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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28. 조영진 목사
"위로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40:1-11
성경의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아픔 속에 함께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지난 한해 동안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맛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체험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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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기대 속에서 맞이했던 2003년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많은 추억과 좌절 혹은 기쁨과 감격으로 채워졌던 한해가 과거 속에 묻혀가고 있습니다. 한해의 마지막 주일에 서서 돌이켜 보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 모두 찬송한 것처럼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한이 없는 주님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나깨나 주님의 손이 항상 살펴 주셨고,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해 주셨습니다. 몸도 맘도 연약했지만 새 힘 받아 살았습니다. 물 붓듯이 부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는 넉넉하고도 충분했습니다.
2003년을 맞아 우리 교회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표어 밑에서 사역을 펼쳐왔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헌신해 왔습니다. 금년 한해 동안 저는 세 번 6주간 계속된 연속 설교를 드렸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뜻에 초점을 맞춘 "부르심", 둘째는 시편 23편의 말씀을 함께 살펴본 "내 잔이 넘치나이다", 세 번째 연속 설교는 "가정의 회복을 위하여"였습니다. 또 봄철 부흥 사경회, 여름철 전교우 수양회, 가을철 성격유형 상담세미나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새롭게 세우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한해를 지나면서 저희들이 다시 한번 느끼고 깨달은 것은 참으로 우리의 삶에는 고통과 아픔이 떠날 날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문제는 고통이 심각한가, 혹은 덜 심각한가, 또는 그 범위가 제한되어 있는가, 아니면 널리 퍼져있는가의 차이일 뿐,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임하는 치유와 격려 그리고 위로는 절실히 요청되고 필요했습니다. 네 번째 장기계획을 위한 설문조사에서도 이 사실은 분명하게 지적되었습니다. 비록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표어는 금년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는 사역은 내년에도 변함이 없이 계속되어 질 것입니다.
I
금년 한해를 마감하는 오늘 저는 금년에 드린 첫 번째 설교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66장이나 된 구약성경 이사야서의 말씀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약속의 말씀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1장부터 39장까지의 말씀과 40장부터 66장에 이르는 말씀사이에 여러 가지 다른 점들에 주목합니다. 그들은 40장 이후의 말씀이 갖는 문체의 독특함이나 또 말씀이 선포되는 역사적인 상황으로 미루어 서로 다른 예언자의 글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래서 1장부터 39장을 제1이사야, 39장 이후의 말씀을 기록한 예언자를 제2이사야, 혹은 익명의 예언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성서학자들 가운데 이같은 구분에 반대해서 이사야서는 이사야 한사람의 저작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오늘 이 본문 말씀을 깊이 있게 살펴보면 우리의 가슴속에서도 흥분과 기대가 솟아오름을 느낍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오늘 이 본문 말씀이 선포되는 역사적인 배경으로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말합니다. 왕을 비롯한 수많은 지도자들은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와서 바벨론 땅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화려했던 예루살렘의 왕국과 거룩한 성전은 무너져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방 땅에서 떠나온 조국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습니다. 내일이 없는 오늘, 희망을 잃어버린 채 그날 그날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같은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오늘의 메시지가 외쳐집니다. 예언자는 선포합니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40:1)"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이었습니다. 희망의 심지에 새롭게 불을 지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역사가 동터옴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같았습니다. 자신의 백성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다시 나타날 것을 예고해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의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고통과 아픔을 못 본 채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비록 우리 생각만큼 빨리 나타나지는 않으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오셔서 도와주십니다.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구약 성경 출애굽기 3장을 보면 이집트에서 공사판에 동원되어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을 전해줍니다. 이 탄식 소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출애굽기 3:7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사람과 헷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곳으로 데려가려고 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고난에 대하여 눈을 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고, 구하여 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같은 사실은 신약 성경에서도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를 보면,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약속은 바로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혜사란 말은 원래 법정에서 피고를 돕는 변호인이라는 뜻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Helper, 도우시는 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Comforter,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보혜사는 바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말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더 깊은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주시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슬픔과 고통 속에서 붙들어 주십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일으켜 주십니다. 아픔 속에 오셔서 고쳐 주시며, 방황 속에 오셔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길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는 이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셨던 그 하나님을 우리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그 보혜사 성령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십니다.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II
이같이 우리를 위로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십시다.
