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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30. 강림절 첫째주일 / 장찬영목사 환송예배 - 장찬영 목사

"5년 4개월 동안의 은총"

히브리서 11:8-14

어떻게 우리 인생 길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 수 있습니까?
"그분도 정말 그때, 거기 계셨습니까?"
아브라함의 고민도 여기 있었습니다.
지난 5년 4개월, 와싱톤 한인교회 그리고 여러분!
은총 그 자체였습니다.

I

때로 인생의 길에서 "하나님께서 어디 계셨던가?" 하면서 뒤를 돌아다 볼 때가 있습니다. 어쩔 때는 계신 것 같기도 하고, 어쩔 때에는 숨어 계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는 늘 묻습니다. "하나님 그 때, 거기 계셨었습니까?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느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한참 주님과 함께 도란 도란 얘기를 하며 해변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자신의 발자국과 함께 나타난 선명한 주님의 발자국을 보면서 참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다 보니 주님의 발자국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덩그러니 자신의 발자국만 남아있는 해변가의 모습. 그때는 더 더군다나 내 인생의 가장 힘든 때였습니다. 아! 그때도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때 주님이 계시지 않았다니. 너무도 슬퍼서, 아니 견딜 수 없는 고난이 와서 슬픈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의 때 주님이 계시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 슬펐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너무 힘들어서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주님 왜 그때 저를 혼자 나두셨나요? 왜 나 혼자 걷게 하셨나요? 그것은 나 혼자만이 겪어야 하는 시험이었나요? 그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너는 너무 힘들어서 혼자 걸을 수 없었단다. 그래서 내가 너를 업었었단다. 그래서 발자국이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란다... " "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내가 본 그 한 개의 발자국은 내 발자국이 아니었군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발자국이었군요..."

그러나 이 같은 질문은 비단 우리들만의 고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 또한 인생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와 똑 같이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 그렇게 하나님과 친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얘기하셨다고 까지 했던 그 다윗도 그의 인생 길에서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냐고 하는 질문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오늘 읽으셨던 본문의 아브라함, 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자신의 고향이었던 갈대아우르를 떠나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땅, 가나안으로 가는 동안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때로 히브리서 11장은 흔히 불려지는 말인, '믿음 장'이 아니라, 이것은 '고민의 장'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을 향해 가지만,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그러나 마침내 믿음의 사람이라는 믿음의 정상에 도착하는 모습은 우리의 인생이라고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 .

그렇다면 이 시간 우리도 우리의 인생 길을 돌이켜 보며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그때 어디 계셨었습니까? 정말 그때 계셨었습니까? . . ."

