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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5.23. 믿음은 삶입니다(5)-조영진 목사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야고보서 1:19-27
사도 야고보는 오늘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하고 노하기도 더디하십시오,”
나는 성질대로, 자기 멋대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인생은 말씀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습니까?
내 인생의 브레이크는 잘 작동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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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 “생명의 길” 시간에 드렸던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이 어느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주인이 나오자 물었습니다. “예수 믿으십니까?” 그때 집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지는 옆집 사람에게 물어보시면 알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케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말끝마다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는 것도 좋지만,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어떤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입술로도 믿어야겠지만, 온몸으로, 삶으로 믿어야 함을 깨우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은 삶입니다”라는 제목 밑에서 드리는 야고보서 연속설교의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그동안 저는 믿음의 시련이 낳는 인내의 열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하는 믿음의 눈, 그리고 시험을 견디어내는 삶에 대해서 각각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야고보서가 강조하는 말씀의 실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I.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사도 야고보는 흩어져 살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니 워싱톤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정말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이 시대 특별히 한인 크리스챤들이 귀만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한인 크리스챤들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일깨우고 깨우쳐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야고보서의 핵심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야고보는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말씀을 듣기만 하면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기만 하면서 나는 크리스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말씀을 듣기만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이 올바른 것입니까? 예수 믿는 것은 듣기만 해서 되는 것입니까?
물론 우리의 믿음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10:17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음에서 납니다. 들음을 통하여 믿음이 자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듣기만 하는 그리스도인은 온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듣기만 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듣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또 야고보는 말씀을 듣고 행치않는 사람은 거울을 들여다 보고 자기 모습을 잊어버리는 사람에 비유했습니다. 그 당시 거울은 오늘날의 거울처럼 그렇게 분명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개 구리로 만들어져서 조금 볼 수 있는 정도였는데, 사람들은 거울로 자기의 모습을 보고는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말씀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이와같이 보기만 하고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는 잊어버린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씀이 그들의 삶 속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도 역시 듣고 행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는 사람도 듣고 잊어버리는 사람, 들은 말씀과는 관계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듣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II.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구체적 삶의 모습으로 몇가지를 말합니다.
(1) 먼저 사도 야고보는 듣기는 빨리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잘 들어야 합니다. 잘 듣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마음을 열고 주의를 집중하는 것입니다. 관심을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매주일 설교를 드리면서 종종 놀랄 때가 있습니다. 같은 설교를 하는 데도 듣는 분에 따라 강조점이 전혀 다름을 발견할 때입니다. 어떤 교우들께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부분을 절실하게 들으실 수 있고, 어떤 분들은 핵심을 바로 이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많은 경우 들으실 때 자신의 전이해(Pre-Understanding)나 전제 위에서 들으시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말을 액면 그대로 듣지 않고 자기의 주관이라는 filter를 통해서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한 사람의 본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종종 경험 할 때가 있습니다. 빨리 들으려면 집중해야 합니다.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2) 둘째는 말하기를 더디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지혜를 모은 탈무드에 보면, 사람은 입이 하나고 귀가 둘인데 그 이유는 듣기를 배로 하고 말은 적게하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말이야 말로 인간이 누리는 특권이면서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우리 조상 가운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시인은 말많은 세상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말하기 좋다하고 남의 말을 말을 것을
남의 말 내하면 남도 내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그런데 말 말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디 말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여러해 전 Princeton 대학 교수이신 Albert H. Cantril박사가 소문이 얼마나 빨리 퍼지는지 시험해 본적이 있습니다. 교수님은 6명의 학생들을 교수실로 불러서 절대 비밀이라고 다짐하면서 왕위를 버리고 Simpson부인과 결혼한 영국의 전왕 Edward 8세 부부가 Princeton대학 Dance Party에 참석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주일도 못가서 이 지어낸 이야기는 Campus의 거의 모든 학생들이 알게 되었고, 시 정부에서는 대학에 전화를 걸어서 왜 우리에게는 연락이 없는지 알아봐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또 각 언론사에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하여 전화를 걸어오는 등 소란을 떨었습니다. Cantril박사는 말했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소문이었다. 그러나 중상모략하는 소문은 이것보다 훨씬 더 빨리 퍼진다.”
그리스도인은 말하기를 더디해야 합니다. 입술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언어생활이 덕스러워야 합니다. John Wesley 목사님께 한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참으로 말이 많았는데, 그는 내 마음을 이렇게 털어놓는 것이 자신이 받은 달란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Wesley 목사님은 충고했습니다: “그 달란트는 좀 땅에다 파 묻으시지요.”
