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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7.11. 믿음은 삶입니다(10)-조영진 목사

"육신의 욕심을 넘어서"

야고보서 4:1-10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욕심을 넘어서야 합니다.
욕심에 매인 인생이 가져오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육신의 욕심을 넘어설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이 왜 중요합니까?

지난 두 주일을 우리는 새로 파송 받으신 목회자들을 환영하는 주일로 지켰습니다. 구 목사님, 최지훈 전도사께서 귀한 말씀들을 전해 주셔서 저 역시 마음 뿌듯하고 감사했습니다. 이제 다시 야고보서 연속설교로 돌아오겠습니다. 오늘이 금번 연속설교의 열번째 주일인데, 앞으로 네 주일 정도는 더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은 삶입니다” 라는 주제가 말해주는 것처럼 행함이 있는 믿음,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고백되는 행동하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동안 살펴 본 말씀 속에서 사도 야고보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의 언어생활, 입술과 혀에서도 고백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상의 지혜와는 다른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지혜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주님께 구하면,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과 행함이 따로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야고보입니다만, 행함을 가능케 하는 근본, 마음, 속사람의 중요성도 그는 잊지 않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을 수 없고,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없음과 같이 행함은 바로 그 사람의 마음, 내적 자아의 표현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언어생활을 위해서는 바로 우리의 마음, 내면의 사람이 경건해야 합니다. 짠샘이 단물을 낼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마음에 쌓아놓은 것을 언어로 말할 뿐입니다. 마음에 선을 쌓아 놓은 사람은 선한 말을 하게 되고, 마음에 악을 쌓아 놓은 사람은 악한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같은 내면세계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4장에서도 계속됩니다.

I.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다. 야고보서 4:1-10의 말씀을 보면 사도 야고보는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갈 때 빚어지는 인생의 모습들을 먼저 몇가지로 정리해 놓고 있습니다.

(1) 첫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이나 분쟁입니다.

4:1을 보십시다. “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는 육체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욕심에 이끌려 살면 싸우게 됩니다. 자기 욕심의 포로가 되면 앞과 뒤를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갈등과 분쟁을 낳기 마련입니다. 적게는 개인과 개인과의 갈등에서 크게는 나라와 국제 질서에도 분열과 다툼을 가져옵니다.

왜 우리 동포사회에서 가끔 속고 속이는 일들이 생겨납니까? 욕심 때문이 아닙니까? 왜 교회 안에서도 비난과 분열이 많습니까? 자신의 욕심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내세우지만 그 밑바닥에는 자기 생각, 자기 체면, 자기 욕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왜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도 대학 진학의 문제로 갈등이 생깁니까? 많은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간혹 부모님들의 지나친 욕심이 자녀들에게 불안과 초조함을 안겨주는 경우는 없습니까? 왜 부정 부패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까? 욕심 때문이 아닙니까? 왜 부부 관계에 부정과 외도의 풍랑이 밀려옵니까? 여러 가지 대답이 있겠지만, 그 밑바닥에는 욕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욕심은 싸움과 분쟁을 불러 옵니다. 욕심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깨뜨리고 아픔과 상처를 안겨줍니다. 오늘도 욕심은 우리들에게 분쟁과 아픔, 싸움과 갈등을 가져다 줍니다.

(2) 욕심은 기도생활에도 영향을 가져다 줍니다. 욕심은 기도의 본질을 흐리게 만듭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구합니다. 많은 것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과연 바로 구하고 있는지, 정말로 구할 것을 구하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4:2의 후반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데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내용을 좀 깊이 있게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이 주십시오, 주십시오 기도하는데, 그 간구의 내용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기독교와 무당종교의 기도가 갖는 근본적인 다름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Your will be done,"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기도하는 반면에 무당종교는 온통 ”My will be done," 내 뜻이 이루어지이다로 채워져 있습니다. 무당 종교가 자기 욕심, 소원 채우는데 기도의 목적이 있다면,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데 기도의 목적이 있습니다.

