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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3.28. 손운산 목사
노아의 이야기, "나무를 심고, 방주를 짓고"
창세기 6:1-22
신앙은 불의와 타락의 시대에서 “그러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믿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아주 먼 훗날 구원의 역사를 담아갈 방주를 오늘 짓는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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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를 심은 사람
프랑스의 소설가 장 지오노(Jean Giono, 1895-1970)의 "나무를 심은 사람"제목의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보았습니다. 한 젊은 남자가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으로 뻗어 내린 알프스 산지의 고지대로 장거리 하이킹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높은 산지대를 하이킹 하는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푸른 숲이 아니었습니다. 맑은 시내가 흐르는 골짜기도 아니었습니다. 3, 4천 피트 높이까지 뻗어있는 산맥이었지만 나무 한그루 없는 황량한 산이었습니다. 산골짜기에는 물이 말랐고, 뜨거운 태양만이 내려 쪼였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는 그 산은 가장 아름다운 산들 중의 하나였는데, 욕심 많은 사람들이 숯을 만들기 위해 나무들을 다 베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 산은 폐허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하이킹 하는 그 남자는 삭막한 벌판, 황무지, 버려진 땅을 사흘 동안 걸은 후에 한 장소에 도달하였습니다. 그곳은 폐허가 된 마을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에 천막을 치고 물을 찾으려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시내는 다 말라있었고 어디를 가나 잡초만 무성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우연히 양을 치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양치기는 이 남자를 데려가 물을 마시게 했고, 그는 며칠 동안 그 양치기와 함께 보냈습니다. 그 양치기는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양치기가 저녁을 먹고 자기 전에 도토리 한 자루를 가져다가 알이 좋은 것을 골라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양치기는 나머지는 다 버리고 가장 좋은 도토리 100알을 자루에 넣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양치기를 따라 가 보았습니다. 양치기는 양을 데리고 도토리 자루와 쇠막대기를 하나를 들고 나갔습니다. 양치기는 양을 한 곳에 머물게 하고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양치기는 쇠막대기로 메마른 땅에 구멍을 파고 거기에 도토리 한 알을 넣고 흙으로 묻었습니다. 그렇게 양치기는 하루에 100개씩, 지난 3년 동안 10만개를 심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다람쥐가 파먹고, 어떤 것은 싹이 나면 다른 짐승이 먹어 버렸기 때문에, 10만개 중에 10,000개의 도토리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이킹 하는 남자의 눈에 여기저기에서 어린 도토리나무들이 자라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남자가 양치기에게 나이와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55세, 이름은 엘지아 부피에였습니다. 그는 원래 평지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나 뿐인 아들을 잃었고, 아내마저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양치기는 양들과 개를 데리고 조용히 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 양치기는 아름다운 산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양치기는 그 황무지 산에 나무를 심기로 결심하고 산으로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30년 동안 굉장히 많은 나무를 더 심어서, 지금 뿌리를 내린 만 그루의 나무는 바다의 물 한 방울 정도밖에 되지 않을 거라고 소박하게 대답했습니다.
이런 양치기의 모습을 본 후 그 남자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서 그는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그가 다시 그 산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5년 만에 그 황무지, 그 폐허가 아름다운 숲으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도토리나무, 자작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광경을 보면서 "인간도 하나님처럼 유능해 질 수 있구나. 인간도 하나님처럼 엄청난 일을 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메말랐던 골짜기에 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가에는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꽃이 만발했습니다. 그 후로 그 남자는 매년 그 산을 방문했고 그 때마다 그 양치기가 나무를 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양치기는 원래 살고 있던 곳에서 더 멀리 떨어진 황무지로 가서 나무를 심고 있었습니다. 그 양치기는 알아주는 사람 한 사람 없이, 철저한 고독 가운데서,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쇠막대기로 땅을 파고 거기에 도토리를 심고 있었습니다.
