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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6.6. 믿음은 삶입니다(7)-조영진 목사

"믿음과 행함"

야고보서2:14-26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행함의 분리로 세상 속에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있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믿음을 바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이 분리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어느 시골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할머니 한분이 새벽기도에 나오셔서 열심히 기도하신 후 집으로 돌아가시던 길이었습니다. 지나가다 동네 무우밭에 푸릇푸릇 싱싱하게 커가는 무우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시장기를 느낀 할머니는 좌우를 살펴보아도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가장 먹음직해 보이는 무우를 뽑아서 툭툭 털어서 잡숫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밭에서 나오다가 그만 주인에게 들키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왜 남의 밭에서 무우를 도둑질하느냐고 야단을 치자 한참을 생각한 할머니는 대답했습니다: “그 무우가 당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이지요. 하나님의 것을 좀 뽑아 먹었기로서니 뭐가 그렇게 문제입니까?”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웃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할머니의 도적질을 애교로 봐 줄 수 있지 않느냐고 너그럽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실컷 기도하고 나오면서 한 일이 남의 집 무우를 뽑아서 먹은 것이라면, 기본적인 신앙 윤리에 문제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잘못되었다고,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면 될 것을 그 무우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강변까지 했으니 괘변도 그런 괘변이 없습니다.

“믿음은 삶입니다”라는 제목 밑에서 드리는 야고보서 연속설교의 일곱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 2:14-26의 말씀은 사도 야고보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도전과 일깨움을 안겨줍니다. 야고보서의 가장 핵심적인 멧세지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I.

오늘 본문 속에서 사도 야고보는 강조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소용이 없다고. 그런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바로 죽은 믿음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본문 2:14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다: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야고보는 이어서 구체적인 예를 듭니다. 여러분 가운데 있는 형제나 자매 가운데서 헐벗고 그날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라고 말만해서 되겠습니까? 그런 행동이 없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진정한 믿음은 lip service, 입술에 의한 봉사를 넘어서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죽은 믿음은 쓸모가 없습니다.

그는 믿음에 있어서 행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에 나오는 두 사람을 예로 듭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웁니다. 창세기 15:6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냥 생각이나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삶 속에서, 행함 속에서 고백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안락한 본토, 친척의 집을 떠나서 불확실해 보이는 미래에 도전했습니다. 아들을 주시겠다는 믿어지지 않는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기다렸습니다. 또 100세 되어 얻은 귀한 아들, 유일한 이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순종해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바로 그 말씀을 따르는 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둘째로 등장하는 라합도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저 믿고 생각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여리고성을 정탐하러온 이스라엘의 스파이 두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자기 집에 숨겨 주었습니다.

야고보는 이 두 예를 들면서 2:24에서 사람은 믿음 만으로가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점에 대해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킨 Martin Luther는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음을 강조한 그 전통을 이어 받은 Luther는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의 주장을 비판했습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을 모신 말구유간에 널려있는 지푸라기와 같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어쨋든 사도 야고보는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는 2장의 마지막을 이렇게 끝맺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정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입니다. 여러분, 믿음과 행함을 떼어놓을 수 있습니까? 이 둘은 서로 대치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까? 행함입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믿음과 행함은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분리시켜 놓으면 둘다 온전치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은 뿌리요, 행함은 열매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뿌리가 없으면 어떻게 열매가 맺힙니까? 뿌리와 열매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과 행함도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키는 이분법적인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은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믿음과 행함의 분리보다는 믿음의 통전성, 믿음은 행함을 포함할 때 살아있는 믿음, 온전한 믿음이 됨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적절합니다.

II.

그러나 이같은 이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생활을 살펴보면 믿음과 행함이 따로 따로 분리되어있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믿음 따로, 행함 따로 살아가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아무리 믿음과 행함은 분리 할 수 없다고, 하나라고 강조하지만, 분리되어 있는 모습을 볼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어디에 문제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분리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몇가지 생각해야 될 과제들이 있습니다.