(1)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는 이 은혜 속에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말합니다: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40:1)" 이사야 43:1의 말씀은 이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줍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이 성경의 메시지는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천지와 우주 만물을 지으신 위대하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시라는 사실은 우리 인생에 엄청난 위로와 격려를 가져다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될 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될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모자라고, 한없이 부끄러운 인생들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은혜의 말씀을 받을 만큼 준비되고 거룩한 인생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자녀, 지명하여 부른 나의 백성, 나의 소유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국신학대학 교수를 지내셨던 김정준 박사님의 "주님의 것"이란 시가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것이외다
나 주님의 것이 되고자 원하기 전에
주님은 나를 주님의 것이라 말씀하나이다
내 부모 형제에게서 선함이 없고
내 자신에게서 아무 의로움이 없지만
그저 주님은 나를 주님의 것이라 말씀하나이다
주님이 이것을 주님의 소유물로 하셨어도
천지나 역사에 털끝 만한 변함이 없겠지만
주님은 그저 주님의 것이라 말씀하나이다
내 과거나 현재도 죄 뿐이요
또 내 미래도 거룩한 보증을 할 수 없건만
그저 주님은 나를 주님의 것이라 말씀하나이다
이것을 주님의 소유로 하시오면
주님이 이것 위해 마음 쓰시기 괴로우실텐데
그래도 주님의 것이라 하나이다
주님은 나를 주님의 것이라 하시지만
이것은 또 몇 번이나 주님을 반역할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주님은 주의 것이라 하나이다
이것이 주님 것 됨으로
주님의 곳간이 부해질 것 아니건만
그래도 주님은 "너는 내 것이라"하나이다
내게는 배암같은 간사함이 있고
표범같은 악독함이 있사온데도
주님은 그래도 "너는 내 것이라"하나이다
내 교만이 바벨처럼 높고
내 비루함이 수풀처럼 우거졌건만
그래도 주님은 "너는 내 것이라"하나이다
음부도 내 흑암에 비길 바 못되고
우주도 오히려 내 죄악보다도 적건만
그래도 주님은 "너는 내 것이라" 하나이다
주님, "너는 내 것이라"하신 참뜻을 모르겠나이다
이것을 몰라도 주님은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저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나이다
주님, 이것이 주님의 소유의 하나이오니
쓰셔도 당신 뜻, 또 버려도 당신의 뜻이외다
다만 당신의 뜻만이 이루어지사이다.
은혜로운 노래입니다. 우리를 주님의 것으로 삼아 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 여기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놀라운 위로의 은총을 체험합니다.
(2) 둘째로, 오늘 말씀 속에서 임하는 주님의 위로는 용서 속에서 나타납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의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 예언자들은 깨우쳤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간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때문이라고... 그런데 이제는 이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고 예언자는 외칩니다. 복역기간이 끝났다고 말합니다. 때리시지만, 어루만져 주시고, 다시 싸매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합니다.
여러분, 용서보다 더 큰 위로의 말씀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용서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끝입니다. 내일도 없고, 새로운 시작도 없습니다. 용서함이 없다면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모습 이것으로 끝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용서해 주신다고 하니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Second Chance, 또 한번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어제의 실패, 어제의 과오를 딛고 일어서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새로운 시작을 가져옵니다. 실패와 과오 속에서 주저앉은 인생을 다시 일으켜 줍니다. 어제의 잘못 때문에 죄책감에 매여 있는 인생이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가듯이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비상할 수 있습니다.
제가 늘 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필리핀의 어느 마을에 기도 가운데 종종 우리 주님을 뵙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교회의 주교가 이 여인을 불렀습니다. 주교는 이 여인의 신앙적인 경험이 건강하고 바른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한가지 질문을 주었습니다. 다름에 주님을 뵙게 되면 꼭 주님께 이 질문을 여쭈어 보라고 당부했습니다. 그 질문은 이 주교가 신학교에 다닐 때 무슨 죄를 지었는지? 였습니다. 아주 묘한 질문입니다. 주교가 신학교 다닐 때 지은 죄는 주교 자신만이 알기 때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면 이 여인의 신앙적인 경험이 올바르지 못한 것이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주교는 이 여인을 다시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 뵈었는지 물었습니다. 여인은 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지난번 부탁한 그 질문, 주교가 신학교 다닐 때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여쭈어 보았냐고 물었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 여쭈어 보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주교는 다그쳐 물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셨느냐고... 그때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주님 말씀이 기억나지 않으신대요." 정확한 대답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기억조차 아니하십니다.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흰눈같이 씻어주십니다. 이 용서의 은총 때문에 우리는 살맛이 납니다. 이 용서하시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 할 수 있습니다.
