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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4.18. 믿음은 삶입니다(1)-조영진 목사

"시련이 다가올 때"

야고보서 1:1-4

성경은 시련이 다가올 때 그것을 더할나위 없이 기쁘게 생각하라고
권고합니다.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기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시련 속에는 어떤 은총이 숨겨져 있습니까?

오늘부터 저는 앞으로 3개월 여에 걸쳐 야고보서의 말씀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그동안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제목 설교를 드리면서 제 마음 한 구석에는 성경의 본문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주시는 말씀을 전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부활절이 지나면서, “목적이 이끄는 삶”에 대한 연속설교를 끝마치면서 어떤 말씀을 전할 것인가 기도하며 생각해 오던 중 야고보서의 말씀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금번 야고보서 연속설교는 그동안 성경의 한 책을 택해서 말씀을 드린 구약성경의 룻기, 신약성경의 빌립보서, 그리고 교회 설립 50주년을 맞아 1년 가까이 설교한 로마서에 이어 네 번째가 되겠습니다.

야고보서는 우리 모두가 잘아는 것처럼 믿음에 따르는 행함을 강조합니다. 이 때문에 종교개혁자 Martin Luther 같은 사람은 예수님의 구유가 놓여있는 마굿간의 지푸라기 같은 서신이라고 까지 말했지만, 이 말씀은 오늘 한인교회, 믿음과 삶이 분리되는 경향이 강한 한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히 요청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복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변혁시켜 가는 교회를 지향하는 저희들로서는 깊이 묵상해야 할 말씀입니다. 금번 야고보서 연속설교를 위해서도 교우 여러분의 많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I.

야고보서는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 특별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기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편지의 저자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의들이 있지만,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일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생각을 모으고 있습니다. 기록장소와 연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지만, 학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주후 50년 이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야고보서가 갖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유대교적인 성격이 짙어서 믿음이 갖는 행함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외치는 사도 바울의 편지와는 다른 것처럼 느껴집니다만, 신실한 믿음의 본질을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이 둘은 분리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야고보서의 말씀이 마태복음 5장-7장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산상보훈의 말씀과도 비슷한 점이 많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II.

오늘 본문 1:1-4의 말씀을 살펴 보시겠습니다. 먼저 1:1은 문안의 인사입니다. 야고보는 이 편지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야고보가 세계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을 드립니다” 라고 시작합니다. 이 문안인사에 이어서 야고보는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을 헤치면서, 살아가는 어려움과 문제들을 기억하며 권면합니다.

(1) 먼저 오늘 본문 1:2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 여기서 시험이란 말은 고난, 시련을 뜻합니다. 영어성경은 “trial of any kind," 혹은 ”trials of many kinds"로 옮겨 놓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 여정에는 고난도, 실패도 밀려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어도, 그리스도의 신실된 제자로 살아도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사업이 안되어 경제적인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건강에 이상이 와서 아플 수도 있습니다. 자녀들의 문제로 눈물의 세월을 헤쳐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김진홍 목사님 말씀처럼, 만사형통은 될 것은 되고 안될 것은 안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다른 문제입니다만. 그리스도인으로 진실하게 살아도 언제나 모든 일이 잘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잘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시련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고난의 밑바닥, 심연 속에서 눈물로 하루 하루를 헤쳐갈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난의 면제를 약속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되시는 예수님께서도 온갖 고난을 다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많이 고생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오히려 더 고생하고, 더 어려운 일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고난을 비극으로 보지 않습니다. 괴로움만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 고난을 기회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기회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야고보는 권면합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 그 시련들을 더할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라고.