사실 이 질문은 오늘 저 자신에게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지난 목회의 여정 속에서, 특별히 참으로 은총의 시간이었던 지난 5년 4개월 동안의 우리 와싱톤 한인교회에서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발자국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II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참 놀랍습니다. 돌이켜보면 돌이켜 볼수록 거기에는 하나님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신비를 가장 많이 확실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우리의 인생의 여정일 것입니다. 순간 순간에는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손길이, 마치 어느 날 구슬들이 하나로 꿰어지듯이, 같이 있을 때는 몰랐던 친구의 자리가 어느 날 그렇게 크게 느껴지는 것처럼, 지나온 인생의 여정 가운데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의 은총이 보이게 될 때 우리는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나온 발자국을 뒤돌아 본다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시는 은총의 손길을 확인할 수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단어조차 찾아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철저한 불교와 유고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성장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목사님이 부모인 사람도, 장로님이나 권사님이 부모인 사람도 많고, 아니 친척 가운데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렇게도 많건만, 저희 가정만은 어떻게 그렇게도 한명의 교회 다니는 사람 조차 없었던지... 그런데 그런 가정에, 전혀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가정에, 그것도 바로 유독 저에게 먼저 하나님은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해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 바로 이것으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은 그때, 거기 국민학교 5학년 짜리의 마음 속에 계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안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했는데 그 아이가 성장하면서, 신학교를 가겠다고 했을 때,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고 했을 때, 그 때 온 집은 다 반대를 했던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저를 통해서 교회에 나오게 되신, 비록 초신자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신 어머님의 반대는 다른 가족들과는 달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게 하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오셨던 당시 고등부 전도사님께 어머니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만 해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은 것인데, 그래서 지난 시절 하나님 모르고 살았던 것 회개하기에도 부족한데, 우리집안에서 목사가 나온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아마도 한 세대가 지난 후에야 그렇게 해도 하나님께 죄송스럽다고 하셨던 기억은, 저희 가정에 임한 하나님의 은총의 크기가 얼마나 컸던 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때 하나님은 그 자리에, 어머니의 마음에도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신학을 하면서 어려운 일이 많았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필이면, 그렇게 어렵게 결정하고 들어간 신학교 시절, 괜찮게 살던 가정은 마치 기다렸다 듯이 가장 어려운 경제적인 곤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책 한 권 사서 보기에도 부담스러웠던 그 때, 학교 도서실에서 늦은 밤 마지막 버스를 타고 돌아올 즈음에, 영락없이 정거장에서 당시 우유를 배달하는 자전거와 함께 서 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은창. 이 친구가 뭔가를 막무가내로 주머니에 쑤셔 넣어주면서 "야 책 사봐라!" 그리고 사라진 뒤, 집에 와서 꼬깃꼬깃 접혀 있는 천원짜리 지폐들. 그날 하루 종일 수금하면서 모았을 그 돈을 하나씩 펴면서 그 친구의 사랑 때문에 참 많이 울었습니다. 몇 년 동안이나, 그 친구가 우유배달을 그만 하고, 또 제가 군대에 들어갈 때까지 그렇게 그 친구는 정거장에서 밤 늦게까지 기다려 주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그때 그 정거장에, 그 친구의 마음 속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신학교 2학년 때 들어간 군대, 육군 1군단... 하나님의 은혜는 3년 동안 군종병으로 군대교회를 섬길 수 있어 해 주셨고, 그 곳에서의 경험은 이론에만 머물러 있었던 한 신학도의 시야를 영적 야전병의 시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편, 군단교회라 목사님이 사단과 연대교회로 자주 나가게 되어 새벽기도 인도부터 수요예배, 저녁예배 인도까지 하게 된 것은 신학교 2년을 마치고 온 당시 저에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중압감을 견디다 못해 고민하다가, 매주 군대교회로 배달되는 당시 '순복음 뉴스'라는 신문에 나온 조용기 목사의 설교내용을 그대로 읽는 것이 저의 설교였으니, 지금 생각해 보아도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 그 때 사단장(two star)이 허 전 안수집사 이셨는데, 새벽기도부터 모든 예배를 빠지지 않으시고, 제일 앞에 앉아서 예배 드리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날도 그렇게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조용기 목사의 스피드로 일기 시작했는데, 그만 뒤에 있는 선풍기 바람에 그 신문이 허 전 사단장님 앞에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허 집사님이 그 신문을 집어 주시더니 하는 말이 "전도사님, 그냥 계속 하세요! 괜찮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육군 two star가 육군 일등병에게 말입니다. 그날 밤, 제가 잠을 제대로 잤겠습니까? 모든 게 끝났구나, 보직이 변경되는 걸까?... 혹시 그것도 근무태만의 일종이니 영창, 군대감옥으로 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다시 맞은 새벽, 여전히 제일 앞에 나와있는 허 장군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제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돌이켜보면, 거기 그때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이 있었습니다. 거기 그때 그분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계셨던 것입니다.