(1) 먼저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믿음이 무엇인지, 믿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갖지 못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생각합니다. 특별히 지성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믿음을 지식의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믿음은 지식의 차원이 있습니다. 제대로 믿으려면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 없는 믿음은 그릇된 신앙에 빠질 위험성을 갖습니다.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거짓인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관해서,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건강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지식의 차원에만 머물면 문제가 됩니다. 신앙이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지 않으면 행함이 따라오기가 어렵습니다. 신앙은 그 지식의 주인공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내 인생이 항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지식을 넘어서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에 이르면 인생이 안 변할 수가 없습니다. 행함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하나님과 여러분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두려움을 느껴 보셨습니까? 그 하나님 앞에서 내 생각, 내 가치관이 깨어지는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의식이 없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고 계시는지 정말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그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니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변화가 없는 인생, 행함이 따르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시는 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붙들고 계신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내가 어떻게 그 하나님을 좌지우지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에 관한 책도 많이 읽어야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책으로만 배우려 하지 마시고, 그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직접 나아가고 그 하나님과 사귐으로 하나님을 배우셔야 합니다. 물론 책 읽는 것이 필요없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좋은 신앙 서적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 한 그 믿음은 지식에 머물기 쉽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는 중요한 이유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 인생이 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행함의 열매들이 맺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둘째로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는 이유는 믿음 생활을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묶어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교회 생활은 열심히 하는데 가정이나 직장으로 돌아가면 행함이 보이지 않습니까? 왜 교회 밖을 나가면 믿음 따로, 행함 따로의 인생을 살아갑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생활을 교회 생활 안으로만 묶어 두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은 속되고 죄악된 것이고, 교회 일은 거룩한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과연 그렇습니까? 세상일은 다 속되고 죄악된 것입니까? 교회 일만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고백되는 자리는 교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가정 안에서도, 일터에서도, 비즈니스 현장에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Sunday Christian으로는 부족합니다. Weekday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교회 문 밖을 나서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잊어버리십니까? 교회 문 밖은 하나님의 품 밖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시편 139편에서 기록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숨을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다 끝에 가도 거기 하나님 계시고 하늘 꼭대기 올라가도 거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심지어 음부 아랫목에 가도 그곳도 하나님의 품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갈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벗어나 숨을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직장에서 일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가정에서 요리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바쁘게 비즈니스 현장에서 움직일 때도 하나님은 바라보십니다. 푸른 초원에서 골프채를 휘두를 때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고백되어야 합니다. 결코 교회 안으로만 제한될 수 없습니다. 행함은 어느 곳에서든 나타나야합니다. 교회와 세상의 이분법적인 이해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갑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믿음의 열매, 행함은 맺혀져야 합니다.

(3) 셋째로 믿음생활을 도덕적으로 좀 더 착해지는 수양의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도 극복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생활은 조금 더 착해지는 정도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새사람,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을 선한사람 되는 길 정도로 생각하는 분들이 교회 나오시라고 부탁 받으셨을 때 흔히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가야지요. 들어서 해될 말씀이 있겠습니까?” 맞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믿음생활은 그런 차원보다는 훨씬 근원적이고 훨씬 심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단순한 좋은 말씀 듣는 정도가 아닙니다. 친구와 어울려 지내는 여가선용 정도도 아닙니다. 문화적인 생활의 한 방법 정도도 아닙니다. 좋지 못한 습관 몇가지 고쳐서 조금 선한 사람이 되는 정도도 아닙니다.