여러분, 과연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고난 앞에서 아픔과 어려움을 추수리기도 힘든데 더할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라니 말이 됩니까?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저는 믿습니다. 가능하다고. 있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우리의 힘, 우리의 의지 만으로는 힘듭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믿음은 고난 속에서 그 고난에 포로가 되지 않고 그 고난 속에서도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에 기뻐할 수 있도록 깨우쳐 줍니다. 내가 전부인 사람은 그 내가, 그 전부가 시련 속에서 흔들리고 깨어져 나갈 때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초인적으로 잘 견디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다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부딪친 어려움만을 보지 않습니다. 그 어려움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압니다. 그 어려움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압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고, 깨닫게하고, 일으켜 세워주는 능력입니다. 이 든든한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고난과 아픔의 포로가 되지않고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고난을 더할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쁨으로 그 시련을 헤쳐갈 수 있습니다.

(3) 그렇다면 온갖 시련은 어떤 유익을 가져다 줍니까? 어떤 의미에서 고난은 또한 기회입니까?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 시련, 이 믿음의 시련이야말로 인내를 낳는 고마운 스승이라고. 그렇습니다. 시련은 인내를 낳습니다. 어려움이 없으면 그 어려움을 참을 수 있는 힘, 인내가 형성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5:3 이하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의 자녀들을 보면서 참으로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역사상 가장 편리하고, 가장 풍성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인들은 우리의 조상들이 겪었던 그 엄청난 고난과 시련과는 관계없는 안락하고 편안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편안함 속에서 잃어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내입니다. 어려움과 역경을 견딜 수 있는 힘, 인내를 기를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조그만한 문제 앞에서도 깨어지고 주저앉는 모습들을 봅니다.

어느 농부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콩이나 옥수수를 재배할 때 비가 제때에 적당하도록 풍성하게 올 때 경험이 많은 농부는 그해 수확을 걱정한다고 합니다. 비가 넉넉히 왔는데도 걱정한다면 모순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날씨와 여건 속에서 자란 콩이나 옥수수는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기 때문에, 조금만 가물어도 큰 피해를 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가 넉넉히 오면 뿌리를 깊이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얕은 뿌리로 있다가 조금만 가물거나 바람이 불면 견디지 못하게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시련은, 인내를 가르쳐주는 위대한 스승입니다. 온갖 시련 속에는 이 놀라운 은총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시련 속에서 튼튼하게, 흔들림없는 인내를 키우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시련에 빠질 때 기뻐합니다. 고난을 감사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룩하시는 은혜의 역사를 찬양합니다.

(4) 넷째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 인내야말로 온전하고 성숙한 인격을 이루는 근본입니다. 1:4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 말씀을 전에 우리가 사용하던 개역성경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옮겨 놓았습니다.

여러분, 온전한 인내란 무엇을 뜻합니까?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한다는 것은 어떤 뜻을 갖습니까? 그것은 끝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조금 참다가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이길 때까지 참는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질질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갖고 기쁜 마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견디는 것입니다. 참아내는 것입니다.

이 온전한 인내야말로 부족함이 없고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의 표시, mark입니다. 성숙한 사람, 성숙한 신앙인은 인내의 넓이, 인내의 깊이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내의 사람으로 우리는 아브라함 링컨을 들 수 있습니다. 전광 목사님께서 쓰신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 이란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날 신문기자가 링컨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성공과 존경받는 삶의 비결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때 링컨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그야 다른 사람들보다 실패를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지요. 나는 실패할 때마다 실패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배웠고 그것을 징검다리로 활용했습니다. 사탄은 내가 실패할 때마다 이제 너는 끝장이라고 속삭였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실패할 때마다 ‘이번 실패를 거울삼아 더 큰일에 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사탄의 속삭임 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지요.”