1990년 전혀 뜻밖에, 저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시작되었던 시골목회는 돌이켜 보면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의사로 지내시던 분들 내외께서 조국땅에 진 빚을 갚겠다고 해서 은퇴하신 후, 경상도 시골 촌에 가서 의료사역을 하시다가 이제는 이곳에 교회가 세워졌으면 좋겠다고 하며 더 깊은 시골로 들어가셨을 때, 당신들의 빈 자리를 맡아달라고 하시던 그분들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바람 쐬러 간 그곳은 첫 목회지가 되었고, 하나님은 그곳에서 부족한 사람을 조금씩 조금씩 만지기 시작하셨습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거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목회의 어느 때보다도 참 많이 기도하고 많이 울었던,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어느 때보다도 민감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늘 적소적재에 on time에 나타나신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때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좌절도, 아픔도 있었던 때 또한 많았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오히려 이런 막막함과 좌절감속에서 그때 거기서 하나님의 만져 주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개척교회 시절, 서울이나 도시에서의 목회기회를 포기하고 시골로 들어간 마음을 하나님께서 보시겠지 하는 얄팍한 보상심리와 달리, 하나님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집사람과 저를 다루기 시작하셨습니다. 시골에 내려간 지 일 년 만에 주신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병원신세를 지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심장에 문제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정말 정확하게 만 삼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병원을 개근하였고, 때로 차리리 이 아이를 일찍 데려가셨으면 하는 기도를 드릴 정도로 힘들었는데... 이제 이런 얘기는 요즘의 저희 아이를 아는 분들에게 오히려 민망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후 건강하게 자란 아이를 볼 때 마다, 돌이켜보면 그때 거기에 여전히 철 들지 않은 영혼을 그나마 목회자로 쓰시기 위해 훈련시키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더 더욱 감사할 뿐입니다.

반면에 이러한 고난의 깊이만큼, 참 많은 은혜도 주셨습니다. 교인 하나 없는 삭막한 마을이었지만, 그렇게 몇 년 고생하자, 300년 동안 교회가 없었던 마을에서 교회 건축에 대한 꿈도 갖게 되었고, 어렵게 마을 밑에 교회부지를 구입하게도 되었습니다. 개척교회가 다 그러하지만, 이렇게 땅까지 사다 보니, 저나 집사람 반지는 물론이고, 꼬마 돌 때 들어 온, 반지까지도 다 헌금으로 드리다 보니 늘 쪼달리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올라갔다가, 서점에 들려 얼마 남은 지를 모르고 책을 사고 보니, 김천까지 내려가는 기차표에 남은 돈은200원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찌하다 보니 그 날 올라올 때 시간이 잘 안 맞아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점심은 기차 안에서 못 먹고, 이제 저녁도 못 먹고 밤 차로 내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서울역에 있는 한 식당에 가서 라면 값을 보니까 당시400원이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사정을 얘기했더니, 일단 돈을 내라 그러더니, 라면을 반을 쪼개서 넣는 것입니다. ...아! 라면 하나에 그렇게 쉽게 마음이 무너질 줄은 몰랐습니다. 라면 스프물로 가득 배를 채우고 서울역을 걷는데, 왜 그리 초라 한지..." 하나님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제가 지금 시골에서 얼마나 고생하는지 아세요? 제가 거기 놀러 간 겁니까? 당신의 교회 짓겠다고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그러나 돌이켜보니 그때에도 하나님 거기 계셨습니다. 그 라면 집에도, 그 서울역에도, 훌쩍이며 내려 오는 통일호 기차 안에도. 거기서 그분은 저를 만져주고 위로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은 어떠하십니까? 단지 보이지만 않으셨을 뿐, 하나님은 그때 거기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만져주시고 위로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돌이켜 보면 다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 땅에 들어갈 때에는 도무지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돌이켜 보니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말입니다.