(3) 셋째로 말씀을 행하는 삶에서 중요한 것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화가 나면 화를 터트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화난대로 다 터트린다면 인생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까? 성질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분노를 참지 못해서 일어나는 비극이 얼마나 많습니까? 조금만 참으면 괜찮았을 일이 그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름으로 상처를 주고, 화목을 깨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성질이 급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성격 탓으로 돌립니다. 물론 그런 면도 있을지 모릅니다만, 중요한 것은 자신을 다스리는 힘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을 참지 못함으로 비극을 낳는 일들을 저지르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봅니다. 알렉산더 대왕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왕이라는 칭호가 어울릴 만큼 정열적이면서 또 지성적이었습니다. 큰 제국을 건설할 만큼 여러 나라를 정복한 그였지만, 자신의 분노를 정복하는데는 몇차례 실패했습니다. 한번은 알렉산더 대왕의 가까운 친구인 장군이 술을 먹고는 사람들 앞에서 왕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격노한 알렉산더 대왕은 번개같이 한 병사의 창을 뽑아서 그의 친구인 장군을 향해 던졌습니다. 실상은 술취한 장군을 겁주려고 창을 던졌는데 불행하게도 그 창은 명중해서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그 장군의 생명을 빼앗고 말았습니다. 깊은 죄책감과 막심한 후회감으로 알렉산더 대왕은 그 창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주위의 사람들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대왕은 그의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살인자라고 자책하면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러기에 잠언서 기자는 일찍이 “노하기를 더디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잠언 16:32).”고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노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4) 넷째로 진정한 경건 역시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고백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26 이하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화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경건, 그것은 말에 있지 않습니다. 거룩해 보이는 겉모습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손과 발은 까딱하지 않는 머리만 큰 기형적인 모습도 아닙니다.
진정한 경건은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사랑의 삶입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 소외되고 고통 속에서 우는 사람들, 그들에게 손을 펴는 것입니다. 사랑을 베푸는 삶입니다. 세상의 풍조에 따라 이리 저리 밀려 다니지 않고, 말씀 위에 굳게 서는 삶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거룩함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들음을 넘어서서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랑의 삶입니다.
III.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말씀의 실천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하고, 노하기도 더디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거룩함을 지켜가는 진정한 경건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가가 아닙니까?
종교개혁자 Martin Luther는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하고, 노하기도 더디하는 삶, 그런 열매를 맺으려면 도를 닦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같은 노력을 넘어서서 먼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내적인 힘, 인격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입술의 말은 바로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입술의 말 보다도 그 말을 터트리는 우리 내면 세계, 우리의 영혼의 세계가 중요함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도 청년기에 혼자서 공부하면서 도를 닦아보려고 꽤 노력했었습니다. 부모님께로부터 남자가 너무 말이 많고 입이 가볍다는 꾸지람을 들은 후, 말 좀 줄여보겠다고 한나절 동안 입에 반창고를 부치고 지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깨달은 것은 입술을 막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을 토해내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가슴이 중요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입술의 말은 바로 그 마음에 쌓인 것의 표출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는 멧세지가 있습니다. 1:21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싹이 트고 자라야 합니다. 우리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며 소중히 간직하고 순종함을 뜻합니다. 내 마음 속에 말씀이 뿌리를 내리면 더러움과 넘치는 악은 설 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말씀 속에 담겨있는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우리의 생각, 우리의 입술,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 말씀의 능력이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노하기도 더디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 말씀의 능력이 참된 경건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줍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면 귀만 커지고, 머리만 커지고 손과 발은 바짝 마른 기이한 모습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인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말씀을 듣습니다. TV로, 래디오로, 인터넷으로, 테이프나 CD로 말씀이 무제한 적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귀한 말씀은 길바닥 같이 달고 달은 마음 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곧 사탄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 말씀 앞에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그리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좋은 땅, 옥토의 마음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많지만,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찾아 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야고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다시 한번 외칩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저는 미국에 와서 공부하면서 여러 가지 귀중한 경험을 하였지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Wesley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제게 많은 사랑과 격려를 안겨주신 Dr. James Pyke, 선교학 교수님을 졸업을 앞두고 저희 아파트에 모신 적이 있습니다. 저녁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국교회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교회가 얼마나 힘있게 부흥하는지, 선교 100년 남짓한 짧은 역사인데도 전 인구의 25%가 그리스도인인 놀라운 전도의 열매를 자랑스럽게 말씀드렸습니다. 또 미국내 한인교회의 눈부신 발전상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한참 듣고 계시던 Dr. Pyke의 부인께서 제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조목사님, 한국에서 전인구의 25%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한국의 역사가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이 말씀 앞에서 한국교회를 더 이상 자랑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전 인구의 25%가 된다면 한국사회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미국내 한인 커뮤니티에서 교회와 관계를 맺는 동포들이 70%가 넘는다면 한인 커뮤니티는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생각해야 하는 물음입니다.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야고보는 오늘 우리들을 향해 권면합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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