다”는 말의 의미를 저는 앞에서 본인이 없어서 변호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헐뜯고 중상하는 것임을 말씀 드렸습니다.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 그분만이 율법을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생명을 살리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형제와 자매를 헐뜯는 일은 율법의 명령을 어기는 것입니다. 율법보다 자기 생각, 자기 판단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가볍게 여기는 불순종의 행동입니다.
III.
사도 야고보는 형제와 자매를 헐뜯는 일을 있을 수 있는 일도 넘기지 않습니다. 이 일의 죄악성을 깊이 있게 파헤쳐서 도전을 합니다. 헐뜯는 일은 사람의 생명에 상처를 주며 하나님의 법을 어길 뿐 아니라, 그 법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침범합니다.
이러한 분석과 도전은 오늘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우리의 삶속에서 무슨 의미, 무슨 능력을 갖습니까? 한마디로 말씀 드리면,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 가는 최고의 권위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에 두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만, 나는 내 생각대로 살겠다는 사람,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여러분, 내 생각보다 권위없는 하나님이시라면, 그런 하나님을 믿어서 뭐 하시렵니까? 그런 하나님이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셨기에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믿고 인생을 거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말씀과 법에 대한 존중과 순종은 우리의 언어 생활에서도 고백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말 속에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야고보는 거듭해서 우리 모두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서로 헐뜯지 말라고. 사랑의 언어를 말하며 살라고. 생명을 살리는 언어와 삶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소개하며 제 설교를 줄입니다. 이 이야기는 L.A.에 계신 조명환 목사께서 쓰신 어머니 내겐 힛트곡이 없어요라는 책에 나옵니다.
몇 년 전 하와이에서 발행되는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Honolulu Advertiser)’란 신문에는 감동적인 한국인 스토리 하나가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프랜시스 김이라는 이 한국 분은 31살의 나이로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한 샤핑몰에서 Family Shoeport란 신발가게를 운영하고 있던 분입니다.
어느 날 오후 그 가게에 27살 먹은 한 청년이 신발을 사러 들어왔습니다. 105불 짜리 나이키(Nike Top Flight) 농구화를 사겠다고 신발을 신어보고는 다른 신발도 신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다른 신발을 찾으러 자리를 옮긴 순간 그 신어본 신발을 신고 그대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한때 운동 선수였던 Mr. Kim은 이 절도범을 뒤쫓아 달려나갔습니다. 붐비는 4차선 Highway를 건너서, Highway 중간 분리대에서 범인을 붙잡았습니다. 치고 받는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부인은 경찰에 신고했고, 곧바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이 범인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범인은 절도 혐의로 체포되었고 또 다른 범죄와 연루된 2급 강도 용의자로도 수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범죄가 인정되면 그는 적어도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게 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Mr. Kim은 경찰서로 이 범인을 면회 갔습니다. 그는 범인에게 “신발 한 켤레 때문에 인생을 망칠 테냐? 안 그러면 신발값을 벌기 위해 내 집에서 일하겠느냐? 선택하라!”고 제의했습니다. 범인은 단숨에 일하겠다고 했습니다. Mr. Kim의 행동에 경찰도 놀랐습니다. Mr. Kim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범인은 직업이 없었고 정말 그 나이키 신발을 신고 싶어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말하기를 감방은 당신의 인생을 더 비참하게 만들 것이요, 만약 당신이 한번 정직하게 살아보겠다 결심하고 나와 약속해 준다면 난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Mr. Kim은 경찰서에서 풀려난 그 범인을 데리고 자기 가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신고 싶어하던 새 나이키 농구화 한 켤레를 그냥 주었습니다. 그 범인은 Mrs. Kim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자기를 경찰서에서 빼내준 이 동양인이 너무 고마워서 Mr. Kim에게 자기 집에 가서 가족들을 소개해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Mr. Kim은 그를 옆에 태우고 범인의 집에 갔습니다. 병든 어머니와 자매들과 매형들이 있었습니다. Mr. Kim은 그 동안 벌어진 일들을 다 말하지 말고 그냥 내가 당신을 고용해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고만 소개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이튿날부터 그 범인은 Mr. Kim과 더불어 주인과 가게 점원의 관계가 되어 함께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범인과 피해자가 아니고 직장의 고용주와 고용인으로 자유인이 되어 일하게 된 것입니다. 신문기자에게 Mr. Kim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신발 한 켤레 때문에 한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어차피 그가 감방에서 나오면 그는 또 도둑질을 해서 살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멋있는 말 아닙니까? 생명을 살리는 말이 아닙니까? 이런 말하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혀와 입술을 주신 것 아닙니까? “형제 자매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서로 사랑의 언어를 말하십시오. 서로 용서의 언어를 말하십시오. 서로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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