해마다 산은 점점 아름답게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 산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말을 들은 산림 관리원, 공무원들, 국회위원들이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그 양치기가 나무를 심은 사람인 줄도 모르고, 그에게 산불이 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일러주고 갔습니다. 그곳은 관광지가 되어 버스가 산 중턱까지 올라 갈 수 있게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름다운 숲, 물소리, 새소리, 그리고 그 산 마을의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무를 심는 한 사람의 노력으로 그 폐허가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변했습니다. 폐허였던 마을에는 잘 가꾸어진 농장이 생겨났고 개울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엘지아 부피에 덕분으로 행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집들마다 뜰이 있었고, 꽃과 채소들, 장미와 양배추, 금어초와 부추, 아네모네와 셀러리 등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낮은 경사지에는 보리와 호밀들이 푸르게 자라고 있었고, 골짜기에는 신선한 초록색 풀밭이 있었습니다. 그 양치기가 황무지 산에 나무를 심는 40 여 년 동안, 사람들은 두 번의 큰 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그 양치기는 아랑곳 하지 않고 혼자 외롭게, 서둘거나 절망하지 않고, 매일 매일 아무런 보상도 칭찬도 바라지 않고, 자기 땅도 아닌 버려진 황무지에 나무를 심고 또 나무를 심어서 산을 푸르고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황무지를 다시 하나님의 아름다운 산으로 바꾸었습니다.
나무를 심은 양치기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가꾼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의 동역자가 될 수도 있고, 창조의 반역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양치기는 창조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혹은 나라들은 두 번의 큰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고 세상을 파괴함으로 창조의 반역자가 되는 동안, 그 양치기는 산에서 나무만 심었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그 양치기는 나무를 심고 또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것은 외롭고 고독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무를 팔아 재산을 증식하기 위해 나무를 심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황무지에 나무만 심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아니였지만 하나님처럼 위대한 일을 하고 해냈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일, 아픈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 바른 정신,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자신의 일터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한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 모두 다 창조의 동역자들입니다.
* 방주를 짓는 노아
"나무를 심은 사람들"을 보면서 노아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뜨거운 태양 빛이 내려 쪼이는 대낮에 산꼭대기에서 방주를 짓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놀고 있는 그 순간에 노아는 세 아들을 데리고 산꼭대기에서 방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머지않아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계획도 모른 채 부정부패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노아는"방주를 지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매일 매일 방주를 지었습니다. 누가 보든 안보든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노아는 방주를 지었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들은 왜 고생하면서 방주를 짓느냐고 투덜대고 화를 냈을 것입니다. 노아는 그 때마다 애들을 달랬습니다. "얘들아, 힘들지, 조금만 참자. 하나님이 이 땅을 보시고 참으실 수가 없다고 하셨어. 아무리 혼내주고 타일러도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말로 아픈 마음으로 이 땅을 홍수로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단다. 그런데 우리 보고 방주를 짓고 그 안에 모든 동식물을 보관하였다가 홍수 후에 역사를 이어가라고 하셨단다. 그래서 방주를 짓는 거란다. 조금만 참자. 열심히 정성을 다해 방주를 짓자. 튼튼하게 방주를 짓자. 그래서 홍수 후에 이어져 갈 하나님의 세상을 위해 정성으로 방주를 짓자" 노아는 이렇게 방주를 지었습니다.
