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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5.30. 믿음은 삶입니다(6)-조영진 목사
"차별하지 마십시오"
야고보서2:1-13
말씀의 실천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가치를 지녀야 합니다.
신분이나 소유에 따른 차별은 없어야 합니다.
내 안에 진실된 나눔을 가로막는 것들은 없습니까?
나의 사랑의 폭은 충분하고도 넉넉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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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감리교 신학대학 총장으로 재직하고 계신 김득중 교수님께서 내신 무엇이 삶을 아름답게 하는가? 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글의 제목은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나”입니다.
지나간 일을 잘 잊어버리는 것이 나의 버릇인데, 그래도 오래 전의 한 사건이 계속 잊혀지지 않고 머릿 속에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그 일이 내게 너무도 큰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리라.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교회의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 종이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지, 그리고 교회가 누굴 위해 존재하는지를 생각하곤 하였다.
아마도 내가 신학교를 다니던 젊은 시절의 일이다.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수요일 저녁예배가 있음을 알고 서둘러 교회로 향했다. 조금 늦었기 때문에 앞자리를 포기하고 문 옆자리에 그냐 앉아 있기로 작정했다.
맨 뒷좌석은 많이 비어있었다. 예배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전혀 낯선, 그리고 아주 남루한 옷을 입은 40대의 남자가 술에 만취된 채 몸을 거의 가누지 못해서 비틀거리며 교회 안으로 급히 들어와 뒷좌석 한쪽 구석에 쓰러지듯 기대 앉았다. 내 앞을 지나갈 때의 악취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가 입었던 옷이 온통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던 것이 생각난다.
구석에 앉았는지 누웠는지 모르게 쓰러져 있는 그는 숨소리가 높았고 술냄새를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가끔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는 술에 만취되어 있었고 몹시 괴로워 하고 있었다. 아마도 술이 너무 지나쳤던 것 같다.
그 사람 근처의 교인들은 악취를 피해 조금씩 자리를 피했고, 또 어떤 사람은 뒤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자꾸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예배의 분위기가 약간 동요되고 있다고나 할까? 설교하시던 목사님의 눈이 약간 찌푸러지는 것 같다고 느껴졌을 때, 뒷자리에 앉아있던 장로님과 집사님이 얼른 일어나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각각 한팔씩을 붙잡고 강제로 그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저항했고 장로님과 집사님은 억지로 그를 교회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 일이 당연한 것처럼 그리고 그런 훈련을 받았기나 했던 것처럼 - 다시 내 앞을 악취를 풍기며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처럼 슬픈 표정을 하면서 그리고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불쌍히 끌려 나갔다.
그가 끌려가면서 몇마디 크게 지른 소리가 있었다. 잔뜩 혀 꼬부라진 소리였고 그래서 거의 알아듣기도 힘든 소리였다. 그러나 가까이 있었던 나는 분명히 그 음성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예배에 나오고 싶었단 말입니다. 왜? 난 교회에 나오면 안됩니까? 나오고 싶었다니까요!”
아마 이 마지막 울부짖음만 아니었더라도 난 아마 지금쯤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날 그 예배가 끝날 때까지 나는 그 사람의 그 마지막 외침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는 예배에 나오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나왔다고 했다. 남이 알지 못하는 큰 괴로움과 번민이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잊기 위해 술에 매달려 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술을 통해서 자기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생각을 해선지 그는 교회를 생각했고 아마도 교회의 종소리에 용기를 얻어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억지로 끌고 교회 안에 들어섰을 것이다. 그는 막연하나마 자기 구원의 마지막 기대를 교회에 걸어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교회의 중요한 직원의 손에 끌려 쫓겨나고 말았다. 아마도 교회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거나 혹은 예배의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쫓겨났을 것이다.
억지로 땅에 끌리면서 쫓겨나는 익명의 그 사나이를 보면서 나는 마음 속에 이건 무언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또 한편으로는 ‘아니다! 무언가 잘못 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잘된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그 사나이를 끌어내는 사람을 예수로 바꾸어 생각해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사람을 교회 밖으로 쫓아낸 사람은 장로도 집사도 아닌 예수 자신 일 수가 있다. 그런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교회라면 그건 이미 교회가 아니다. 사람의 생명보다도 예배의 분위기가 더 중요한 교회라면, 그 사나이는 그 교회에 들어올 필요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교회를 잘못 보았고, 잘못 알고 찾아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교회를 찾는 그 사람에게 ‘네가 찾는 교회는 이 교회가 아니니 돌아가라.’ 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가 참다운 교회를 제대로 잘 찾아갔는지는 모르나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교회가 아닌 교회에 잘못 들어가는 실수는 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교회는 그 사나이를 쫓아냄으로써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님을 선언했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갈라 놓으시는 오묘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 한 것은 그 교회가 그날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계속 종을 치고 있었고, 더구나 그날 예배의 마지막 찬송가는 다음과 같은 가사로 되어있는 찬송가였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
죄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에 그런 사람이 찾아 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배의 분위기를 깨는 술취한 사람이 들어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I.