(3) 셋째로 우리는 새날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희망 안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고 절망을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40:10,1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주 하나님께서 오신다. 그가 권세를 잡고 친히 다스리실 것이다. 보아라, 그가 백성에게 주실 상급을 가지고 오신다. 백성에게 주실 보상을 가지고 오신다. 그는 목자와 같이 양떼를 먹이시며, 어린양들을 팔로 모으시고, 품에 안으시며, 젖을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지금 유다 백성들은 절망 속에 빠져있습니다. 하루하루가 괴로운 나날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 이 포로 생활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 앞길이 막막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이제 주님께서 그들의 아픔, 그들의 역사 속에 오실 것이라고. 그들의 눈물을 씻기시고, 그들의 목자로서 다시 한번 유대백성, 그의 양들을 먹이시고, 품에 안으시고, 이끌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above us, 우리 위에 계실 뿐 아니라 ahead of us, 우리 앞에서 가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도 오늘 앞장서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 가운데 오셔서 새날을 열어 주십니다. 새 역사를 이루어 주십니다. 이 앞장서 가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갖습니다. 이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내일을 꿈꿀 수 있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가슴에 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희망의 원천이십니다. 우리의 희망은 나의 능력이나 나의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운명이나 팔자에 있지도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무너지는 것들입니다. 결코 희망이 세워지는 반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바로 앞장 서 가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내일을 꿈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도 여전히 버틸 수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내일에 기대를 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희망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이 희망으로 우리의 절망이란 고질병을 고쳐주십니다. 이 희망으로 다시 일어서서 7전8기 아니 12전 13기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해 주십니다.
III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를 변함없이 주님의 소유로 삼아 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 속에 앞장 서 가시며 새 날을 열어 주십니다. 그런데 한가지 우리 모두 기억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아무리 위로의 샘물이 솟아나도 우리가 마시지 않으면, 그 놀라운 위로는 내 삶속에 임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3-5절 말씀은 이렇게 외칩니다.: "한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다."
이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강림절에 늘 읽혀지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위로하시는 주님의 은혜, 싸매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시려면,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주님 오시도록 열어야합니다. 주님 역사하시도록 열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현실을 주님 앞에 열어야 합니다. 믿음 생활에서 제일 안타까운 것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 앞에 마음의 빗장을 닫아 건 모습입니다. 닫아 걸었기에 어제나 오늘이나 믿음 생활에 변화가 없습니다. 마음을 닫았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는 생각과 머리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나와 관계없는 딴 세계의 이야기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나의 희망은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의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 가치, 다를 것 없는 우선순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오신 길을 닦으라고, 주님이 오실 큰 길을 마음속에, 우리의 가슴속에, 오늘의 역사속에 곧게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말씀은 바로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열면, 길을 내면 삽니다. 주님의 그 풍성하신 위로를 맛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새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에서 발행하는 'Decision'이란 잡지의 내년 1월호에 마음에 닿는 표지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기사는 바로 Johns Hopkins 대학교 병원에 있는 소아신경외과 의사인 Ben Carson과의 인터뷰 기사였습니다. Ben Carson은 아주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Detroit와 Boston의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길거리에 사람이 쓰러져 죽은 것을 보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조카 2명도 죽었고, Ben Carson도 25살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14살 되던 해 그는 청소년 한사람을 칼로 찔렀는데 그만 그 칼이 허리띠의 buckle과 부딪치면서 부러지는 바람에 죄수의 신분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건 후 Ben은 화장실 문을 닫아걸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열심히 기도하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잠언을 많이 읽었는데 이 말씀은 그에게 큰 위로와 격려, 그리고 지혜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가슴속에서 분노가 녹아내리며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앞에 눈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8살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지만, 방황하던 그는 하나님의 위로와 인도하심 속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Yale 대학을 졸업하고 소아신경외과 의사가 되어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또 청소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겨주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Ben Carson은 여러 해 전 쌍둥이 분리 수술팀을 이끌어서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오늘도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를 대변한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중립적인 적은 아무것도 대변할 수 없다고 (To be completely neutral in everything means you don't stand for anything)이라 말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 가장 당신을 흥분시키는가? 기자의 물음에 그는 한마디로 말했습니다. "His love"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가난했던 소년, 살인죄를 저지를 뻔한 그였지만 하나님의 위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새날을 열어주었습니다. 새 인생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 우리에게도 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위로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새 날을 열어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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