링컨의 생애는 ‘실패와 불행’이라는 글자가 귀찮을 정도로 따라 다녔습니다. 그는 크고 작은 선거에서 무려 일곱 번이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으며, 사업에도 두 번이나 실패하여 빚을 갚는데만도 무려 17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는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이 잃었습니다. 10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20살에는 누이 사라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한 27살 때는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 앤 메이가 갑작스럽게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42살과 53살에는 각각 둘째 아들 에드워드(5살)와 셋째 아들 윌리엄(12살)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가 겪은 사업과 선거의 실패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831년 - 23세에 사업 실패
1832년 - 24세에 주의회 의원 낙선
1833년 - 25세에 사업 실패
1838년 - 30세에 의회 의장직 낙선
1840년 - 32세에 대통령 선거위원 낙선
1844년 - 36세에 하원의원 공천 탈락
1855년 - 47세에 상원의원 낙선
1856년 - 48세에 부통령 낙선
1858년 - 50세에 상원의원 낙선

링컨은 이같은 실패와 고난 속에서 주저 앉지 않았습니다. 참고 견디면서 그 실패 속에 담겨진 메시지를 깨닫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는 이 인내를 통하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격을 지닌 대통령, 온전함을 간직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미국을 분열의 위기에서 건지고, 흑인노예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온전한 인내야말로 부족함이 없고 성숙한 사람의 mark입니다.

III.

한국인, 독일인, 일본인 세 친구가 프랑스 여행 중에 에펠탑에 올라갔습니다. 독일인 친구는 탑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재질을 열심히 조사했습니다. 일본인 친구는 땀을 닦을 겨를 없이 수첩에 에펠탑의 도면을 열심히 그렸습니다. 여러분, 한국인 친구는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올라왔으니 사진 한 장 찍고 내려갑시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이나 비즈니스에 일하는 히스패닉이나 타인종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무엇인지 여러분께서 잘 아실 것입니다. “빨리 빨리”입니다. 하긴 빨리 빨리해서 경제 발전도 빨리 이룩했고, IMF도 빨리 극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빨리 빨리의 또 다른 측면을 살펴보면, 이 서두름 속에서 우리는 참는 힘, 인내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옛날 고등학교 교과서를 읽을 때 한국민족의 특징은 은근과 끈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끈기를 잃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내를 잃어버린 인격은 경박합니다. 피상적인 삶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편리한 기술 문명, 정보 통신 매체의 발달은 서두름 속에서 인내를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조그마한 어려움 앞에서 쉽게 주저앉고 포기합니다. 부부들도 별 것 아닌 문제 때문에 갈라서고, 헤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그만 시련 앞에서도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야고보는 오늘 우리들을 향해 권고합니다. 여러 가지 시련이 다가오면 더할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라고. 믿음의 시련이야말로 인내를 낳으며 이 인내야말로 온전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가게 한다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엄청난 고난을 참고 견디며 딛고 일어선 사람으로 지선아 사랑해 라는 책을 써서 널리 알려진 이지선 양의 글을 함께 나누면서 제 설교를 줄입니다. 언젠가 소개해 드린 것처럼 지선양은 이화여대 유아교육과에 재학 중이던 꿈 많고 아름다운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2000년 7월30일밤 오빠와 함께 승용차로 집에 돌아오던 중 한 음주 운전자가 낸 6중 추돌 사고는 지선양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바꾸어 놓았습니다. 3도 화상에 7개월간 입원해서 11차례의 수술과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치료, 3년 가까운 이 치료를 견디어 내는 동안 예전의 곱던 얼굴은 사라졌습니다. 온 몸에 화상의 흔적이 뚜렷한 아픔의 흔적을 갖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선양은 믿음 안에서 오뚜기처럼 일어서서 희망의 불씨를 전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선아 사랑해 라는 책은 일본어로도 번역되어 일본에서도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지선양은 지난 3월 하순부터 시애틀에 와서 재활상담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지선양은 자신의 책 에필로그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덤으로 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는 사과 한 개밖에 사지 않았는데 내가 단골이라서, 혹은 예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주인이 값없이 주는 게 ‘덤’입니다. 그리고 꼭 성한 게 아니더라도, 한 귀퉁이가 조금 뭉그러진 사과일지라도 그저 주는 게 고마운 것... 그것이 바로 ‘덤’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그 덤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2000년 여름 사고 나던 날부터 일주일 동안 의사들이 저를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르는 가장 위험한 환자’로 분류해놓았을 그때... 그렇게 갔을 것입니다. 스물세 살의 어느 날 정말 ‘찍’ 소리도 한번 못하고 끝나버리는 게 제 몫이었다면, 온전치는 않지만 껍데기는 조금 남들과 다르지만 지금 이렇게 살 수 있는 것... 이건 바로 제가 받은 덤입니다.