III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정말 생각지 못했던 이곳 미국땅에 와서 사역했던 이곳 와싱톤 한인 교회와 여러분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조국 땅을 떠나 그것도 그 많은 나라 중 미국에서, 그것도 이 넓은 땅에서 하필이면 와싱톤에서, 그것도 그 많은 교회 중에서 하필이면, 이곳 와싱톤 한인교회에서 만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신비와 은혜가 있고도 남음인 것입니다. 1998년 8월 첫째 주, 강단의 스테인드 글라스 사이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빛을 맞으면서 감격으로 예배를 드린 것이 우리 와싱톤 한인 교회 에서의 첫 예배였습니다... 한국, 분당에 있는 불꽃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면서, 4년째 되는 해에 유학을 준비하고자 했지만 도저히 목회상황이 유학시험을 준비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무작정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언어연수로 처음 미국땅 Atlanta를 밟은 지 3개월 후, 겁 없이 치렀던 토플 점수가 아슬아슬하게 턱걸이로 걸려 웨슬리 신학교에서 admission을 받게 된 것은 돌이켜보면 정말 기가 막힌 하나님의 구원하심이었습니다. 이 구원하심이 없었다면 워싱톤에 올라올 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얘기 들으면, 남들은 다 좋은 점수에다 전액 장학금으로, 거기다 용돈까지 받아가면서 공부 했다고들 하지만, 돌이켜보면 턱걸이로 붙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생각하니 그것도 은혜가 되었습니다. 또한 기대하지 못했는데, 부 목사로 섬겼던 불꽃교회에서 웨슬리에 합격한 것을 듣고, 2년 동안의 수업료를 장학금으로 도와주게 된 것 또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었습니다. 워싱톤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 확정 된 이후, 당시는 알지 못했던 와싱톤 한인 교회의 주소를 어떻게 알게 되어, 조 목사님 앞으로 편지를 보냈던 것이 시작이 되어서 마침내 우리교회에서의 사역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돌이켜보면 그때 거기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편지 하나만을 달랑 받으신 채, 올라와서 꼭 만나자고 하셨던 목사님이나, 이왕이면 큰 교회에 할 일이 많지 않겠냐고 생각하여 워싱톤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가 어디 있는가 해서 무작정 편지를 쓴 저나 금 생각하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이 그저 늘 외부에서 날아오는 일상적인 편지로 생각하여 잊어버리셨다면, 오늘 저는 이 자리에 있지 못할 터인데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거기 그때에 조 목사님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는가 봅니다.