이 아침 우리는 야고보서 2:1-13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사도 야고보는 처음 교회에 나타나기 시작한 Favoritism(편애주의), 혹은 외모에 의한 차별의 현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2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다: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사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있던지, 내 발치에 앉든지 하오.’ 하고 말하면, 바로 여러분은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처음 교회에도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사람 차별입니다. 가지고 있는 소유나 외모를 보고 사람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이것은 분명히 주님의 명령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명령을 위반하는 사람은 율법 전체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 곧 범법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가진 사람이 대접받을 수 있습니다. 힘이있는 사람이 좋은 자리 차지할 수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할 때면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1등석이나 비즈니스 클래스에 타는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에 대해서입니다. 남들보다 먼저 들어가고 좀 더 편한 자리에 앉고, 좀 더 좋은 음식을 먹고, 좀 더 나은 서비스를 받습니다. 내릴 때도 먼저 내리고 부친 짐도 대개 먼저 나옵니다. 물론 저도 한국에 다녀올 때 그동안 쌓아 놓은 마일리지 덕분에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본 적이 있습니다만, 한참을 기다렸다가 비행기에 타서 이미 앞 쪽에 넓직한 자리에 앉아 신문을 펼쳐들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 뒷좌석에 갈때면 웬지 속마음이 그렇게 편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만큼 더 많이 돈을 냈으니까 그런 혜택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저도 이점을 잘압니다만, 그런데도 속이 편치 않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수양을 덜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이 세상의 원칙이고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물결이 교회 안에서도 보이고 있음을 사도 야고보는 걱정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세상처럼 그렇게 차별을 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합니다. 교회는 달라야 한다고, 교회 안에서는 그런 차별, 그런 편애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합니다. 여러분, 이 야고보의 권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세상과 달라야 된다면, 왜 달라야 합니까? 어떤 이유에서 교회는 그런 차별을 넘어서야 합니까?
II.
오늘 본문 2:1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바로 여기에 대답이 있습니다. 교회가 달라야 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예수님 때문에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가진 사람, 돈이든, 지식이든, 지위든 가진사람, 힘있는 사람이 우대를 받고, 가지지 못한 사람이 천대를 받는 일은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없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말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이 달라지기에 차별할 수 없게 됩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왜 차별해서는 안됩니까?
(1)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를 믿으면 이웃의 형제와 자매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이웃은 단순한 인생 동료가 아닙니다. 단순한 형제 자매도 넘어섭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작품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돈이 많든지, 적든지 그 형제, 그 자매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사랑하시는 분들입니다. 비록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고, 좀 멀리하고 싶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서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심각하게 울리는 경종은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이웃, 특별히 도움과 관심이 필요한 그런 사람, 그런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유명한 마지막 심판의 비유를 잘 압니다. 오른쪽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목마를 때 너희는 마실 것을 주었고, 배고플 때 먹여 주었고, 헐벗었을 때 입혀주었고, 외로울 때, 갇혔을 때 돌아보았고, 병들었을 때 방문해 주었다.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이 묻습니다. 주님, 언제 저희들이 주님을 그렇게 돌아보았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 그런 모습으로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가운데 오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이 작은 자들을 무시하고 차별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차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돈많고 힘있는 사람만 더 환영하고, 더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2) 둘째로 우리가 외모에 따라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돈없는 사람, 힘없는 사람들이 결코 무가치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돈있고 많이 배웠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가치있는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 인간을 판단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세상의 가치관에 매어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의 가치 체계가 거듭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요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 많으면 부요한 사람입니까? 돈이 부자의 여부를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풍요함을 다른 눈으로 봅니다. 2:5의 말씀을 보십시다: “형제 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부요함을 소유, 재물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재물의 부요함 보다 훨씬 중요한 부요함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부요함입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이 믿음의 부요함이 없으면, 그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초라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아무리 가진 것이 없이 초라하고 가난해도, 믿음의 부요함, 영적인 부요함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부요한 인생입니다. 그는 참으로 부요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해서 천대할 수 없습니다. 돈이 없다고 해서 그 사람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가난해도 믿음이 부요한 사람은 내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상속받는 미래가 있습니다. 그는 영원한 희망을 가슴에 품고 오늘의 어려움과 역경을 헤쳐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부요하다 해도, 돈이 많아 인생을 즐긴다해도, 믿음의 부요함이 없다면 그 인생은 딱한 인생입니다. 불쌍한 인생입니다. 내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차별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돈많고 힘있는 사람만 더 환영하고 더 사랑 할 수 있습니까?