지난번 Masters‘ Golf 대회에서 3위에 입상한 최경주 선수는 정말 자랑스럽고 든든했습니다. 세계 골프계의 기라성같은 선수들이 출전한 이 대회에서 듬직하고 무게있는 플레이와 태도는 참으로 흐뭇하고 보기에 좋았습니다. 최경주 선수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Masters’ 대회가 끝난 후 중앙일보에 실린 기사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승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 실력만큼 할수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승에 대한 욕심, 집착을 다스릴 줄 아는 성숙한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욕심으로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내 욕망을 채우는 방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욕심이나 채워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욕심 채우려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바로 그 사람에게 불행의 씨앗을 안겨주는 것이기에 주님께서는 들어 주시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욕심에 사로잡히면 기도도 타락하게 됩니다. 진정한 기도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에도 담이 쌓이게 됩니다.

(3) 셋째로 욕심에 매여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며, 결국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상이란 하나님 없는 세상, 죄악된 세상을 뜻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가장 자유롭고, 가장 자연스러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어쩌고 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멍에를 메는 부자유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내 욕심대로 사는 삶이 가장 자유롭습니까?

여러분, 또다시 근원적인 문제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이 안계시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도 살아계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엄연히 살아계신데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생이 아니라, 참으로 부자연스러운 인생입니다. 참으로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나를 섬기는 우상숭배의 삶, 나 자신의 욕심에 매인 부자유한 인생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말씀은 욕심에 매어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4:4 이하를 보십시다:

“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셔서 질투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자신의 욕망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II.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욕심을 넘어서서 살아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욕심에 매어 살아가는 자유를 잃은 삶에서 돌아서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우리는 욕심을 넘어서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욕심에 매인 인생으로부터 참 자유를 찾을 수 있습니까?

(1)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욕망 자체를 부정하게 보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어떤 욕심은 그 자체가 악하고 추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욕심 자체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은 아닙니다. 여러분,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머리를 뽑아버릴 수야 없지 않습니까? 어떤 종교는 욕망 자체를 죄악시 해서 금욕주의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금욕주의적 경향은 있지만, 모든 욕망 자체를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욕망을 바로 다스려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 욕망을 굴레를 씌워서 바로 써야함을 가르칩니다. 이때 우리는 욕망에 매인 노예가 아니라, 욕망을 다스리는 주인의 인생, 참 자유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세상도 이 사실을 알고 대책을 세우고 있습니다. 자기 욕심대로 살지 않도록 경계선을 정해 놓았습니다. 이 경계선이 무엇입니까? 법입니다. 물론 인류역사를 보면 악법도 많았습니다만, 어쨋든 법은 사람이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요청되는 최소한의 기준이었습니다.

법의 질서가 무너질 때 어떤 결과가 오는 지를 우리는 잘압니다. 모두가 제 욕심대로 사는 세상이 가장 자유로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세상을 우리는 무법천지라고 부르는 가장 위험한 세상으로 꼽습니다. 인류는 역사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나라나 족속이 질서를 유지해 살아가는 미니멈, 최소의 규칙으로 법을 제정하고 공권력을 동원, 실시해 왔습니다. 법은 욕심대로 살려는 인생의 테두리를 정해 주는 지침이요, 질서를 지켜 나가는 경계선입니다.

운동경기를 해도 제대로, 질서있게 하려면 규칙이 있어야 하고 또 이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비즈니스를 해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야 합니다. 돈 벌겠다는 생각으로 겁없이 법을 무시하고 사업을 하면 공공의 질서를 위하여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학교 교육에서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첫 번째 교육이 법과 규칙을 지키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기에 부모님들이 적당히 법을 어기려다가 우리의 어린 자녀들의 항의를 받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어쨋든 제멋대로 살려는 삶에 주어지는 세상의 지침은 법입니다.

(3)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법을 넘어 섭니다. 세상의 법도 지켜야 하지만 우리는 이중 국적자입니다. 이 땅, 이 나라의 시민일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또 다른 질서가 있습니다. 제 욕심대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욕심을 다스리고 이기는 삶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 삶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권위가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4:7이하의 말씀은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주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욕심대로 살던 자리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귀히 여겨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욕심에 매인 인생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 인생을 살아가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하나님의 뜻을 붙들 때, 우리는 욕심의 포로로 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욕심을 넘어서서 이를 바로 다스리고 진리에 따라 살아 갈 수 있게 됩니다.