창세기의 처음에서 세상을 지으실 때의 하나님은 표정은 마냥 좋아하셨을 모습입니다. 창조 이전의 모습은 캄캄함과 공허함 그리고 물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따라 세상이 창조되기 시작합니다. 하늘에는 해, 달, 별이 생기고, 공중에는 새들이 날고, 들판에는 예쁜 꽃들이 피어나고,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뛰어 놉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보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때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빙그레 웃으시는 하나님의 모습, 당신 손으로 지으신 세상을 마음껏 축복하시려는 모습이 역력히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부터 시작되는 사람들의 범죄와 함께 하나님의 표정이 바뀌어 갑니다. 사람들이 서로 속이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더니, 창세기 6장에 오면 사람들이 날 때부터 타락한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이 광경을 본 하나님은 화도 나실 뿐만 아니라 가슴이 아프셨습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께서 후회하셨습니다. "공연히 사람을 만들었구나"하고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타락과 죄악으로 엄청난 비극이 계속될 바에야 차라리 이 역사를 끝내시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실수로 여기시고, 홍수로 세상을 뒤엎고 다시 창조전의 흑암과 물의 상태로 되돌리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세상을 내려다 보셨을 때, 한 사람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노아입니다. 성경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날 때부터 악했고 죄악이 온 땅에 가득 찼을 때, 그러나 노아만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고 당대에 의인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노아는 "그러나" 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는데 혼자서 "그러나"의 삶을 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 노아를 발견하시고 세상을 홍수로 없애 버리시겠다는 계획을 수정하십니다. "그러나"의 삶을 살아가던 평범한 한사람 노아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수정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방주를 짓고 그 안에 온갖 생물을 한 쌍 혹은 일곱 쌍씩 넣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홍수로 모든 것이 없어진 그 자리에서 노아와 그 방주 안에 있는 생물들이 새로운 역사를 이어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어떻게 혼자서 "그러나"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었을까요? 남들의 비웃음을 사면서 햇볕이 쨍쨍 내려 쪼이는 날 노아는 혼자 어떻게 방주를 지을 수가 있었을까요?
성경은 노아를 당대의 의인이라고 표현합니다. 의인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의인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한 사람을 가리켜 말합니다. 의인은 하나님이 이 역사를 주관한다고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사는 사람을 가리켜 말합니다. 노아는 이 역사는 우연이나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여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한 사회나 공동체가 멸망한 것을 보면 훌륭한 지도자나 학자가 없어서 아닙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믿고 살아가는 의인들이 없을 때 멸망했습니다. 노아는 수많은 비난과 조소, 그리고 때론 자신도 믿어지는 않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이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믿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갔습니다.
드디어 방주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그 방주에 자기 식구를 먼저 태우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식구들이 먹고 살 물건들로 채우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가장 좋은 소 한 쌍, 닭도 한 쌍, 말도 한 쌍, 돼지도 한 쌍, 새들도 한 쌍씩 그 방주에 실었습니다.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40일 주야로 내렸습니다. 온 땅이 물에 잠겼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 큰 소리 치던 모든 것들이 물 속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그가 산꼭대기에 지어 놓은 방주가 물위에 떴습니다.
노아는 모든 것이 물에 잠긴 모습을 보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는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물에 잠긴 모습을 방주에서 바라보는 그의 눈엔 뜨겁고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홍수가 끝난 후에 방주에 실은 모든 것들로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 이어져 가길 위해 기도드렸을 것입니다.
홍수를 내리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은 120년 후에 실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노아가 방주를 짓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노아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든지, 설교하고 전도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면 120년 동안 방주만 만들었을까요?
유대인의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다음 곧장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나무를 심느냐고 물으면, 노아는 "하나님께서 머지않아 세상을 홍수로 멸망시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방주를 짓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회개하십시오"라고 대답했을 거라는 것입니다. 세 아들들이 "아버지, 나무들이 많은데 왜 나무를 또 심으세요?"라고 하면 노아는 "응, 우리들이 잘못한 것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하셨단다. 그리고 나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단다. 나는 이 나무들을 잘 가꾸어서 가장 좋은 방주를 지으려고 한단다"라고 대답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120년 동안 나무를 심고, 그 나무가 자라게 되었을 때 그것으로 방주를 짓는다는 것이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노아시대의 수명을 보면 지금 우리보다 거의 10배나 됩니다. 제일 오래 산 사람이 969 세였고, 노아는 500세가 넘어 세 아들을 낳았고, 홍수 후에도 350년을 더 살았고, 950세에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 신앙은 나무를 심고 방주를 짓는 일
신앙은 황무지에 나무를 심고, 뜨거운 대 낮에 방주를 짓는 일입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아침에 벼락부자가 되거나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때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답답한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이 이 역사를 주관한다고 믿고 이 땅에서 "그러나"의 삶을 살아가는 행위입니다.