(3) 셋째로 오늘 본문 말씀은 돈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횡포를 말합니다. 그들이 저지르는 불의와 냉혹함을 지적합니다. 2:6의 말씀을 보십시다: “.....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들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큰 힘든 멍에를 지우는 사람들은 대개 부자들입니다. 힘있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남을 압제할 힘이 없습니다. 법정에 고소하는 것도 대부분 있는 사람들이 받기 위하여 고소를 합니다. 없는 사람은 대부분 고소할 꺼리가 없습니다. 또 부자가 예수님 잘 믿는다는 것,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재물이 주는 즐거움과 여유, 안정감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안타깝게 사모하기에는 오늘의 현실이 너무 편하고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부자들은 하나님의 은혜, 그분의 사랑을 절실히 사모하고 간구 할 필요를 심각하게 느끼지 않습니다. 땅위에 즐거움에 매어 있기가 쉽습니다. 그러기에 부자라고 더 환영하고 우대하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닙니까?
III.
오늘 야고보서의 본문 말씀은 21세기 워싱턴에 세워진 우리 교회, 우리 모두에게도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뚜렷하게 차별하지는 않을 지 모릅니다. 눈에 보이게 경시하지는 않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의 폭, 사랑의 대상이 너무 제한되어 있다가 보면, 본의 아니게 차별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마음 편한 사람들끼리 끼리끼리 짝을 짓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벽을 쌓아 놓고 이웃을 소외시킬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 교회는 밖에서 알고 있는 것보다는 더 많이 열려 있는 교회입니다. 몇 해 전부터 저희 교회 나오시는 어느 한 가정을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처음 우리 교회를 나오시기 시작하셨을 때 주변에서는 만류했다고 합니다. 네가 어떻게 그 교회를 나가느냐고. 그 교회는 의사. 변호사, 박사...등 “사”짜 붙은 사람이 아니면 명함도 못 내미는 교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내가 나가 보니까 그렇지 않다고 오히려 주위의 분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친척 가운데 한분도 저희 교회를 나오시게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를 오랫동안 지켜오신 교우들은 그렇게 옹졸하고 폐쇄적인 분들이 아니십니다. 새로 등록하신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열심히 사역하고 헌신하는 분들을 볼 때, 오래 섬겨오신 교우들은 고마워하고 격려하셨습니다. 공천위원회에서도 임원을 공천할 때는 언제나 새로 오신 분들도 포함해야 된다는 주장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아직까지 “자기가 교회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설쳐대는 거야”라는 비난의 소리를 저는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목사가 없는 자리에서 하시는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여기에 자족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더 넓은 가슴으로 더 깊이 형제와 자매, 우리의 이웃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차별의 벽을 우리는 과감히 무너뜨려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은 제게도 큰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목회자인 나는 과연 교우들을 차별하지는 않았는지. 힘있고 알려진 교인들을 더 반가이 대하지는 않았는지. 힘이없고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교우들에게도 진실된 사랑으로 대했는지 스스로를 살펴보았습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들, 학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가까이 하고, 힘들게 살아가시는 분들께는 거리를 두지 않았는지. 가능하면 교우들을 편애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과연 생각대로 그렇게 살아왔는지 자신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여러분, 부족한 저의 태도, 저의 사역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시고 차별 받음을 느끼셨다면, 이 시간 정중히 사과를 드립니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좀 더 넓은 가슴, 좀 더 균등한 사랑으로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걷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함께 손잡고 교회 안에서 차별의 벽을 무너뜨리고, 넘어서도록 노력해 보십시다. 교회 안에서 세상의 가치, 세상의 풍조를 몰아내는 일에 함께 힘을 모아 보십시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의 강림은 교회를 이 땅에 탄생시켰습니다. 성령님의 강림으로 세워진 교회의 특징은 한마디로 벽의 타파, 차별의 타파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셨을 때 사도들은 방언을 통하여 언어의 벽을 뛰어 넘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가 가진 것을 다 내어 놓고 나눔으로 소유의 벽을 뛰어 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인종의 벽, 인종적인 편견의 벽도 극복했습니다. 차별을 뛰어 넘어서 하나가 되어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가운데서도 이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 안에 쌓여있는 차별의 벽을 허물고 하나되게 하십니다.
사도 야고보는 오늘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다. 우리 모두 성령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 처럼 사랑하라.”는 으뜸가는 법을 지켜 보십시다. 지금, 여기에서, 나부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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