(4) 이같은 삶을 위해서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일깨워 주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성경, 기록된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떤 역사를 행하셨는지를 모르고 어떻게 21세기, 오늘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교회 문턱을 여러해 드나들었는데도 아직 성경 한번 제대로 통독하지 못하셨다면, 여러분 회개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덜 중요해서야 어떻게 그분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관심이 없어서야 어떻게 육신의 욕심을 다스리고, 욕심을 넘어서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글 한편을 나누고 싶습니다. 정장복, 김수중 두분께서 엮으신 말씀의 징검다리에 실린 것으로 제목은 “성경의 일기” 입니다.

1월 15일: 나는 한 주일을 쉬고 있다. 내 주인은 금년 초에 며칠 동안은 규칙적으로 나를 읽더니 지금은 아마도 나를 잊어버렸나 보다.
2월 2일: 대청소 날이다. 나는 다른 물건들과 함께 먼지를 털렸다. 그리고 평소의 내자리에 놓였다.
4월 2일: 나는 오늘 몹시도 초조했다. 내 주인은 기도모임 사회를 맡았는데 몇가지 인용 구절을 찾고 있었다. 그는 성경구절 하나를 찾는데도 몹시 힘들어 했다. 더구나 그 구절은 매우 찾기 쉬운 곳에 있는데도 말이다.
5월 1일: 나는 오후 내내 할머니의 무릎 위에서 지냈다. 할머니께서는 이곳에 며칠 다니러 오셨다.
5월 7일: 할머니 무릎에서 오후를 보냈다. 할머니 무릎은 얼마나 평화스러운 곳인지. 때때로 그 분은 나에게 속삭이기도 하시고 또 때로는 나를 소리내어 읽기도 하신다.
6월 3일: 누군가가 나의 책장 사이에다 꽃잎들을 여러 장 꽂아 놓았다. 꽃잎을 말리는데 내가 적합했나 보다.
7월 1일: 나는 몇가지 물건들과 함께 여행 가방 속에 넣어졌다. 내 생각에 나는 얼마 동안 집을 떠나 있게 될 것 같다.
7월 15일: 다시 집에 돌아 와서 평상시의 내 자리에 놓여졌다. 나는 오래 여행을 한 것 같다. 도대체 왜 나를 가방 속에 넣어 갔다 왔는지 모르겠다.
9월 5일: 교회에서 심방이 있는 날이다. 나는 부랴부랴 먼지를 털린 다음에 다시 내 자리에 놓였다.
10월 1일: 할머니가 또 오셨으면 좋겠다. 할머니의 무릎이 그립다.

III.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욕심을 넘어서는 삶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음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육신의 욕심을 다스리며 살아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4세기, 현재 벨기에에 해당되는 곳에 레이몬드 3세라는 왕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친동생이 구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는데, 동생은 차마 형을 사형시킬 수가 없어 감방에 가두었습니다. 이 감방의 문은 특별하게 설계되었습니다. 레이몬드 3세는 본래 식성이 좋아 뚱뚱한 사람인데, 그 몸집으로는 도저히 빠져나 올 수 없을 만큼 문을 작게 낸 것입니다. 만일 체중을 줄여서 그리로 빠져 나올 수 있으면 자유의 몸이 되게 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감방에는 날마다 맛있는 음식들이 공급되었습니다. 그것들을 먹지 말고 다이어트(식사 조절)를 했으면 틀림없이 배가 들어가 자유의 문을 통과해서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레이몬드 3세는 맛있는 음식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점점 더 뚱뚱해져 가서 감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철창의 포로가 아니라 식욕의 포로였습니다. 그는 식욕을 이길 수 없어서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욕심을 넘어서지 못하는 현대판 레이몬드 3세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자유를 잃고 있지는 않습니까? 육신의 정욕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잃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재미에 빠져서 진정한 기쁨을 잃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육신의 욕심을 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욕심에 매인 종으로 세월을 허송하고 있지는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