그렇게 감사함으로 시작된 사역의 시간은 잠깐 머문 것 같았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5년하고도 4개월을 훌쩍 뛰어 넘었습니다. 때로 시간은 그렇게 야속하여서 우리의 의지 하고는 상관없이 늘 널을 뛰기나 하는 양, 훌쩍 훌쩍 마음대로 가는 것 같습니다. 붙잡는다고 붙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지나간 시간은 늘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한 후회감과 게으름에 대한 자책감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와싱톤 한인교회에서의 5년 여 동안의 사역은 참 은총 중의 은총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만남'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들 이었습니다. "새 날이 온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이웃처럼 보이면 그때 새 날이 온 것이다"라고 얘기했던 성 프란시스코의 말처럼, 주님은 그렇게 와싱톤 한인 교회 교우 여러분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당신의 모습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주님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은총' 이었지만, 아름다운 교회에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 '행복'이었습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에게 일은 '부담'이 될 수 있지만,, 행복을 느끼는 사람에게 일은 '날개'가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지난 사역 속에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목회실 staff 들과의 만남은 축복, 그 자체였습니다. '함께 일하는 즐거움'에서 나아가 '다름에서 오는 다양함'은 오히려 부족한 시야를 뜨게 해주는 기회가 되었고, 가까이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영적 Mentor의 존재가 이제는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된 양지였었구나 생각하니, 왜 좀 더 많이 묻고 배우며, 좀 더 가까이 하지 못했던가? 하는 괜한 쑥스러움이 후회로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교회의 자랑이요, 아니 주님의 자랑이신 여러분들과의 만남을 저는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좋은 설교는 훌륭한 청중에게서 나온다"는 챨스 스탠리 목사의 말처럼, 지난 시간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며, 함께 말씀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일반 다른 목회자들이 갖지 못한 황홀한 경험이었습니다. 또한 여러분들로부터 받은 분에 넘치는 사랑과 격려는 한 목회자가 자신의 목회여정 속에서 헤매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렇게 감사만 했는데, 이제 사랑의 빚만 잔뜩 진 채, 떠나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사랑을 주는 사람 이거늘, 반대로 사랑만 받고 떠나는 마음이어서 더 더욱 죄송 할 뿐입니다. 지난 시간 따듯한 양지가 되어주시고, 제게는 하나의 도달해야 할 큰 모델이 되어주신 조 목사님 내외분, 함께 동고동락했던 신실한 동역자들, 그리고 아버지같이, 어머니같이, 큰 형님처럼, 때로 시집 간 큰 누이처럼 격려해주시고 사랑을 부어 주셨던 장로님들, 권사님들, 속원들을 마치 한 가족처럼 여기며 눈물로 함께 기도했던 속장님들, 집사님들... 그리고 우리 교회의 자랑이요, 주님의 자랑인 여러분 모두...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여러분의 사랑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랑에 대해 아마도 목사가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어느 곳에 가든지 주님의 몸 된 교회 열심히, 신실하게 섬기는 것이라 여겨지어, 그런 목회,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를 감당하도록 최선의 경주를 다하겠습니다. 이제 부임하게 되는 남부 프로리다 교회! 사실 저에게는 여전히 과분한 교회이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기에, 아니 하나님께서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셨기에, 하나님의 계획과 부르심이 있기에 부족하지만 순종하여 주님의 뜻을 헤아려 보겠습니다.

조 목사님 자주 쓰시는 말, "마음껏 쓰임 받는 인생, 목회" 되도록 바짝 엎드리겠습니다. 이제 아우교회로, 형님인 와싱톤 한인교회에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사역하겠습니다. 어려운 것이 있으면 기도도 부탁 드리고, 함께 도울 일이 있으면 부족하나마 힘껏 돕겠습니다. 와싱톤 한인교회가 그러했듯이, 이민교회와 미국사회를 깨우는 사명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많이 기도해 주시고, 또한 잘못된 길로 가는 것 같으면 꾸짖어도 주십시오. 또 개인적으로 조 목사님께는 봄철 부흥회를 미리 부탁을 드렸습니다. 아직 스케쥴은 못 잡으셨지만, 이왕에 목사님 내려오실 때 한번 꼭 내려 오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살아봐야겠지만, 교회가 위치한 Fort Lauderdale은 전형적인 휴양지라고 합니다. 웬 목사가 벌써부터 휴양지냐고 그러시겠지만, 이곳에서 스트레스 받으신 분들을 위해 먼저 내려가서 터 잡고 기다리겠습니다. 워싱톤에서 힘드시면, Fort Lauderdale로 내려오십시오. 그곳에서 충전 받으신 후, 다시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올라가시기 싫으면 주저 앉으셔도 괜찮습니다... 이왕에 동생교회 생겼으니 부담 없이, 봄, 여름, 가을은 워싱톤에서 겨울은 그곳에서 사시면 어떻습니까? 저도 여름에는 올라오겠습니다. 올라왔을 때, 누구시더라 묻지 마시고, 여러분의 집에 찾아가면 묻지 마시고 재워 주시기 바랍니다...

믿음 안에서는 'Goodbye'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Goodbye'보다는 'See you'가 어떻습니까? 미국 땅, 한쪽은 미국의 수도 기가막힌 워싱톤에서, 한쪽은 여름에 좀 더워서 그렇지 거기도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는 Fort Lauderdale에서 선한 믿음의 경주가 이루어지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기쁜 소식들을 주고 받도록 우리 함께 기도하며 함께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싶습니다.