주기만 해도 감사한 것이 덤인데... 하나님께서는 덤의 지선이 삶에 또다시 덤의 덤을 얹어주십니다. 제게 천국의 마음을 주셨고 정말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 기도에 힘을 얻었습니다. 일본과 미국으로 저의 걸음을 인도하신 하나님, 돌아보면 하나님의 개입과 섭리 없이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공부를 하고 꿈을 키울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저러고도 뭐가 행복할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 솔직하게 다치기 이전보다 훨씬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덤의 인생은 조금 불편하긴 해도 걱정이나 근심, 어쭙잖은 우울함 따위는 없습니다.

언젠가 <병원 24시>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화상을 입은 열 살짜리 꼬마의 이야기가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도 그 무시무시한 화상 때문에 제가 치료를 받았던 그 치료실에서 처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화상으로 다 타버려 없어진 피부 대신 붕대를 감고 있습니다. 피부도 무엇도 아무 것도 없는 그 몸에 소독약을 바릅니다. 거기서 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싶을 정도로... 그 고통은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열 살짜리 아이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사고 후 7개월 동안 받아야 했던 그 치료의 순간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갑니다. 그 고통이 뼛속까지 파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방송이 끝나자 엄마가 저를 안고 엉엉 우셨습니다. 그동안 한번도 제 앞에서 울지 않았던 엄마가 소리 내어 막 우셨습니다. 지난 세월 딸이 받았던 그 고통 때문에 엄마는 가슴이 아파서 그렇게 울었습니다. 그러나 엄마도 저도 이내 눈물을 닦았습니다.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살리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고통을 대가로 치르긴 했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몇 년 동안을 계속해서 수술대 위에 올라가야 하겠지만... 그러나 살아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고통 가운데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소망’과 ‘평안’ 때문이었습니다. 저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으시며 지금의 제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모습 그대로 기쁘게 저를 사용하시리라는 소망 말입니다. 그 소망이 마음에 평안을 주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없으시다면?’ 이라고 가정해 봅니다. 이 서울을 다 준다고 한들, 이 나라를 통째로 준다고 한들, 제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 어느 것으로도 저를, 제 모습을, 제 삶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보상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은 저를 지켜주었습니다. 힘든 시간을 지내면서 저는 그것이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정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정말 힘든 가운데도, 어제는 숟가락 혼자 잡을 수 있어서, 오늘은 또 문고리 잡고 열 수 있어서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는 마음... 그래서 매일 매일이 너무 행복한 마음이 제게 일어난 가장 큰 기적입니다. 제 힘으로나 제 의지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저는 감히 그것을 ‘기적’이라 부릅니다.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고난은 있습니다. 제가 당한 일이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고난을 어떻게 이기느냐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때로는 고난 자체가 가장 큰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미 그 삶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제 얼굴과 짧아진 손가락들, 치료실에서 보낸 수많은 낮과 밤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고난은 축복입니다. 힘겹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이기고 나면 주어지는 보물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배울 수 없는, 가질 수 없는 열매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저는 이제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 제게 물었습니다. 예전의 모습으로, 사고 나기 전 그 자리로 되돌려준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바보 같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제 대답은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을 믿고 있고, 또 지금 제 안에 담겨 있는 고난이 가져다준 축복의 보물들은 정말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몰랐던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고 사랑을 맛보았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 안에 있습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지금은 상상치도 못할 일들이 앞으로도 펼쳐질 것입니다. 크고 작은 기적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의 이 모습이 아니고는, 그 간의 아픔을 알지 못하고는 전할 수 없는 메시지들을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아니고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며, 이런 모습의 저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 제게 맡겨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