믿음생활은 내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 곧 인생의 목적과 가치에 대한 선택입니다. 그러기에 이 믿음생활은 이 땅 위에서의 삶의 길을 결정 짓습니다. 한걸음 나아가 믿음생활은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영원한 승리인가 아니면 영원한 멸망인가를 믿음은 결정짓습니다. 곽선희 목사님께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2년간 신당동 중앙교회에서 전도사로 계실 때였습니다. 그 교회의 성가대원이며 집사님이신 국민학교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아주 똑똑한 분인데, 한번은 곽목사님께 질문을 합니다. “전도사님, 심각한 문제인데 길게 설명하지 마시고 yes나 no로 간단하게 대답해 주세요.” 그래서 우선 질문부터 해보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까?” “전도사 한테 그런 것을 묻는게 아닙니다.” “저는 전도사님 한테 묻는게 아니라 한 인간에게 묻는 것입니다. 정말로 있습니까?” 제가 대답을 해주고 나서 왜 그런 질문을 했는냐고 물었습니다. 그 집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전도사님, 다른 설교는 할 것 없습니다. 그것만 믿게 해주세요.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만 확실하게 믿어지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실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명랑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믿음이 영원한 운명과 직결되어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 인생은 달라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그저 수양생활의 한 방법 정도가 아닙니다. 내 인생, 나아가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선택입니다.

(4) 넷째로 믿음과 행함의 분리를 낳는 또 하나의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믿음과 행함의 분리를 원하지 않습니다. 믿음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믿음과 행함의 분리를 극복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없는데 있습니다. 행할 수 있는 능력, 말씀을 붙들어 갈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데 있습니다. 여러분, 이 문제를 넘어서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믿음대로 살라고 말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갈 수 있는 힘, 능력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힘은 바로 성령님께로 부터 옵니다. 그 능력의 원천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많은 경우 신앙인의 무능력은 바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데서 옵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지 않는데서 옵니다. 믿음과 행함의 분리는 바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극복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가 거룩함을 향해 자라가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께선 오늘 우리의 간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도 사모하는 인생들에게 찾아오셔서 힘을 주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행할 수 있도록, 믿음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여러분, 탄식만 하지 마시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탓만 하지 마시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분명히 약속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구할 때 육신의 부모도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는가. 오늘도 구하면 우리는 행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면 믿음과 행함의 분리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스스로를 향해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언제 한번 성령님의 도우심을 진실 되이 구해본 적이 있는가? 언제 한번 신실한 믿음의 삶, 행함이 있는 믿음 생활을 위해 성령께 기도한 적이 있는가? 언제 고민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한 적이 있는가?

III.

믿음과 행함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소용이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나의 믿음 생활은 어떻습니까? 나의 믿음 생활은 행함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오늘 나는 믿음과 행함의 분리를 넘어서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NJ에 계신 최효섭 목사님께서 이런 글을 쓰셨습니다.


“내가 굶주렸을 때 너희들은 모여 사랑을 토론하고 나의 굶주림에 대하여 이론을 전개해 주었다. 고맙긴 하지만,
내가 옥에 갇혔을 때 너희들은 조용히 기도실로 도망가 내가 풀려나올 것을 기도해 주었다. 고맙긴 하지만,
내가 헐벗었을 때 너희들은 패션(유행)을 연구하고 몸을 얼마큼 가리는 것이 도덕적인지를 토론했었다. 나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일이었으나 너희들에게 헛시간은 아니었겠지.
내가 병들었을 때 너희들은 감격한 어조로 너 자신이 건강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었지. 남의 불행을 보고 자기의 행복을 알았으니 전혀 헛일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
내가 집이 없을 때 너희들은 참다운 우리의 집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라고 설교했었지.
내가 외로울 때 너희들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고 하며 나를 혼자 버려두었었지.
너희들은 무척 거룩하게 보이고 하나님과 가깝게 보인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배고프며 외롭고 춥다.
그러니 너희 그 숱한 기도와 심각한 이론은 아직도 나에게 도달하고 있지 않구나.
“한번 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니라.”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믿음과 행함의 분리를 넘어서고 있습니까? 믿음대로 살고 있습니까? 내 삶 속에서 행함의 열매들이 맺혀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