신앙은 죽은 다음에 천당 가는 티켓을 따는 행위가 아닙니다. 신앙은 황폐한 이 땅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땀 흘리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담아갈 방주를 짓는 행위입니다. 신앙은 비는 고사하고 구름 한 점 없는 대낮에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어갈 방주를 짓는 행위입니다.
신앙은 나만 살고 우리 식구만 구원하기 위한 방주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방주를 짓는 것은 노아 시대만큼이나 타락한 시대를 살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영원히 이어가는 거룩한 일입니다.
신앙은 경쟁하고 이기고 성공하고 출세하라는 세상의 큰 소리를 들으면서도 들릴 듯 말듯 들려오는 하늘의 소리에 안테나를 맞추면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신앙은 고독하고, 외롭게 방주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방주를 지으라고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방주를 짓는 일에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어져 갈까요? 어디에 담겨 보존되고 전달될까요?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평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가슴, 자기 목숨까지 버리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구원역사를 누가 이어갈 가요? 누구에 의해, 어디에 보존되고 담겨져 그 거룩한 역사가 계속되게 해야 할까요?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어 갈 것들을 담는 방주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끼리 살아남기 위한 방주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이 시대에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 넓은 황무지에 한 알의 도토리를 심고, 정성 다해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방주를 짓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의 분노를 가라앉힐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노아는 평범한 한 사람이었습니다. 학자들처럼 세상을 현실을 분석하는 사람도 아니다. 돈벌기 위해서 아무 일이나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노아는 하나님이 이 역사를 지배하심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자기의 위치에서 살아 간 것입니다. 신앙은 황폐한 땅에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역사를 담아 갈 방주를 짓는 행위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한다고 믿으면서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위해 매일 기도하며 나무를 심는 사람들입니다.
유명한 신학자요, 지질학자였던 불란서의 데야르 샤르뎅 신부님이 어느 날 시골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그 마을에 작고 예쁜 성당이 있는 것을 발견하시고 그리로 향하셨습니다. 대낮이기 때문에 성당 안에 아무도 없을 줄로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조용히 무릎 꿇고 기도드리고 있는 한 수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인적이 드믄 시골, 조용한 대낮, 그리고 기도드리고 있는 수녀의 모습은 데야르 신부를 감동케 했습니다. 훗날 기도드리던 그 수녀를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회고의 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나는 기도드리는 수녀를 보는 순간, 온 우주의 힘이 그 작은 성당 안에서 기도드리는 수녀한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수녀는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었을까요?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기도드렸을 것입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가난한 사람들, 고난 받는 이들을 생각하며 기도드렸을 것입니다. 아픔이 많은 이 땅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길 바라는 기도를 드렸을 것이고, 자신의 부족과 허물 많음을 고백하는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 지기를 위해 기도드렸을 것입니다.
아직도 하늘에 구름 한점 없습니다. 홍수는커녕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하늘을 거역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무지개가 뜨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이 이 역사를 지배하심을 그 옛날 믿고 방주를 지었던 노아가 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늘에 무지개가 뜨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이 시대의 노아로 불러주셨음을 꼭 기억하십시오. 이 시대를 건질 방주를 지으라고 불러 주셨음을 기억하십시오.
때론 우리들이 믿음으로 하는 일들이 공연한 짓 같기도 하고, 아무런 결과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상심하지 말고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롱펠로우의 "화살의 노래"란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나는 활을 당겼다.
어디에 화살이 떨어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빨리 날아가는 화살을 그 누가 볼 수 있으랴.
하늘을 향해 나는 노래를 불렀다.
어디에서 그 노래가 멈추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리 예리한 눈길을 가진 사람이라도
바람처럼 흘러가는 노래를 볼 수는 없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나는 한 그루 느티나무에 박힌 화살을 보았다.
아름다운 노래가 친구의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것도 들었다.
신앙인은 힘들고 어려워도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노래가 누군가의 가슴에 살아남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심은 평화와 사랑과 정의의 나무가 언젠가는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이 땅에 평화와 사랑과 정의의 그늘을 만들어 줄 것을 믿기에 오늘도 우리는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황량하고 거치를 땅에 나무를 심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구원의 역사를 담을 방주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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